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질문을 올리셨는데 나누어 답하겠습니다.
첫 질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1.선악에 대한 토론을 하던중에 선도 악도 다 참나의 작용이고, 참나는 선도 악도 아닌 중도이고 공이다.
그러면 굳이 왜 선을 행해야 하며, 악도 참나의 작용인데 왜 하면 안되는가?
선만 행한다면 참나는 중도가 아니게 되는 꼴이 아닌가. 즉 어떤 있음의 상태가 아닌가?
깨달음에 이른후 중생 구제를 위한 보살행하는 이유도 선을 지향하는 것인데. 근원적인 문제에서 보면
공한데 선악이 공존하면서 선을 행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답변입니다.
질문에서 "선도 악도 다 참나의 작용이다", "참나는 선도 악도 아닌 중도이고 공이다" 등의 주장을 적으셨는데, 이런 주장은 우빠니샤드의 아뜨만론과 같은 것이라고 비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에 대해 가타부타 여러 가지 논의할 수 있겠지만, 그럴 경우 주제에서 벗어나기에 일단 이 문제는 덮어두고서 질문에 대해 답해보겠습니다. (참나를 얘기하는 게 옳은지 그른지 문제는 여기서 거론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초기불전이든, 대승불전이든, 선어록이든 불전을 읽다 보면 모순되는 가르침이 많이 눈에 띕니다. 질문에서 말씀하신 대로 "선도 악도 없다."라든가, "선과 악이 모두 공하다."라는 가르침이 있는가 하면, "악을 그치고 선을 행하라"는 가르침도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모두 실재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 있는가 하면, 과거칠불이나 미래의 미륵불 등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가르침도 있습니다. 무아의 가르침이 있는가 하면, 윤회의 가르침도 있습니다. 윤회를 벗어나 열반을 추구하라는 가르침도 있는가 하면, 윤회가 그대로 열반이라는 가르침도 있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선승 임제의 가르침도 있는가 하면, 보현행원에서 보듯이 부처님에 대한 지극한 공경과 보살행의 다짐도 있습니다. 고집멸도의 사성제가 불교의 핵심인데, <반야심경>에서는 고집멸도가 다 없다(무고집멸도)고 노래합니다.
용수의 <중론> 제24장 관사제품은 논적의 이런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논적은 "모든 것이 공하다면 사성제도 존재하지 않기에 불교가 파괴된다."라는 식으로 공사상을 공격하는 겁니다. 이에 대해서 중관논리적으로 답을 하기 전에, 용수 스님께서는 게송을 통해 먼저 다음과 같이 답을 하십니다.
8) 諸佛衣二諦 爲衆生說法 一以世俗諦 二第一義諦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이제(二諦)에 의거하여 중생을 위해 설법하신다. 첫째는 세속제(= 속제)로써, 둘째는 제일의제(= 진제)로써.
8) dve satye samupāśritya buddhānāṃ dharmadeśanā/
lokasaṃvṛtisatyaṃ ca satyaṃ ca paramārthataḥ//
부처님들의 교법은 이제에 의거한다. [그것은] 세간에서 행해지는 진리와 승의(勝義)로서의 진리이다.
9) 若人不能知 分別於二諦 則於深佛法 不知眞實義
만일 사람이 이제(二諦)를 분별함을 알 수 없다면 심오한 불법에서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한다.
9) ye ’nayorna vijānanti vibhāgaṃ satyayordvayoḥ/
te tattvaṃ na vijānanti gambhīraṃ buddhaśāsane//
이 두 가지 진리의 구별을 모르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는 심원(深遠)한 진실을 알지 못한다.
10) 若不依俗諦 不得第一義 不得第一義 則不得涅槃
만일 속제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제일의제(= 진제)를 얻을 수 없다. 제일의제(= 진제)를 얻지 못하면 열반을 얻을 수 없다.
10) vyavahāramanāśritya paramārtho na deśyate/
paramārthamanāgamya nirvānaṃ nādhigamyate//
[세간의] 언어 관습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최고의 의의는 가르쳐지지 않는다. 최고의 의의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열반은 증득되지 않는다.
(이상 <중론 개정본>, pp.434-435)
즉, 진제와 속제의 이제를 구별해야 부처님 가르침의 참 뜻을 알 수 있다는 답변입니다. (참고로 진제는 제일의제 또는 승의제라고 번역하기도 하며, 속제는 세속제 또는 언설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논적은 "모든 것이 공하다면 사성제가 존재하지 않는 꼴이 되어 불교가 파괴된다."는 식으로 공사상을 공격했는데, 이들 게송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은 진제의 가르침이고, "사성제에 대한 분별적 설명"은 속제의 가르침으로 범주가 다르기에 상충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진제와 속제의 이제의 틀로 조망해야 불교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질문에서 "선도 악도 다 참나의 작용이고, 참나는 선도 악도 아닌 중도이고 공이다. 그러면 굳이 왜 선을 행해야 하며, 악도 참나의 작용인데 왜 하면 안되는가?"라고 물으셨는데, "선도 악도 다 참나의 작용이고, 참나는 선도 악도 아닌 중도이고 공이다."라는 것은 진제의 가르침이고, "선을 행해야 하며 악을 행하지 말라."는 것은 속제의 가르침입니다. 즉 "선과 악이 모두 참나의 작용이다."라는 것은 진제의 가르침이고 "악을 그치고, 선을 행하라."는 것은 속제의 가르침입니다. 진제와 속제는 범주(카테고리)가 다른 가르침이기에, 이 두 가르침을 같은 차원에 놓고서 상충한다고 보는 것은 논리학적으로 볼 때 범주의 오류(Category mistake)를 범하는 꼴이 됩니다. (용수의 <대지도론>에서 이제설을 통해 교리의 상충을 해소하는 설명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제가 제시했던 상충하는 가르침을, 진제와 속제의 이제(二諦)에 의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외견상 상충하는 듯이 보이는 가르침은 범주가 다른 가르침입니다. 부정과 파격과 타파의 가르침은 진제(참된 진리)이고, 분별적 가르침은 속제(세속적 진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부정과 파격과 타파의 가르침이 진제"라고 쓰긴 했지만, 이런 진제의 가르침을 다시 분별적으로 이해하고 집착하면 "부정과 타파의 가르침" 역시 속제로 격하됩니다. 즉, 진정한 진제는 "부정하고 타파하는 작용"입니다. "부정하는 표현, 타파하는 표현"이 진제인 것은 아닙니다. 선승의 "할(喝)", "방(棒)" 역시 진정한 진제를 교화대상에게 전하기 위한 '작용으로서의 진제'입니다. 진제와 속제에 대한 이런 통찰을 동아시아의 중관학인 삼론학에서는 삼중이제설 또는 사중이제설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가르침의 제1단계에서는 '유(有, 분별적 가르침을 대신하는 용어)'가 속제이고, '무(無, 분별을 타파하는 가르침을 대신하는 용어)'가 진제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뜨만과 같이 영원히 변치 않는 자아가 있다(有我)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자아는 없다(無我)는 가르침이 참된 진리(진제)로서 제시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제시된 무아의 가르침에 대해 다시 분별을 내어 집착을 하는 사람에게는 무아의 가르침 역시 속제로 격하시키며 유아도 아니고 무아도 아니라는 제2의 진제가 제시됩니다. 위의 표에서 보는 제2중 이제설입니다. 다시 세월이 흘러서 "유아도 아니고 무아도 아니다."라는 것을 고정관념화 하여 참된 진리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면, 다시 이를 부정하면서 제3중 이제설이 제시됩니다. 위의 표에서 제3중 이제 가운데 진제인 "비이 비불이"는 "둘도 아니고 둘이 아닌 것도 아니다."라는 의미인데, 풀어서 말하면 "유와 무의 둘(二)도 틀렸고, 유와 무가 모두 아니라는 비유비무(= 不二)도 틀렸다(非)는 뜻입니다. (여기서 3중이제설을 소개했지만, 제3중 이제의 진제인 '비이 비불이'에 집착하면 이를 다시 속제로 격하시켜면서 언망려절[言忘慮絶, 언어를 잊고 생각이 끊어짐])이 제4단계 진제로서 제시됩니다. 물론, 5단계, 6단계로 변증법적으로 계속 상승할 수 있지만, 이 정도 얘기하면 진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기에 삼론학의 이제설은 4중이제설에서 그칩니다.)
진속 이제만 말씀드리면 이제에 대해 오해하실까봐 삼론학의 삼중이제설까지 장황하게 설명하게 되었는데
질문에 대한 답변의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입니다.
1, 불교 가르침 가운데 상충하는 가르침은 진제와 속제의 이제의 틀로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타파의 가르침은 진제이고 분별적 가르침은 속제라고 이해할 경우 상충이 해소된다. (제 책 가운데 <공과 윤리 - 반야중관에 대한 오해와 이해>(도서출판 오타쿠)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바 있습니다.)
2. 진제와 속제의 이제 가운데 진제는 '작용'으로서 체득되는 것으로 내용이 있는 게 아니다. 동아시아 삼론학의 삼중이제설에서 보듯이 진제를 다시 사상이나 이론으로 분별하고 집착하면, 그런 사상, 이론을 속제로 격하시키는 새로운 진제가 제시된다. (제 책 가운데 <선불교의 뿌리 - 인도 중관학과 동아시아 삼론학>에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실려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2. 불성(공)은 유와 무가 공존하면서도 떠난 어떤 상태이고 부분 이면서 전체이기도 한다면 , 삼라만상이 불성의 작용으로 형성되었다면 현실의 나도 있기도 하고 또 없기도 하는 상태가 공존해야 하는데, 이게 현실적으로 인식이 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개체가 있음과 없음이 공존한다는 개념이 실제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경험적으로 이해가 가능 할까요? 아니면 이론적으로만 추상적으로 개념화된 관념에 불과한 것일까요?
답변입니다.
"불성(공)은 유와 무가 공존하면서도 떠난 어떤 상태이고 부분 이면서 전체이기도 하다"라거나 "삼라만상이 불성의 작용으로 형성되었다."라고 쓰셨는데, 어느 경전에 그런 가르침이 있는지요? 아니면 어떤 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요? (여기서 그 분을 거론하시라는 것은 아닙니다.) 불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없으며, 불성에 대해서는 불전에 근거하여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불성에 대해 가장 많이 거론하는 경전이 <대반열반경>인데 동아시아에 <대반열반경>이 번역, 소개된 후 불성의 정체에 대해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아뢰야식이 불성이다, 진여가 불성이다, 진신(眞神)이 불성이다, 누구에게나 내재한 성불의 가능성이 불성이다(當果불성론), 중생심이 불성이다. ..... 등등 10가지 이상의 불성론이 혼재하다가, 고구려 출신의 승랑 스님의 중도 불성론이 천하통일을 합니다. 즉 불성은 중도입니다. 그런데 중도는 '이분법에서 벗어남'을 의미합니다. 사상적으로는 흑백논리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마음이고, 감성적으로는 나와 남을 다르게 보는 자타 이분법에서 벗어난 동체대비의 마음이고, 사회적으로는 강자와 약자의 차별의 이분법, 극심한 빈부차이의 이분법을 타파하고자 하는 정의(Justice)의 마음입니다. 즉, 불성은 "유와 무가 공존하면서도 떠난 어떤 상태이고 부분 이면서 전체"가 아니라 사상적, 감성적, 사회적 이분법에서 벗어난 중도의 마음입니다. 일단 불성의 의미에 대해 교학적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현실의 나도 있기도 하고 또 없기도 하는 상태가 공존해야 하는데, 이게 현실적으로 인식이 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라고 쓰셨는데, 아마 "현실의 나도 있기도 하고 또 없기도 하는 상태가 공존"하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불성에 대한 자각이고 그것이 불교의 깨달음이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이렇게 질문을 올리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불교신행을 하면서 명심해야 할 것은 "깨달음은 어떤 체험이 아니다."라는 점입니다. 깨달음은 '탐욕, 분노, 교만, 우치와 같은 번뇌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지 체험이 아닙니다. 탐욕(음욕, 식욕 등)이나 분노와 같은 동물적 감성으로 인해 삶의 고통이 발생하고, 우치로 인해서 종교적 철학적 번민 속에서 살아가는데, 수행을 통해서 동물적 감성을 제거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연기(緣起)를 이해하여 공성(空性)을 자각하면 종교적, 철학적 번민이 사라집니다.
질문에서 "현실의 나도 있기도 하고 또 없기도 하는 상태가 공존해야 하는데, 이게 현실적으로 인식이 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개체가 있음과 없음이 공존한다는 개념이 실제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경험적으로 이해가 가능 할까요? 아니면 이론적으로만 추상적으로 개념화된 관념에 불과한 것일까요?"라고 쓰셨는데, 어느 경전에서도 "현실의 나도 있기도 하고 또 없기도 하는 상태가 공존한다."든지 "어떤 개체가 있음과 없음이 공존한다는 개념이 실제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경험적으로 이해된다."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기에, 불교 수행을 하는 분이라면 그렇게 이해하려고 노력하실 필요가 없겠습니다. 이런 질문들은 토끼뿔이나 거북이 털이 있다고 생각하고서, 그것이 왜 나에게 보이지 않는지 궁금해 하는 것과 같은 '잘못된 질문'입니다.
'無向'님께서, 교리의 상충 문제를 질문하셨는데, 이는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할 수 있는 문제이기에 질문에 감사드립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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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無向 작성시간 22.08.15 교수님의 명쾌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무주당 청화큰스님 법문을 보면 불성은 우주의 모든 삼라만상의 생명의 에너지다라고 정의 하신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영성관련 서적이나 법문에서도 많이 언급되다보니 저도 그런 견해를 가지게 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불교의 우주론(현대 물리학자들이 어떻게 무에서 유가 생겼냐에 대해 고민하는데)은 어떤것인지도 시간이 된다면 교수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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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관리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2.08.15 불교의 우주론 관련하여 물리학에서 빅뱅 이론을 얘기하지만, 저는 빅뱅 이론이 허구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 본 카페 <불교문답게시판>에 상세한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s://cafe.daum.net/buddhology/TjB9/255
이곳의 답글 가운데, "2. 아무것도 없는 것이 본질이라면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어떻게 이 세상이 출현하게 되었을까요?"에서 제가 빅뱅을 허구라고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합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답댓글 작성자無向 작성시간 22.08.16 교수님 께서는 우주가 성주괴공을 무한히 되풀이 하신다고 했는데, 그래도 본질적으로 우주가 최초로 성립되는 시기인 성(成)을 보자면 그 성은 어디서 시작했냐가 문제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무에서 시작하지 않았다면 유에서 시작했을 것인데, 그러면 계속 소급해들어갈 수 밖에 구조인지라.....참 어려운 주제인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