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운명이나 숙명 대신에 스스로의 삶을 내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다는 인과(因果), 업보(業報)론에 기초하고 있다. 누구나 물론 전생의 업인(業因)에 따라 자기만의 삶의 모습을 갖고 태어난다.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하고 살 것인지, 어느 정도의 학벌과 능력과 외모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얼마 정도의 행복을 누리다가 언제쯤 죽게 될 것인지에 대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정도 정해진 업력(業力)을 받고 태어난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어떤 배우자를 만날 것인지, 어느 정도의 대학이나 학벌을 가지게 될 것인지, 어떤 회사에 취직하여 어느 정도까지 진급을 하게 될 것인지, 어떤 인연을 만나서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받게 될 것인지, 언제 어떤 병이나 사고로 얼마만큼 고통을 겪게 될 것인지, 돈과 재산은 어느 정도를 벌어 쓸 수 있을 것인지, 그렇게 살다가 언제쯤 몇 살 쯤 죽어갈 것인지, 그런 것들에 대한 삶의 윤곽이 전생의 업식(業識)에 의해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 전생의 업을 그대로 받을 것이니 이번 생은 내가 아무리 발버둥치더라도 절대 그 업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것도 인생 일대의 가장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말로 행동으로 생각으로 행하는 행위이다. 전생, 또 오랜 전생을 이어오며 지어왔던 온갖 행위들이 지금 내 안에서 기본적으로 이번 생을 어떻게 펼쳐나가게 될지에 대해 결정짓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정의 원인은 내 과거의 행위에 있다. 내 과거의 온갖 행위들에 의해 내 현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결론은 무엇인가. 결론은 내 현재의 행위에 따라 또 다시 내 미래가 바뀔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다.
자신의 행위에 따라, 자신의 마음에 따라, 자신의 욕심과 집착의 크기에 따라, 자신의 마음공부와 수행과 기도의 정도에 따라, 내 삶은 언제든지 180도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
달라질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 삶은 그 괘도를 수정해 나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일 있을, 내년에 있을 내 삶의 괘도가 내 행위에 따라 끊임없이 수정되어지고 있다.
그것을 운명이나 숙명이라고 이름 짓지 않고 업(業)이라고 이름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운명이나 숙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인데 반해 업이라는 것은 언제고 바꿀 수 있으며, 바꿀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순간순간 변화하는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