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남방불교를 전공한 각묵스님께서 반야중관의 아공법유(我空法有) 비판을 반박하시는 글에 대해 교수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저는 북방 설일체유부와 남방 상좌부의 견해가 구분되어 있지 않고 반야중관사상을 지나치게 직관적, 악취공, 단멸론적인 사상으로 규정하는 점 때문에 그다지 설득력 있는 글 같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스님께서 호교론(護敎論)적인 입장에서 조금 무리한 해석을 하신 것이 아닌가 싶은데요.
혹 논쟁이 될만한 글을 기고하지 않으시는 교수님 원칙에 어긋나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심스럽게 교수님의 의견을 여쭤봅니다. (각묵스님 관련 글과 유튜브 영상은 링크로 첨부하겠습니다)
영상 : https://m.youtube.com/watch?v=lzA7GHoHth4&t=909s
(영상 중 관련된 부분인 15:09 부터 바로 시작됩니다)
글: http://m.blog.daum.net/2002daebak/396
답변입니다.
질문에서 보라고 인용하신 글이 너무 길고, 각묵 스님의 강의도 너무 길어서 자세히 읽지 않았고 자세히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학자의 견해를 제시하면서, 그에 대해 평가를 하라고 할 경우, 나중에 그 평가가 그 분에게 알려지면서 서로 불편한 관계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누가 저를 비판해도 반박하지 않고, 또 남의 논지에 대해서도 공격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학자에 대해서만 그렇습니다. 일본학자나 구미 학자 등 다른 나라 학자들의 경우, 제가 본 게시판에서 비판을 해도, 그분이 그것을 알아도 서로 불편해지거나 문제 되는 경우는 없기에 적극적으로 비판합니다. 또 일본불교학이나 서구불교학의 이론을 맹종하는 일부 우리나라 불교연구자들이 자긍심을 찾기 바라는 마음에서,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외국의 소위 '저명한' 불교학자들의 이론에서 잘못된 점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십수 년 전에 유럽에서 활동하는 연세 많은 한국출신 불교학자 한 분이 자신의 저술 파일을 보내오면서, 다짜고짜 교정을 보아 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온건하게 거절의 답신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무리한 부탁이기 때문입니다. 근 한달 가량 걸릴 일을 사전에 아무 상의도 없이 부탁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본 게시판에 올리시는 질문들의 경우도, 본인이 절실하게 고민한 문제를 올릴 경우, 제가 끝장을 볼 수 있게 긴 답을 달아 드립니다. 그러나 본인이 쓴 글이 아니라, 다른 학자분이 쓴 글을 제시한 후, 제가 그것을 읽어보고서 소견을 말하거나 답변을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리한 요청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각묵스님의 글이나, 강의에 대해서는 제가 전혀 평을 할 수 없겠습니다.
그런데 강의 영상을 얼핏 보니까(링크해 주신 글은 전혀 읽지 않았고, 영상의 경우 건너뛰면서 글만 대충 보았습니다.), 대승불교에서 소승불교에 대해서 아공법유라고 비판하는 점에 대해서 초기불전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반박하신 강의인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만 간단히 커멘트 하겠습니다. (물론 영상을 자세히 보지 않았기에, 제 답변이 빗나간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대승 소속의 논사라고 해서 모두 소승불교를 아공법유로 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관학 자립논증파 소속이라고 불리는(후대에 티벳에서 만들어진 학파 분류) 청변의 경우 소승은 아공법유 대승은 아공법공이라고 규정했지만, 중관학 귀류논증파 소속이라고 불리는 월칭의 경우 소승도 아공법공을 안다고 하면서 수레를 불에 태우는 비유를 듭니다. 수레를 태우면 바퀴와 손잡이 굴대가 함께 타듯이 아공을 알면 법공은 자연히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수레는 자아를 비유하고 바퀴, 손잡이, 굴대 등은 법을 비유합니다. 이어서 월칭은 소승과 대승의 차이점은 법공을 아는가, 모르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비심의 대소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소승 수행자의 경우 아라한을 지향하며, 아라한이 되고 나면 무아를 체득하기에 이기심이 사라지고 자비심이 넘치지만 그 생에 열반에 들기에 자비심을 발휘할 시간과 대상이 적은 반면, 대승의 경우 3아승기 100겁에 걸친 이타의 보살행을 통한 성불을 지향하기에 자비심의 크기가 소승에 비할 바 없이 크다고 설명합니다.
즉 소승과 대승의 차이점은 법공에 대한 앎 여부에 있는 게 아니라 자비심의 대소에 있다는 것이 월칭의 설명입니다. 티벳불교에서는 월칭의 이런 통찰을 수용합니다.
요컨대 소승은 아공법유, 대승은 아공법공이라고 구별하는 것은 동아시아에 현장이 수입한 청변 계통의 특수한 대승불교에서 하는 얘기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청변의 통찰이 버려야 할 잘못된 통찰이 아닙니다. 실제로 불교 신행을 하는 분들 가운데, 법을 뗏목과 같은 수단으로 보지 못하고, 법에 집착하여 법의 정체를 추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는 청변이 말하는 소승과 다름 없는 아공법유의 통찰일 뿐입니다. 이런 분들에 대해서 소승은 아공법유에 머물러 있지만, 소승을 넘어선 대승은 아공법공을 모두 안다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즉 소승과 대승을 구분하는 단계적 통찰 가운데 하위의 통찰로서 청변의 이론은 가치가 있겠습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