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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윳따니까야는 중도적인 교설로 거센 바다를 건너 가야한다는 가르침으로 시작하지만 그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는 윤회하는 세계로서의 자신에 대한 철저한 실존적인 자각이 앞서야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삶에는 기쁨도 있고 쾌락도 있고 볼거리도 느낄 것도 많지만 인도에서 종교는 다르지만 제2의 부처님이라고 칭송되는 카비르가 노래하듯 삶을 살면서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다니지만 아픔이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삼십 명의 경[Timsamatt asutta]에서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 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라고 설법한다.
생사의 윤회는 억겁의 세월을 걸쳐 진행되므로 우리는 그 시작도 그 끝도 그 깊이도 그 넓이를 알 수가 없다. 다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자신의 윤회에 대해서 짐작을 할 뿐이다. 그러나 그 윤회의 실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참혹한 것이고 충격적인 것이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서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와 사대양에 있는 물 가운데 어느 쪽이 더욱 많겠는가?” 그러자 제자들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설하신 가르침으로 미루어 보건대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한다.
역사적인 부처님의 제자들은 그 제자들답게 은폐된 참혹한 윤회의 실상에 관하여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훌륭하다. 수행승들이여, 훌륭하다. 그대들은 내가 설한 가르침을 제대로 잘 알고 있다.”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그 대답은 부처님에게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더욱 충격적인 발언으로 제자들의 심금을 울린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소로 태어나 소가 되어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물소로 태어나 물소가 되어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양으로 태어나 양이 되어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돼지로 태어나 돼지가 되어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도둑으로 살면서 길섶에서 약탈하다 사로잡혀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도둑으로 살면서 부녀자를 약탈하다가 사로잡혀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시사하는 바는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인간의 최소한 인간다운 윤리적인 삶이 형성되기까지 엄청나게 장구한 세월의 시행착오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부끄러움이나 창피함과 같은 세계를 지탱하는 도덕적인 양심은 장구한 세월의 윤회의 아픔과 바다보다 많은 피를 흘린 댓가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이며, 그렇다면 우리가 누리는 엄청난 재화나 이 현세의 세계보다도 훨씬 소중한 것이 도덕성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둘째, 누구도 이 장구한 윤회의 세계에서 저질러지는 온갖 죄악에서 원천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어떠한 사람이 도덕적이라고 하는 사실은 과거의 수많은 세월 잘못을 저지르고 피를 흘린 댓가로 성취한 조그마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겸손해야하고 죄악을 저지른 사람에 대하여 자비로워야 한다. 셋째,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핏빛 바다를 항해하는 것 같은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사실을 자각해야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경전의 마지막에서 이와 같이 가르침을 전한다.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 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그대들은 괴로움을 맛보고 아픔을 맛보고 절망을 맛보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전재성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대표 860호 [2006년 07월 11일 14: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