향기(香氣)로 남는 사람
세상에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오래 머무는 존재들이 있다.
말없이 지나가지만 지나간 자리마다 온기를 남기는 것들
나는 요즘 그런 존재들을 떠올릴 때마다 사람의 삶 또한 결국
‘어떤 흔적으로 남는가’의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태양은 수억 년을 타오르면서도 자신이 위대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떠오르고 그저 지고 그 사이에서 모든 생명을 고르게 비춘다.
누군가를 특별히 택하지도 누군가를 외면하지도 않는다.
다만 빛은 조용히 머물다 사라진다.
그러나 그 빛이 없는 곳은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
바다는 더욱 깊은 침묵으로 말한다.
그 안에는 셀 수 없는 시간과 이름 없는 사연들이 가라앉아 있다.
스스로의 깊이를 설명하지 않지만 설명이 필요 없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바다는 이미 알고 있다.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파도조차 어떤 감정의
과장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를 반복할 뿐이다.
매화는 겨울을 견딘 뒤에야 피어난다.
그러나 그 꽃은 '내가 이겨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향기를 남긴다.
누군가 알아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를 증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 절제된 침묵이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대나무는 비어 있기 때문에 흔들린다.
그러나 꺾이지 않는다. 가득 찬 존재는 무겁지만 비어 있는 존재는 가볍고 단단하다.
바람을 받아들이되 바람에 휘둘리지 않는 이유는 이미 안쪽이 비워져 있기 때문이다.
비움은 약함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힘이다.
오래된 악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소리가 깊어진다.
나무는 기억을 품고 침묵은 울림이 된다. 새것이 가진 선명함보다
오래 견딘 것들이 가진 울림이 더 멀리 간다. 낡음이 아니라
숙성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촛불은 자신을 태우며 빛을 만든다.
줄어드는 것은 몸이지만 넓어지는 것은 세계다.
그러나 그 빛조차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다만 어둠이 조금이라도 덜 두렵도록 곁에 머물 뿐이다.
존재는 때로 그렇게 자신을 소모하며 완성된다.
자연과 사물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품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것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래 견디며 드러난 본래의 성질이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꾸며서 얻는 향기는 오래가지 못하고 살아내며
생겨난 향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사람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많은 것을 가진 모습이 아니라
함께 있는 이의 마음을 조용히 정돈시키는 힘이 아닐까.
말하지 않아도 안정이 되는 사람, 존재만으로도 공간을 맑게 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지만 오래 남는다. 화려하게 기억되지 않지만
어느 순간 문득 떠오른다. 마치 아주 오래된 향처럼.
결국 우리가 바라는 삶도 그것일지 모른다.
세상을 크게 바꾸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 누군가의 마음에 잠시 바람을 멈추게 하는 사람.
그리고 나는 조용히 다짐한다.
나 또한 언젠가 이름이 아니라 향기로 남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고.
적광(寂光) 류재창
2026.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