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옮기면 아래와 같습니다.
원효의 일심이문이 궁금합니다.
최근 원효대사에 대해 공부하던 중 일심이문(一心二門)에 대한 동영상 강의와 논문도 여러편 읽어 보았지만 제 실력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특히, 아래 문장을 이해하고 싶으나 그런가 보다 정도의 얄팍한 이해만 가능할 뿐입니다. 진여문은 불성이고, 생멸문은 일상적인 중생의 흔들리는 마음인데 이것이 모두 일심으로 포섭된다는 것 같기는 한데, 제가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그리고 왜 진여문, 생멸문처럼 문이라고 표현했는지도 궁금합니다. 또, 원효대사의 귀일심원요익중생(歸一心源饒益衆生) 이라는 표현에서 중생을 생명체로 보는 것이 맞는지 인간을 의미하는 것인지, 무생물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포함하는지도 궁금합니다. 이렇게 무례하게 모호한 질문을 드려도 되는지 조심스럽지만, 아래 문장에 대한 해설이 궁금합니다.
진여문(眞如門)은 더러움[染]과 깨끗함[淨]을 통틀은 모습[通相]이다. 통틀은 모습 밖에 따로 더러움과 깨끗함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더러움과 깨끗함의 모든 법을 총섭할 수 있는 것이다. 생멸문(生滅門)은 더러움과 깨끗함을 별도로 드러낸 것[別顯]이다. 더러움과 깨끗함의 법은 포괄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또한 모든 법을 총섭하는 것이다. 통틀은 모습과 별도의 모습은 비록 다르지만 서로 배척하는 것이 없다. 이 때문에 두 문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질문의 종류가 많기에 하나하나 옮겨쓰면서 답해보겠습니다.
[질문] 원효의 일심이문이 궁금합니다.
[답변] 먼저 말씀드릴 것은, 일심(一心) 사상이나 일심이문(一心二門) 사상 모두 원효 스님의 사상이 아니라, <대승기신론>의 사상이라는 점입니다. 원효 스님은 그런 용어의 의미에 대해 설명한 분입니다. 원효 사상에 대해서는 원효 스님께서 주석하거나 저술하신 모든 문헌들을 연구한 후, 그 내용과 주석 방식과 주석 태도의 공통점을 추려서 다시 연구해 보아야 합니다. 흔히 원효 사상이 화쟁에 있다고 하지만, 지독한 논쟁의 책인 <판비량론>이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원효 사상의 특징이 화쟁인 것도 아닙니다. 원효 스님이 주석한 경전의 사상과 원효 사상을 구분한 후 원효 사상의 특징을 구명하는 일이 앞으로 원효 연구가들의 과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질문] 진여문은 불성이고, 생멸문은 일상적인 중생의 흔들리는 마음인데 이것이 모두 일심으로 포섭된다는 것 같기는 한데, 제가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답변] 마명 보살의 <대승기신론>에 대한 원효 스님의 주석서인 <대승기신론소>와 관련된 질문입니다. <대승기신론>은 여래장 사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논서인데, 대승불교사상의 두 축인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을 통합한 것이 여래장사상입니다. [동아시아적 관점에서는 삼론(三論)과 섭론(攝論)의 통합] 중관사상은 존재 세계에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역설하는 반야 공사상을 논증하고, 유식사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타나 보이는 모든 것은 각자 자기의 마음이 만든 허상이라는 점을 체계적으로 설명합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통찰이나 "모두 마음이 만들었다"는 통찰은 동전의 양면처럼 그 의미가 같습니다.
그런데 <대승기신론>에서는 반야중관의 통찰을 심진여문(心眞如門)이라고 부르고, 유식학의 조망을 심생멸문(心生滅門)이라고 부릅니다. 또 파도가 치는 강이나 바다로 비유하면 진여문은 물에 해당하고, 생멸문은 파도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질문에서 말씀하신대로 진여문을 '불성', 생멸문을 '중생의 흔들리는 마음'으로 이해해도 됩니다.
[질문] 왜 진여문, 생멸문처럼 문이라고 표현했는지도 궁금합니다.
[답변] <대승기신론>의 범어 원문이 있다면 정확한 답을 해 드릴 수 있겠지만, <대승기신론>의 경우 범어 원문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또 <대승기신론>은 동아시아에서 만들어진 위경(僞經)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입니다. 현대의 학자들뿐만 아니라, 기신론 출현 당시부터 그런 비판이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물론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너무나 잘 정리한 위대한 위경입니다.
'대문 門자'의 경우 영어의 door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방법, 과목, 부문 ...' 등 여러 가지 뜻이 있기에, <기신론> 출현 당시 한문 불전에서 사용하던 '門'자의 용례를 취합해 보면 학문적으로 가장 그럴 듯한 답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일심의 법에 의지하여 두 가지 문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심진여문이고 둘째는 심생멸문이다(依一心法,有二種門。云何為二?一者、心真如門,二者、心生滅門)"라는 <기신론>의 문장에 비추어 보면, '진여'에 대한 통찰과 '생멸'에 대한 통찰이 일심으로 들어가는 관문(關門)이기에 '門'자를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질문] 원효대사의 귀일심원요익중생(歸一心源饒益衆生) 이라는 표현에서 중생을 생명체로 보는 것이 맞는지 인간을 의미하는 것인지, 무생물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포함하는지도 궁금합니다.
[답변] 원효 스님의 저술 가운데 <금강삼매경론>과 <기신론소>에 '귀일심원'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보살영락본업경소>에 '요익중생'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양자를 종합하여 '귀일심원 요익중생'이라는 술어를 창안한 분은 이기영 교수님입니다. 이기영 교수님의 제자셨던 이민용 선생님은 불교평론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이기영 교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나는 불교의 이상을 두 가지로 표현하기를 즐겨왔다. 하나는 귀일심원(歸一心源)이요, 또 하나는 요익중생(饒益衆生)이다…… 일심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나의 삶의 목표요, 중생을 요익하는 것 또한 나의 삶의 목표인즉…… 하나는 보다 외면적이요, 동적(動的)인 일면을 드러낸다면 하나는 보다 내면적이요, 정적(靜的)인 일면을 드러낼 뿐이다. 이 두 가지는 분리해서 생각해도 안 되고 분리해서 신행해도 안 된다." (〈한국의 불교 어디로 가는가〉 《월간조선》 1981년 9월호)"
- 불교평론 50호, 이민용 선생님의 글 -
앞으로의 공부에 참고하시라고 먼저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불교에서 '중생'이라고 할 때는 인간뿐만 아니라 천신. 아수라, 아귀, 축생, 지옥중생 등 육도 윤회하는 모든 중생을 가리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존재 중에는 '인간과 짐승'이 중생입니다. 무생물도 포함되지 않고, 식물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현대생물학에서는 식물을 생명체로 보지만, 불전에서는 식물은 무정물로 중생에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윤회한다고 할 때 식물로 태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육도 윤회의 세계에 식물계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요컨대 우리 눈에 보이는 존재 가운데 인간과 짐승만 중생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중에는 천신, 아귀, 지옥중생이 중생입니다.
[질문] 아래 문장에 대한 해설이 궁금합니다.
① 진여문(眞如門)은 더러움[染]과 깨끗함[淨]을 통틀은 모습[通相]이다. 통틀은 모습 밖에 따로 더러움과 깨끗함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더러움과 깨끗함의 모든 법을 총섭할 수 있는 것이다.
② 생멸문(生滅門)은 더러움과 깨끗함을 별도로 드러낸 것[別顯]이다. 더러움과 깨끗함의 법은 포괄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또한 모든 법을 총섭하는 것이다.
③ 통틀은 모습과 별도의 모습은 비록 다르지만 서로 배척하는 것이 없다. 이 때문에 두 문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답변] 인용하신 번역문은 <대승기신론>에 대한 원효 스님의 주석인 <대승기신론소> 가운데 일부로, 아래의 원문 가운데 원번호를 붙인 연갈색 바탕의 문장입니다. (기신론 문장 가운데 기신론소에 인용된 부분을 붉은 글씨로 표시했습니다.)
마명의 <대승기신론>: 依一心法,有二種門。云何為二?一者、心真如門,二者、心生滅門。是二種門,皆各總攝一切法。此義云何?以是二門不相離故。
원효의 <대승기신론소>: 言是二種門 皆各總攝一切法者 釋上立中是心即攝一切世間出世間法 上直明心攝一切法 今此釋中顯其二門皆各總攝 言以是二門不相離故者 是釋二門各總攝義
欲明 ①真如門者 染淨通相 通相之外無別染淨 故得總攝染淨諸法 ②生滅門者 別顯染淨 染淨之法無所不該 故亦總攝一切諸法 ③通別雖殊 齊無所遣 故言二門不相離也
① 진여문(眞如門)은 더러움[染]과 깨끗함[淨]을 통틀은 모습[通相]이다. 통틀은 모습 밖에 따로 더러움 과 깨끗함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더러움과 깨끗함의 모든 법을 총섭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여문은 반야중관의 통찰, 공성의 통찰, 진여에 대한 통찰, 차별을 타파한 통찰을 의미하며, 공성에 대해 통찰할 경우 더러움이나 깨끗함의 차별,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반야심경>에서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고 노래하듯이 .... 더러움도 공하고, 깨끗함도 공합니다. 물과 파도의 비유에서, 그 어떤 파도라고 하더라도 물이라는 점에서는 모두 일치하듯이, 깨끗함이나 더러움 모두 그 본성은 공성입니다. 즉 진여입니다.
"진여문(眞如門)은 더러움[染]과 깨끗함[淨]을 통틀은 모습[通相]이다."라는 설명은 <반야심경>의 경문 가운데 "색불이공, 색즉시공"과 그 맥락이 같고, "통틀은 모습 밖에 따로 더러움과 깨끗함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설명은 "공불이색, 공즉시색"과 그 맥락이 같습니다. 즉, 이 모두 반야중관적인 조망이기에 심진여문인 것입니다.
② 생멸문(生滅門)은 더러움과 깨끗함을 별도로 드러낸 것[別顯]이다. 더러움과 깨끗함의 법은 포괄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또한 모든 법을 총섭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생멸문은 유식학(唯識學)적인 통찰입니다. <성유식론>의 5위 100법 교리에서 보듯이 유식학에서는 낱낱의 법들에 대해 차별적으로 설명합니다. 다만 그 모든 법들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만든 것으로 본다는 점에 유식학의 특징이 있습니다. 물과 파도의 비유에서 큰 파도, 작은 파도, 거친 파도, 부드러운 파도 등등 갖가지 파도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유식학입니다.
③ 통틀은 모습과 별도의 모습은 비록 다르지만 서로 배척하는 것이 없다. 이 때문에 두 문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통틀은 모습을 설명하는 반야중관에서는 공성을 말하고, 별도의 모습을 설명하는 유식학에서는 5위 100법의 온갖 법들을 말하지만, '반야중관의 공성'과 '유식학의 제법(諸法)'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즉합니다. 동일한 낱낱의 법들에 대해 그 본질인 공성을 철견할 수도 있고, 낱낱의 법들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전자가 반야중관에서 말하는 통틀은 모습이고, 후자가 유식학에서 말하는 별도의 모습입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파도와 물이 구별되지 않듯이 ...
따라서 반야중관의 무차별의 통찰을 의미하는 심진여문과 유식학의 차별적 통찰을 의미하는 심생멸문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같은 소재에 대한 상반된 방식의 통찰, 설명일 뿐입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
이상 설명을 마칩니다. (앞으로의 공부에 참고, 활용하시라고, <대승기신론 소 별기 회본 대조> PDF와 한글문서 모두 올립니다.)
유식학의 5위 100법을 정리한 표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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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쩡환맥 작성시간 20.11.20 저의 어리석은 질문에 언제나 너무나 정성스러운 답변을 달아 주셔서, 어떻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항상 아낌없이 깨달음을 나눠 주셔서 지식뿐만 아니라 진정한 학자의 태도에 대해 많이 배우고, 아울러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듭니다. 불교가 제게는 너무 어렵고 책이나 논문을 읽어도 속 시원하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렇게 불교 전반을 꿰뚫면서 그것을 나눠주는 분이 계신 것이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하다는 말로는 저의 진심이 전해지지 않겠지만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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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쩡환맥 작성시간 21.07.11 읽을 때마다 이해가 깊어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