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6.5.11 옥스퍼드에서 C.S. 루이스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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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 5월 11일 화요일. 일주일 전부터 시작된 총파업이 영국을 뒤덮고 있었다. 이날 오후 4시. 옥스퍼드의 머튼 칼리지에서는 ‘영문과 교수 다과회’가 있었다. 1926년 옥스퍼드의 영문과에는 교수직이 세 개 뿐이었고, 그 중 하나는 한 해 전부터 톨킨이 맡고 있었다. 이들은 영문과의 방향과 새로운 커리큘럼에 관한 토의를 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 |
| 당시 옥스퍼드 영문과는 분리된지 얼마 되지 않는 학과였다. 톨킨의 눈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 헐렁한 옷차림의 건장한 남자는 모들린 칼리지 영어영문학과의 특별연구원(펠로우)으로 최근에 선임된 인물이었다. 당시 교수직은 개인지도교수(don)와 특별연구원(fellow)으로 나뉘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스물일곱 살 난 젊은 친구는 ‘잭’이라고 불렸으며, 그의 이름은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였다. | |
톨킨은 루이스의 재치 있는 사고와 관대한 영혼에 감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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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킨과 루이스의 '잉클리즈'교분을 다룬 책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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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첫 만남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감돈다. 톨킨은 루이스의 전공이 중세 영문학이라고 할지라도 ‘문학’ 진영에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잠재적인 적이라고 생각했다. 루이스는 일기장을 통해 톨킨을 “부드럽고 창백한 얼굴에 거침없는 언변을 구사하는 조그만 사내”라고 기록하면서 “악의는 없어 보인다. 어쨌든 한 주먹거리에 지나지 않으니까”하고 덧붙였다.
두 사람은 곧 서로에 대한 깊은 우정을 쌓아가기 시작한다. 루이스는 대화와 웃음과 맥주를 좋아하는 톨킨에게 단단한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반면 톨킨은 루이스의 재치 있는 사고와 항상 입는 볼품없이 넓은 플란넬 바지만큼이나 관대한 영혼에 감화되었다. 첫 만남이 있은 후 일 년 뒤인 1927년 5월에 톨킨은 아이슬란드 전설을 읽는 모임인 ‘콜비타르’에 가입시켰고, 이후 두 사람은 문학작품을 읽고 낭독하는 모임인 ‘잉클리즈’로 이어지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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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임은 콜비타르가 아이슬란드의 영웅담과 <구 에다(Edda)> 읽기를 마치고 해산되었을 때 시작되었다. 원래 ‘잉클리즈’는 1931년 탕계 린이라는 학생이 만든 문학 동호회에서 출발했다. 루이스와 톨킨 모두 이 모임에 참석했으며, 린이 옥스퍼드를 떠난 후 루이스를 중심으로 한 친목 모임으로 변화를 하기 시작했다. 모임은 전혀 격식을 차리지 않았다. 빠지지 않고 참석할 필요도 없었고, 불참을 미리 통보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요소가 있었다. 전쟁 중이라 맥주가 귀하고, 뜨내기 군인들로 붐비고 있었지만 회원들은 대개 화요일에 ‘독수리와 아이’라는 술집에서 모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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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밤에는 모들린 칼리지 안에 있는 루이스의 크고 넓은 방에서 9시가 지나서 모였다. 차를 끓이고 담뱃불을 붙인 후 루이스가 우렁찬 목소리로 입을 연다. “자, 누구 읽어주실 분?” 그러면 누군가가 자기가 가져온 원고를 큰 소리로 낭독하기 시작한다. 낭독하는 작품은 시가 될 수도, 이야기나 그 일부분이 될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문학에 대한 열정적인 대화와 작가로서의 역량을 펼치는 데 필수적이었다. 루이스의 자서전인 <예기치 못한 기쁨>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표현이 등장한다.
“처음 세상에 나갔을 때 나는 절대 카톨릭 신자를 믿지 말라는 주의를 들었다. 처음으로 영문학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절대로 문헌학자를 믿지 말라는 주의를 받았다. 그런데 톨킨은 카톨릭 신자이며, 문헌학자였다.” 1933년 10월, 톨킨은 다음과 같은 글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루이스가 내게 보여주는 우정은 많은 것을 보상해 준다. 게다가 정직하고, 용감하고, 이지적인 사람과 만나는 일이 가져다주는 끊임없는 기쁨과 위안은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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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킨과 루이스가 참여한 독서 모임 '잉클리즈'가 모였던 펍 '독수리와 아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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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후반 잉클리즈는 톨킨의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낭송 원고 중에는 톨킨의 대표작 중 하나인 <호빗>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작품은 1937년 9월 21일에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소설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자 출판사는 후속작을 요청하게 된다. 1940년대에 톨킨은 <반지의 제왕>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오랜 시간을 거쳐 3권으로 이루어진 <반지의 제왕>은 1954년과 1955년에 걸쳐 출간되었다. | |
<반지의 제왕> 참혹한 전쟁 묘사의 밑거름이 되었던 1차 세계대전 참전

| 어린 시절 톨킨의 삶은 그다지 윤택했다고는 할 수가 없다. 그는 대영제국의 일원이었던 남아프리카의 블룸폰테인에서 1892년에 태어났다. 톨킨이 태어난 지 3년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남은 가족은 버밍엄 외곽에 있는 오두막으로 이주를 했다. 하지만 어머니 역시 톨킨이 열 두 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카톨릭 신부에 의해 키워졌다. 버밍엄에서 학교를 다니던 톨킨은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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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톨킨은 전쟁에 직접 참여하였다. 1914년에 사관학교 후보생이 되었고, 1915년에 정식 군인이 되었다. 1916년에는 11랭커셔 퓨질리어 연대보병대의 하급장교로 솜 전투에 참전했다. 이 전투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적군의 포화를 뚫고 전진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첫날에만 약 6만 명의 영국군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반지의 제왕>이 등장하는 전쟁에 대한 참혹한 묘사와 어두운 색채가 이 시절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반지의 제왕>이 쓰여진 기간 가운데에는 제 2차 세계대전(1939~1945)이 일어났다. 이 기간에 참전한 것은 톨킨이 아니라 그의 아들 크리스토퍼 톨킨이었고, 부자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반지의 제왕>에 대한 견해를 나누었다.
크리스토퍼를 포함한 세 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낳은 이는 열여섯 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이디스 브랫이라는 여성이었다. 두 사람이 결혼한 것은 1916년 3월 22일로 솜 전투에 참가하기 약 3개월 전이었다. 그녀 역시 고아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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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참전 시절 장교 복장을 한 돌킨(19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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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이 끝난 후 돌아온 톨킨은 옥스퍼드에서 <영어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고, 1920년에 리즈 대학에서 영문학과 중세문학을 가르쳤다. 1924년에는 리즈 대학의 교수가 된다. 다음 해인 1925년에는 옥스퍼드 대학의 앵글로색슨어 교수로 선출된다. 톨킨은 교수직을 그만둘 때까지 옥스퍼드 대학에서 머물렀으며 1959년 정년퇴임을 한 후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옥스퍼드에서 보냈다. 1968년에 옥스퍼드를 떠나 본머스에 인접한 해변 마을로 이주를 한다. 하지만 그의 아내 이디스 톨킨이 1971년 11월에 사망을 한 이후에 다시 옥스퍼드로 이사를 한다. 톨킨은 1973년 9월 2일에 사망한다.
톨킨의 전공은 문헌학(Philology)이었다. 그는 영국과 북유럽에서 사용되던 언어들의 역사적 변천과 이러한 언어로 쓰여진 문학 작품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고대 영어로 쓰여진 <베오울프>와 중세영어로 쓰여진 초서 시대의 영어를 자주 강의하였다. 북유럽의 언어 중에는 핀란드어와 핀란드 민족의 대서사시인 <칼레발라(Kalevala)>가 톨킨에게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톨킨이 노력한 것은 핀란드어, 웨일즈어, 앵글로색슨어에 유사한 언어를 새롭게 창조해 내는 것이었고, 이러한 언어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종족들의 신화적 세계에 관심을 기울였다. <반지의 제왕>을 통해 창조해 낸 중간계(middle-earth)가 대표적이다. 엘프, 난쟁이, 오르크, 마법사, 용, 엔트, 호빗 그리고 인간 등이 거주하는 중간계는 단순한 판타지의 영역이 아니라 세밀한 묘사를 통해 실재하는 것처럼 꼼꼼하고 치밀한 태도로 묘사해 나가고 있다. | |
톨킨은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 공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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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전기들은 톨킨과 루이스와 1940년 이후부터 아주 천천히 차가워졌다고 지적한다. 겉으로는 크게 변함이 없었다. 두 사람은 잉클리즈의 정기 모임에 참석했으며, ‘독수리와 아이들’과 ‘백마’에서 맥주를 마셔가면서 토론을 했다. 1949년에 루이스는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을 잉클리즈의 회원들에게 처음으로 발표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정작 톨킨은 특별한 인상을 받지 못했다. 훗날 톨킨은 <나니아 연대기>와 관련된 루이스의 작품이 자신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루이스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의 원고를 1949년 가을에 보았고, 자신의 느낌을 적은 편지를 그에게 보냈다.
“친애하는 통행요금 징수원씨. 정말 훌륭하네. 내 오랜 갈증을 풀어주기에 충분한 물이었어. 작품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늘어나는 웅장함과 두려움은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스토리 아트에서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었네. 나는 <반지의 제왕>이 두 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어 뛰어나다고 생각하네. 하나는 끝없는 풍부한 자원에 바탕을 둔 것 같은 완전한 제 2의 창조의 건설이고, 다른 하나는 진지함이네.……축하하네. 자네가 <반지의 제왕>에 쏟아 부은 그 오랜 세월은 결코 헛된 세월이 아니었네.” | |

돌킨이 디자인한 <반지의 제왕>첫번째 에디션 커버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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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의 첫 번째 권은 1954년 여름에 출간되었다. 남은 두 권도 짧은 간격을 두고 차례로 출간될 예정이었다. 책 주문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홍보를 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추천사를 써 줄 세 명의 작가를 선정했다. 한 명의 <호빗>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나오미 미치슨과 일찍이 첫 책을 극찬한 리처드 휴즈 그리고 C.S. 루이스였다. 루이스는 이 작품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시인인 아리오스토(Ludovico Ariosto)와 쌍벽을 이룬다고 하였다. 이 표현을 듣고 톨킨은 “나는 아리오스토가 누군지 모르지만 자네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내가 좋아할만한 사람은 아니겠군”이라며 농담을 했다. 첫째 권의 발간 날이 다가왔다. 톨킨이 책을 쓰기 시작한지 16년만의 일이었다. 톨킨은 친구인 로버트 머레이 신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출판이 두렵소. 어떻게 썼는지 기억도 안나. 마음을 열고 비판을 들을 준비를 하고 있소.” 책이 출간된 후 톨킨의 명성은 높아지기 시작했다.
1959년에 톨킨은 교수직에서 퇴임 하였고 1965년에는 미국의 에이스 북스에서 해적판을 발간하면서 소위 미국 사회에서 <반지의 제왕> 캠퍼스 숭배 현상이 일어났다. 톨킨은 서둘러 개정 부분이 삽입된 세 권짜리 ‘정식’ 페이퍼백을 미국에서 출간하였고, 톨킨 학회를 비롯한 그의 관심을 높이는 데 일조를 하게 되었다. 그의 숭배 현상은 1968년 초 BBC에서 <옥스퍼드의 톨킨>이라는 다큐를 제작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톨킨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한 독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로 답했다. “살아 있을 때 숭배받는 인물이 되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닌 듯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사람을 거만하게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경우에는 어찌되었건 저를 극히 위축되고 서툴게 만들었으니까요. 그러나 아무리 겸손한 우상이라 해도 추종의 달콤한 향기에 조금이나마 만족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이겠지요.” | |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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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프리 카펜터가 쓴 <톨킨 전기>(해나무, 2004)는 J.R.R. 톨킨 저작권협회가 공식 인증한 톨킨 전기이다. 권위있는 톨킨의 전기로 평가받는 <톨킨 전기>는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의 꼼꼼한 증언과 기록의 인용이 신뢰를 준다. 카펜터는 ‘J.R.R. 톨킨의 편지’를 편집한 적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도 번역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크다. 톨킨과 루이스의 관계와 상호 비교적인 관점에서 책을 고르라고 하면, 콜린 듀리에즈가 지은 <루이스와 톨킨>(홍성사, 2005)이 도움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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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듀리에즈는 루이스에 조금은 더 비중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그것은 루이스의 저작과 기록이 더 많은 탓이기도 하다) 두 사람을 상호 비교해 가며 흥미로운 전기 서술을 보여주고 있다.
아들 크리스토퍼에게 사후 편집을 맡긴 <실마릴리온>(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2004)은 톨킨이 54년간 써내려간 역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빗>과 <반지의 제왕>보다 재미는 훨씬 떨어지지만 중간계에 대한 설명들이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이해될 수가 있다. 톨킨의 집요함과 본질적인 요소를 알려주는 작품이다. | |
<오늘의 세계인물> 관련글 이어보기ㅣ1957년 3월 21일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 C.S 루이스 병상 결혼식을 올리다
- 글 이상용 / 영화평론가
- 글쓴이 이상용은 영화평론가로 활동 중이며,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이다. 여러 신문과 매체에 영화와 문화에 관한 글을 써 왔으며, 지은 책으로는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이 있다. 이외에도 여러 권의 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