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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無我: anatt): 진아(참나)는 없다.

작성자목탁|작성시간21.05.29|조회수207 목록 댓글 1

무아(無我: anatt)

향상일로추천 1조회 14220.10.11 22:57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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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無我: anatt): 진아(참나)는 없다.




  나무 한 그루를 관찰 해 보자. 어린 새싹이 시간이 지나면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단풍이 들어 녹색 잎은 붉은 색을 띨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무의 모양, 조직, 색깔, 그 밖의 다른 성질들이 변화를 겪게 된다. 이처럼 씨앗에서 시작한 한 그루 나무는 새싹이 변하여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단풍이 드는 과정을 겪는다. 붉은 색의 잎과 녹색의 싱싱한 잎 사이에는 동일성을 밝혀 줄 요소가 없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동일한 잎으로 본다.


  새싹이라 불리던 그 대상은 이미 변해버렸고, 지금 우리는 그 대상을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변화 과정뿐이다. 이런 사정은 우주의 모든 현상에 적용되며 사람이란 존재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사람도 계속 변한다. 이와 같이 변화과정은 분명히 있다. 그런데 그 변화를 담당하는 ‘당체’는 없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anatt?)’의 개념이다.


  진짜 ‘나(我)’라면 변화가 없어야 하고, 항상 하기에 즐거움이여야만 한다. 그러나 잘 관찰해보니 그렇지 않더란 얘기다. 모든 게 다 변화한다. 내 몸도 변하고, 내 마음도 항상 변해가고, 주변 사람과 주변 사물들 그 모든 게 다 변화해간다. 중생은 특히나 내 몸을 ‘나’로 여기는데, 내 몸도 변화한다. 즉, 늙어간다. 내 몸이 진짜 ‘나’라면 내 뜻대로 돼야 하고 늙고 싶지 않으면 늙지 말아야 한다. 내가 내 몸의 주인이라면 내 몸이 내 뜻대로 움직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생각 또한 내 뜻대로 안 된다. 인간이 자신으로 여기는 게 바로 마음속의 생각인데 이 생각조차 언제나 변화해간다. 다만 이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그 생각을 영원한 ‘나’로 여기는데, 이게 멍청한 짓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걸 ‘나’로 여기는 것이니까.


무아란 덮어놓고 ‘나’라는 게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아(無我)에서 ‘아(我)’라는 것은 영원성을 의미한다. 무아(無我)의 뜻은 ’나‘라는 게 없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고 ‘나‘라고 여기는 몸과 마음에 내재된 영원함을 유지한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은 변화해갈 수밖에 없다. 변화한다는 것은 곧 그 안에 어떤 영원성이 내재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많은 이들이 무아(無我)를 한자 무(無)에 얽매여서 그냥 단순하게 "나라는 존재는 없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내가 없다. 그럼 이 글을 쓰는 ‘나’는 누군 인가?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누구인가.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 변하지 않고 고정된 것은 없다. 그러나 찰나적으로 생사를 거듭하는 끊임없는 생명의 흐름(연기에 의한 오온의 집합체)은 있다. 이 게 글을 쓰는 나요, 이 글을 읽는 너다. 따라서 무아를 ‘내가 없다’고 해석하면 안 된다.


불교 교의의 두 기둥이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인데, 무상(無常)과 윤회(輪廻)의 개념은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나 자이나교에서 이미 다루고 있었다. 그러나 무아만은 석가모니불이 성도한 후 최초로 설파한 가르침이다. 빠알리어 atta는 ‘참나’이다. 따라서 anatta(무아)란 참나가 아니란 말이다. 무아는 참나(진아)도 없다는 말이다.




인생길이 여유로운 사람은 생각도 여유롭다. 말투도 부드럽다. 깨달은 사람, 수양된 사람, 스스로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은 온유하다. 그런데 자신이 도(道)를 닦아 세상이치를 다 깨달은 듯 건방진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말씨부터 삐딱하다. 자신이 최고이니 당연히 존댓말을 잘 안 쓴다. 반말 잘 하는 스님일수록 빈 깡통이다. 깨달음도 없으면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식의 허황된 문구만 일삼는다. 이런 사람들을 불교에서는 '증상만(增上慢)'이라 한다.


<금강경>에서는 특히 아상을 경계하라는 말을 강조한다. 모든 깨달음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삼가 경계하도록 경책하고 있다. 우주의 이치를 깨달으려면 먼저 자기 스스로를 잘 알아야한다. 본시 깨달음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생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니라(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則非菩薩).」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아와 무상을 깨달은 사람은 늘 새로운 날을 살 수 있다. 이 몸과 우주법계는 순간 순간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상계는 연기현상(緣起現像)이라는 것이다. 주체도 연기현상이고, 객체도 연기현상이고, ‘주체와 객체 사이에 벌어지는 일’도 ‘객체와 객체 사이에 벌어지는 일’도 모두 다 연기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는 무아(無我)이자 공(空)이고 무상(無我)이다. 즉, 연기, 무아, 공, 무상 이 넷은 같다. 연기·무아·공·무상·시사무차별(緣起無我空無常 是四無差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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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엣지있게 | 작성시간 21.05.29 생활속불교에서 삶의 지혜를 배웁니다 나무관세음보살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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