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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단군왕검. 단군과 고조선을 완전 부정하는 한국사학계

작성자Bipa|작성시간26.06.23|조회수0 목록 댓글 0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단군왕검. 단군과 고조선을 완전 부정하는 한국사학계

단군과 단군조선의 기록은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국통감을 비롯하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각종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그중 삼국유사오 제왕운기 및 동국통감외기에 기록된 내용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아울러 단군을 신화로 치부하고 단군조선의 역사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인들과 이를 추종하는 한국 역사학계의 주장을 소개하며, 그 근원이 되는 일본인들의 평안도 및 황해도의 낙랑과 대방 존재를 주장한 일본 고고학자들과 일본 역사학자들의 고고학 유물발굴 날조의 내용까지 소개를 한다.

 

◉『삼국유사1, 기이 편 고조선(古朝鮮) 조 기록

일연스님이 지으신 삼국유사에는 우리나라의 기원을 설명해 주는 고조선의 성립내용이 들어 있다. 이를 번역하여 소개한다.

고조선(古朝鮮) (王儉朝鮮)

위서(魏書)에 적혀 있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 *후대의 동국여지승람 등 각종 서적에는 檀君王儉으로 대부분 기록하고 있음)이 있었다. 아사달(阿斯達: 경에는 무엽산이라고도 하고 백악이라고도 했는데, 백주에 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도 한다. 이는 지금의 백악궁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불렀다. 이것은 요나라(: )와 같은 시대였다.

 

또 고기(古記)에 적혀 있기를, “옛날에 환인(桓因: 帝釋의 다른 이름)의 서자 환웅(桓雄)이 늘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다스리고자 하였는데, 아버지가 자식의 뜻을 알고 세상을 내려다보니, 삼위태백(三危太白)이 가히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므로(弘益人間), 이에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서 내려 보낸 후 하늘의 뜻을 펴도록 했다.

환웅은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태백산은 지금의 묘향산)에 신단수(神壇樹: *후대의 동국여지승람 등 각종 서적에는 檀樹로 기록하고 있음) 아래로 내려와 이곳을 신시(神市)라고 부르니 이 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한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먹고 사는 곡식(主穀)과 평생 살아가는 생명(主命),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질병(主病), 잘 잘못에 따른 형벌(主刑), 인간의 선악(善惡) 등을 주관하고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들을 주관했으며,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로 다스렸다(在世理化: 理化世界)

 

이때 곰 1마리와 범 1마리가 같은 굴에 살고 있으면서 그들은 항상 신웅(神熊: *환웅천왕)에게 사람이 되게 해 주기를 원하면서 기도를 하였다. 이때 신(: *환웅천왕)께서 이들에게 신령스런 쑥 한 다발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곰과 범은 이것을 받아서 먹고 21일간을 금기하여 곰은 여자의 몸을 얻게 되었으나, 범은 금기를 하지 못하여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웅녀는 그와 혼인해 주는 이가 없으므로 항상 단수(壇樹) 아래서 아이 잉태하기를 축원하였다. 환인은 이에 거짓 사람으로 변하여 이내 잉태하여 아이를 낳으니 이름이 단군왕검(壇君王儉: 檀君王儉)이라 하였다.

 

단군은 중국 당나라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당고가 즉위한 원년은 무신년이다. 그러니 50년이면 정사년이요 경인이 아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의심스럽다)에 평양성(지금의 西京)에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이라 하였다. 또 주나라 호왕(虎王: 武王)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왕으로 봉함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기었다가 후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었는데, 그때 나이 1908세 이었다.

 

***참고: 위서란 무엇인가?

위서(魏書)란 조조의 아들 조위(曹魏)가 세운 위나라에 관한 역사서를 말하며, 현재 후위서(後魏書: 130), 위략(魏略: 50), 위서(魏書: 47), 삼국지 위지(三國志 魏志: 일부 전래됨) 등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으나, 수나라 위담이 쓴 위서(魏書: 107), 당나라 장대소가 쓴 위서(魏書: 100), 배안시의 원위서(元魏書: 30) 등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일연스님은 위서(魏書)를 인용했다고 하므로 아마도 위담이 쓴 위서(魏書)이거나 장대소가 쓴 위서(魏書)가 동일한 명칭이나 이 책이 인용한 책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제왕운기(帝王韻紀)의 단군기록

이승휴가 지으신 제왕운기는 중국의 역대 왕조와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를 상하 2권으로 나누어서 기록한 책자이다. 필자는 제왕운기의 영인본이나 해설 책자를 구하고자 여러 해 찾았지만 찾지 못하였는데, 다행히 이번에 교보문고에서 전자검색으로 김경수 씨가 역주한 제왕운기책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중 하권에 수록된 단군관련 내용을 원본(原本) 참조하여 소개한다.

 

<지리기(地理紀)>

삼가 국사(國史)에 의거하고 한편으로는 각 본기(本紀)와 수이전(殊異傳)에 실린 바를 가려 뽑고, 요순(堯舜) 이래의 경전(經傳)과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사서(史書) 들을 참조하여 허튼 말을 버리고 이치에 맞는 것을 취하여, 그 사적을 펴고 이를 노래함으로써 흥망한 그 연대를 밝히니 모두 1460언이다.

(謹據國史하고 旁採各本紀與夫殊異傳所載하며, 參諸堯舜而來經傳子史하여 去浮辭 取正理하고 張其事而詠之하여 以明興亡年代하니 凡一千四百六十言이라)

요동에 하나의 별천지가 있으니 지역은 중국과 구별되어 나뉘었네.

큰 파도 넓은 바다 삼면을 둘러쌌고 북쪽에 있는 대륙과 끈처럼 이어져 있네(連陸) *1)

*1) 본기(本紀)에 기록되어 있기를 상제환인(上帝桓因)에게 서자(庶子)가 있었으니 웅()이라고 하였더라. 기록에 적혀있기를 삼위태백(三危太白)으로 내려가서 홍익인간을 하도록 해라(弘益人間歟)하니 이에 따라서 웅()이 천부인 3개를 받고 천인 3천명을 데리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오니 이를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손녀(孫女: *천손 중의 한 여자로 해석함이 올바를 것임)로 하여금 약을 먹게 하여(飮藥: *환인천제가 약을 먹게 시킨 것으로 보임) 사람의 몸을 이루게 한 후 단수신(檀樹神: 檀雄天王)과 혼인을 하게 함으로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이다.

조선지역에 머물면서 임금이 되시니 이와같은 연고로 시라(尸羅: 新羅), 고례(高禮: 高句麗),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夫餘), ()와 맥()이 모두 단군의 뒤를 이어온 나라들이라(皆檀君之壽也). 다스리기를 일천 이십 팔년이다가 아사달산으로 들어가서 신(: 山神)이 되시니 돌아가시지 않는 연고이니라.

 

가운데 사방천리 여기가 조선이니, 강산의 뛰어난 모습은 천하에 이름이 높네.

농사지어 먹고살고 우물 파서 물마시며, 예의바른 국가이어서

중국인들도 소중화(小中華)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네.

(遼東別有一乾坤하니 斗與中朝區以分이라 洪濤萬頃圍三面하고 於北有陸連如線이라 中方千里是朝鮮이니 江山形勝名敷天이라 耕田鑿井禮義家華人題作小中華)

 

<전조선기(前朝鮮紀)>

처음에 어느 누가 나라를 열었던고 석제(釋帝)의 손자로 이름은 단군(檀君)일세.

요임금과 같은 때 무진년에 나라를 세워 순임금 지나 하()나라까지 왕위에 계셨도다.

은나라 무정 8년 을미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서 신선이 되었으니 *2)

*2) 지금의 구월산이다. 다른 이름으로 궁홀(弓忽)이며 또 다른 이름은 삼위(三危)이니 사당이 아직까지 있다. 나라를 누린 것이 128년이었다.

 

나라를 누린 것이 128년인데 그 조화는 상제(上帝)이신 환인(桓因)이 전한일 아니던가?

(初誰開國啓風雲釋帝之孫名檀君이라 並與帝高興戊辰하여 經虞歷夏居中宸이라 於殷虎丁八乙未入阿斯達山爲神이라 享國一千二十八無奈變化傳桓因)

 

동국통감 외기(東國通鑑外紀)의 단군 기록

동방(東方)에는 최초에 군장(君長)이 없었는데,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자 국인(國人)이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이가 단군(檀君)이며 국호(國號)는 조선(朝鮮)이었는데, 바로 당요(唐堯) 무진년(戊辰年; 서기 전 2333)이었다. 처음에는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뒤에는 백악(白岳)으로 도읍을 옮겼다. ()나라 무정(武丁) 8(서기 전 1317) 을미(乙未)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고기(古紀)에 이르기를, ‘단군이 요()와 더불어 무진년(戊辰年)에 함께 즉위하여, ()나라와 하()나라를 지나 상()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乙未)에 이르러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이 되었는데, 148년의 수명을 누렸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의심스럽습니다. 지금 살펴보건대, 요 임금이 즉위한 것은 상원 갑자(上元甲子)인 갑진년(甲辰年; 서기 전 2357)에 있었는데, 단군의 즉위가 그 후 25년 무진년에 있었다면 요와 더불어 함께 즉위하였다라고 한 것은 잘못입니다.

 

()나라와 우나라로부터 하나라와 상나라에 이르러서는 세상 인정이 점점 야박해져서 인군(人君)이 나라를 오래도록 향유한 자가 5,60년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찌 단군만이 홀로 148년의 수명으로 한 나라를 향유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그 말이 꾸며낸 것임을 알겠습니다. 전배(前輩)가 이르기를, ‘148년이라고 한 것은 곧 단씨(檀氏)가 대()로 전하여 지나온 햇수이고, 단군의 수명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근세(近世)에 권근(權近)이 천정(天庭, 명나라)에 들어가 뵈니,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권근에게 단군을 시제(詩題)로 하여 시()를 지으라고 명하였는데, 권근의 시에 이르기를, ‘세대(世代)를 전한 것은 얼마인지 모르나 역년(歷年)은 일찍이 천년(千年)을 지났다.[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라고 하니, 황제가 보고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의논에서도 권근의 말한 것이 옳다고 하였으므로, 우선 보존하여 뒷날의 참고에 대비하도록 합니다.”

<츌초: [네이버 지식백과] 단군 조선 [檀君朝鮮] (국역 동국통감)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889959&cid=62135&categoryId=62151

***참고: 단기의 기원을 서기전 2333년으로 기록한 것은 동국통감외기(外紀)의 기록에 당요(唐堯) 무진년(戊辰年; 서기 전 2333)에 의한 것이다.

 

한국 역사학계는 단군을 신화로 치부하고 단군조선의 역사도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단군이나 단군조선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 치부하고 있다. 그들은 단군이 신화일 뿐 역사가 될 수 없다고 강력한 주장을 하고 있다.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이것이 한반도 북부에서 만주 일대가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던 과도기의 역사적 믿음이 반영된 산물로 보기도 했다.... '단군신화'라는 용어를 말하면 친일 식민사학자라고 몰아가기 일쑤지만,...애초에 '단군신화'는 주몽신화, 박혁거세신화, 수로왕신화같이 한국사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역사 속에서도 흔하게 나타나는 건국신화로서 단어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이유가 하등 없다.”<출처: 나무위키>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고조선에 대하여도 아래의 내용과 같이 역사적 기록이 거의 없고, 오직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가 유이(唯二)한 역사기록이라도 주장하고 있다.

현존하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으나[22]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요서 일부에서 요동을 거쳐 한반도의 북부까지를 통치한 것으로 본다. 만주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중국 동쪽 지역을 부르는 지명 중 하나로 사용되었던 조선이 이 나라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으며, 훗날 이 나라 또는 지역의 이름을 딴 근세의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먼저 세워졌던 조선을 고조선(古朝鮮)이라고 표기하고 부른다.

[22] 현재까지 남아 있는 한국 사서에서 처음 고조선이 언급되는 것은 삼국유사이다. 한국 고대사는 잦은 내전과 외침 등으로 관련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태라, 많은 부분을 외국 사서와 금석문 등에 의존해야 한다. 특히 후삼국 이전의 자세한 왕조 계보나 사건을 담은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거의 유이(唯二)하다.”<출처: 나무위키>

***참고: 일본인들은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단군고기삼국유사이전의 어떤 기록에도 실려 있지 않다. 이 점 때문에 단군고기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에 의하여 부정적으로 연구되었다. 그러나, 중국 산동성(山東省) 가상현(嘉祥縣) 무씨사당(武氏祠堂)의 석실(石室)에 붙인 화상석(畫像石)의 내용은 이설이 전혀 없지는 않으나, 단군고기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사실이 인정되었다. 무씨사당은 전한(前漢) 때 만들어졌으므로 단군고기는 일연보다 무려 1,200여 년이 앞선 시기에 한반도는 물론, 산둥반도를 포함해서 동북 아시아 일대에 알려져 있었던 셈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단군과 단군조선이 사라지고 한사군 낙랑만 남다.

위와 같이 한국 역사학자들이 단군을 실존 인물로 전혀 인정하지 못하고, 또 고조선(朝鮮)도 실존의 국가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국립 중앙박물관에 고조선의 연표도와 지도도 실종된 전시실이란 다음의 인터넷 글이 올려진 바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란 곳에서도 식민사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일본인들이 주장한 단군과 단군조선이 신화라는 주장과 이를 추종하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 안국의 현실이다.

https://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493

고조선의 연표도, 지도도 실종된 전시실

국립중앙박물관 고조선 전시어라, 단군조선이 사라졌다?

얼마 전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요즘 이곳이 서울의 명소로 자리를 잡으면서 주말마다 사람이 바글바글하죠.

그런데! 2월에 새로 개관한 고조선 전시를 보고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고요? 단군이없어요. 지도도, 연표도이제 고조선이 제대로 보이지 않더라고요.

1. 고조선이 청동기랑 갈라졌다?!

예전 전시에서는 고조선관과 청동기관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번에는 따로 떨어져 있어요.

덕분에 고조선이 마치 철기시대 이후에 성립한 나라처럼 보이는 묘한 연출이 되었습니다.

2. 고조선이 끼워 팔기당했다?!

전시실에 들어가면 고조선, 부여, 삼한이 다 한데 모여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조선은 휙 지나가고, ", 그냥 여러 부족 중 하나였구나?"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예요.

3. 연표랑 지도 실종 사건

2005년 개관 당시에도 고조선 개국 시기가 누락된 연표로 말이 많았는데요.

이번에는 아예 연표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지도도 안 보여요. 고조선이 어디까지 뻗어 있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4. 단군왕검, 어디 갔어?

고조선 건국사화의 주인공인 단군왕검에 대한 해설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나라는 누가 세웠지?”라는 기본적인 질문에도 답을 못 주는 전시라니조금 황당했죠.

5. 비파형 동검은 봉인한다?!

고조선의 아이콘 같은 만주 지역의 비파형 동검 문화권은 쏙 빠지고, 한반도의 청동기 마을 유적만 보여주더군요. 그 결과 고조선은 마을 군장 사회정도로 격하된 느낌을 줍니다.

6. 그리고 한사군 평양 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바로 이거.

전시에 버젓이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해설이 붙어 있더군요.

이건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한국사를 축소하려고 주장한 대표 학설인데,

국립중앙박물관이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니놀랄 노()

아니 근데 진짜로 이게 국립중앙박물관 맞나요?

단군이 없고, 지도도 없고, 연표도 없고, 거기다 한사군은 평양에 있었다 당당하게 써 놓고요

진짜 이게 무슨 전시입니까?

왜 이런 전시를 하는 건지 그 이유가 궁금해졌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국 고대사의 얼굴 같은 곳이잖아요.

그런데 이번 전시는 오히려 일제 강점기 식민사관과 중국의 동북공정 전시를 보는 것 같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이렇게 요청하고 싶습니다.

단군왕검 건국사화 왜 뺐는지 이유 밝혀라!”

홍산문화·하가 점 하층 문화. 하가 점 상층문화의 발굴 자료랑 고조선 문화권을 연결하라!.”

이제는 사대 사관, 일제 식민사관에서 벗어나 제대로 전시하자.”

 

뿌리깊은 식민사학계의 단군조선 부정과 말살을 비판, 수정함이 필요

우리나라의 역사학계는 세키노 타다시(關野貞)가 한일합병이 되자마자 황해도 봉산군에서 발견하고 발굴했다고 주장하는 장무이 무덤에 대방태수 장무이의 무덤이라는 벽돌명문(銘文)이 나왔다고 발표를 하고, 또 평안도와 함경도 등 수십 곳 무덤에서도 낙랑계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발표하면서 한사군의 낙랑은 평안도 일대에, 한사군의 대방은 황해도와 경기도 북부에 설치되었다는 한반도 내 한사군설이 고착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해설을 버젓이 전시하고 있는 것도 모두 이 세키노 타다시의 고고학 발굴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러나 세키노 타다시는 북경 유리창에서 구입한 수많은 낙랑계 유물을 몰래 밀수한 후 평안도나 황해도의 무덤 발굴 시 이를 몰래 끼워넣고, 평안도나 황해도에서 낙랑계 유물이나 대방계 유물이발굴되었다고 사기를 친 것이다. 이와 같은 세키노 타다시를 비롯한 일본인들의 고고학 유물발굴 날조가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는 밝히지 못하고 일본인들의 고고학 발굴 내용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이고 있다. 낙랑과 대방은 역사적으로 만리장성의 안쪽 조백하 부근에 밀집해 있었고, 평안도나 황해도에 설치된 사실이 전혀 없다.

필자는 세키노 타다시와 일본인들의 고고학 발굴 날조를 다시 한 번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세키노 타다시의 장무이 무덤 발굴과 낙랑 평양무덤 발굴품이 오염되었고, 폐기되어야 할 이유

황해도 장무이 무덤과 평양 낙랑군 유적 발굴에 최고로 기여한 자는 세키노 타다시(関野 貞)이다. 그는 수차 북경의 유리창(琉璃廠)이라는 골동품 판매 중심지를 방문하고 많은 낙랑군 유물을 구입했다는 일기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그의 일기장에는 북경 유리창에서 다량의 한 대(漢代)와 낙랑(樂浪) 유물을 구입했다고 했다. 그가 북경에서 낙랑 유물을 구입했으며, 낙랑이 북경부근에 있었다고 해야 했지만, 그는 구입한 유물들을 평안도와 황해도 무덤 발굴 시 끼워 넣고, 평안도에서 낙랑 유물을 발견했으니, 평안도가 낙랑 지역이라고 날조 왜곡함을 서슴치 않았다.그는 고고학을 오염시킨 범죄자이었다.

 

그의 일기장에는,

대정 7(1918) 320일 맑음 북경

서협(西脇)씨의 소개로 중산용차(中山龍次氏)(중국: 지나 교통부 고문, 월후 출신)를 방문했다. 그의 소개로 우편국장 중림(공백) 씨를 방문하여 우편국 촉탁인 문학사 흑전간일(黑田幹一) 씨의 동도(東道)부터 유리창( 瑠璃廠)의 골동품 점을 둘러보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한나라 때(漢時)의 발굴품을 300여 엔에 구입했다.

(大正七年三月二十日晴 北京西脇氏紹介二ヨリ中山龍次氏(支那交通部顧問, 越後 出身同氏紹介二ヨリ郵便局長中林(空白郵便局囑託文學士黑田幹一東道ニヨリ瑠璃廠骨董店廻覽, 朝鮮總督府博物館漢時發掘品三百餘円.)

 

대정 7(1918) 322일 맑음

오전에 죽촌(竹村) 씨와 유리창에 가서 골동품을 샀다. 유리창의 골동품 점에 는 비교적 한 대(漢代)의 발굴물이 많아서, 낙랑(樂浪) 출토품은 대체로 모두 갖추어 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했다. (二十二日晴 午前, 竹村氏 瑠璃廠 往古玩購. 瑠璃廠 骨董鋪 比較的漢代 發掘物多, 浪出土品大抵皆在, 余極力之蒐集.)라고 기록 되어 있었다(자료 출처: 문성재 교수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세키노 타다시 (関野 貞 , 1868~ 1935)”

 

또 평양 낙랑군 태수의 봉니라고 주장한 유적이 현장에서 발굴한 게 아니고 조선총옥부 박물관에서 사들인 것이란 기록도 있다.

“19221030,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낙랑태수장봉니를 고가인 150원에 매입

“193112,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낙랑태수장봉니를 100원에 매입

“19342,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낙랑대윤장봉니를 100원에 매입” (자료 출처: 문성재 교수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참고: 위의 대방과 낙랑군유적 발굴에 최고로 기여한 자는 세키노 타다시(関野 貞)는 북경 유리창을 찾아가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한나라 때의 골동품을 첫날 300여 엔() 어치의 엄청난 양을 구입하였다고 하였다.

당시 300엔은 “1922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낙랑태수장봉니를 고가인 150원에 매입했다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드시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한 대와 낙랑 유물을 매입하였던 것이다.

 

세키노 타다시(関野 貞)는 이틋날인 1918322일에도

유리창의 골동품 점에 는 비교적 한 대(漢代)의 발굴물이 많아서, 낙랑(樂浪) 출토품은 대체로 모두 갖추어 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했다아고 일기에 기록하고 있는데, 이날 낙랑의 출토품이 대체로 모두 갖추어져 있다고 한 낙랑 유물을 적극적으로 구입한 수량이 얼마나 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세키노 일기에 엄청난 양의 낙랑 유물을 북경 유리창에서 구입했다고 기록산 사실을 볼 때 세키노는 마땅히 낙랑이 북경 부근에 있었다고 주장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같이 세키노가 구입한 한 대와 낙랑 유물이 평양의 낙랑군 유적 발굴 시 유리창에서 구입한 낙랑군 골동품을 평양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슬쩍 집어넣어서 날조 조작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세키노가 이같은 수법으로 낙랑과 대방의 골동품을 황해도 대방의 고고학적 유물이라고 위조하고, 평양의 냑랑계 유물이라고 위조하였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틀림없는 사실임을 확신한다. 그 이유는 대방과 낙랑이 황해도나 평양에 있었던 적이 역사적으로 없었고, 모두 만리장성 안쪽 조백하 부근에 있었음이 역사적으로 증명되기 때문이다. 부연하면, 수양제의 침략경로와 당태종의 치략경로 최초 목표에 낙랑과 대방 및 현도, 요동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낙랑과 대방과 현도는 요서 만리장성 안쪽에 있었고, 황해도나 평안도 또는 압록강변에 존재한 사실이 역사적으로 없다.

 

결론

일연스님의 삼국유사 중 단군왕검 기록과 이승휴의 제왕운기 중 단군왕검 기록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한국 역사학계는 단군을 신화로 치부하고 단군조선의 역사도 인정하지 않는다. 단군조선이 실존하였다고 하면, “환빠라는 등 비속어로 단군왕검 실존설을 부정한다. 또 국립박물관의 전시실에도 단군왕검이나 단군에 관한 역사는 완전히 부정, 말살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한국의 고대 역사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 고대사 중 단군이나 단군조선의 말살은 일본인들의 주장이나 일본인들의 고고학 발굴을 신봉하는 한국 역사학자들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 고고학자 세키노 타사시나 일본인들은 북경 유리창에서 구입한 한나라 때나 낙랑의 유물을 밀수해 온 이후 이를 평안도나 황해도의 무덤 발굴 시 끼워넣고, 고고학을 날조하여 한반도 내 평안도 낙랑군 설이나 황해도 대반군 설의 고고학 증거라고 제시해 왔던 것이다. 이들은 북경 유리창에서 막대한 낙랑 유물을 구입하였으므로 북경에 낙랑이 존치했다고 고고학적 발료를 해야 했음에도 도굴품을 이용하여 평안도 낙랑군설과 황해도 대방군설을 고착화 시켰던 것이다.

일본인들과 한국역사학계에서 완전 부정하는 단군의 실존설과 단군조선의 역사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필자는 단군이 실존하는 역사적 인물이란 점과 단군조선이 실존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앞으로 계속 게재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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