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강변의 斷想(15) 인생의 의미 강변을 걷다 보니 강변 백조,

작성자연꽃|작성시간26.06.22|조회수23 목록 댓글 4

강변의 斷想(15) 인생의 의미

강변을 걷다 보니 강변 백조, 왜가리 가마우지 등

많은 새가 놀고 있고, 버들은 강변에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무심히 보다 보니 저것과 우리네 人生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인생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면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런데 人生이란 글자를 보니 참 묘하다.

<人> 자를 보니 좌변과 우변이 합쳐져 있다.

한 변은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삐 처져 있고,

한 변은 왼쪽 중간에서 아래로 삐쳐져 있다.

이렇게 두 변이 화합하여 <人>가 된다. 이것이 사람이라는 뜻이다.

홀로 만들어진 것은 없다는 의미다.

인연이 모이면 生이 되고, 흩어지면 死가 되는 것이다.

無常하다는 의미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생로병사가 모두 인연의 화합과 흩어짐이란 것이다.

여기에서 잠시 無常의 의미를 짚고 가자.

무상하기 때문에 외로움과 고독감을 느꼈다면

연기의 實相을 보지 못하고 연기만 보았기 때문이다.

실상(實相)의 문제는 나의 이성(理性)의 대상이 되고,

현상계의 연기(緣起)에서 느끼는 문제는

나의 감성(感性)의 대상이 됨을 간과한 것이다.

 

연기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인간은 남자와 여자의 화합으로 生이 있고,

生이 있기 때문에 死가 있는 것이다.

인간이 陰과 陽의 인연 화합으로 태어나듯이

모든 동물도 다 그렇다. 암컷과 수컷이 있는 것도

식물 또한 암수가 있는 것도 다 그렇다.

그런데 그 인연의 시작을 생각해 보니 시작을 알 수 없다.

위로 보면 나는 부모로부터 태어났고,

부모는 조부모로부터 태어났다. 조부모는 또 그 윗대가 있다.

아래로 보면 자식은 나로부터 나고, 그 자식에서 손자로 이어진다.

이렇게 <나>로 보면 시작은 있지만 <나> 또한 시작은 아니다.

그러므로 인연은 그 시작을 알 수 없고 또 그 끝도 알 수 없다.

無始이며 또한 無終이다.

 

사람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도 마찬가지다.

나무를 보자.

하나의 사과나무 씨앗이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기까지 뿌리와 줄기, 잎 등

인연으로 만들어진다. 뿌리는 흙의 영양분이 있어야 발아하고

열매를 맺고 크기까지 태양과 물, 공기 등 무수한 인연으로 만들어진다.

그 열매가 다시 땅에 떨어져 흙 속에서 썩으면

그것이 因이 되어 다른 오이나 배나무의 영양이 되는 因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한 因이 緣을 만나면 다른 生을 낳고,

그것이 또한 因이 되어 緣을 만나 다른 生을 낳는다.

하나의 因이 다른 生의 因이 되고,

그것이 또 다른 것의 因이 되기 때문에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因이 重重無盡으로 이어진다.

오이가 배가 될 수도 있고, 양이 늑대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화엄에서 말하는 事事無碍法界인 것이다.

<나>라는 것도 없고 <너>라는 것도 없다.

단지 인연 화합의 所産일 뿐이다.

“그래서 天地는 나와 같은 뿌리요,

만물은 나와 같은 한 몸이다.

(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同體)”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人>의 글자를 보면 밑에서 위로 삐친 것은 없고

오로지 위에서 아래도 삐쳐져 있다.

아마 이것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형태를 말하는 것 같다.

위에서 아래로 삐친다는 것은

종교나 도덕에서 말하는 <下心>을 말하는 것이다.

비가 하늘 높은 곳에서 땅으로 떨어지든,

강물이 흐르듯 중간에서 아래로 흐르든

흘러가는 그 방향은 같은 것이다.

모든 강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은 바다가 강보다 낮게 있기 때문이다.

 

불은 밑이 비어도 위로 타오른다.

사람의 미망이 지어낸 욕망과 교만은 항상 위로만 타오른다.

자기를 내세우는 것은 남들보다 위로 오르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러나 물은 위가 비어 있어도 아래로 흐른다.

그것이 下心이라는 것이다.

<나>를 버리기 때문에 바램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벗어나면 재앙이 따르는 것이다.

 

인도의 성자 라마크리슈나의 어록에 보면 이런 이야기 있다.

『인간은 세 종류가 있다.

첫째 소금으로 만든 인간이다.

자아가 우주 속에 녹아 용해되어 우주와 하나가 된 사람.

해탈을 얻은 사람을 말한다.

둘은 헝겊으로 만든 사람이다.

헝겊은 물에 젖으면 불어난다.

이와 같이 신을 사랑하는 자, 신의 축복과 지혜로 충만한 사람을 말한다.

셋은 돌로 만든 사람이다. 이는 세속적인 사람을 말한다.

돌은 물속에 들어가도 녹지 않듯

털끝만큼도 진정한 지혜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이런 사람을 비유로 완피달이요, 일천제라 부른다.

 

이 비유로 본다면

사람이 살면서 下心을 모르는 사람은 돌로 만든 사람이다.

下心을 닦는 과정에 있는 사람은 헝겊으로 된 사람이다.

이를 완전히 행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소금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다.

소금에 비유한 것은

소금이 물에 들어가면 녹아 없어지듯 절대적 경지에 들어가면

모든 환상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불교로 말하면 業을 벗어나는 길은

깨달음밖에 없다는 말 즉 환상의 실체를 깨달으면

업은 자연히 사라진다는 의미와 같은 말이다.

 

 

그런데 사람은 어디에 발을 딛고 있는가?

<人>자 밑에 있는 글자는 <土> 자다, 土란 땅을 말한다.

사람이 산 것은 바로 이 땅 위에서 산다는 것이다.

불교는 이 세계를 사바세계라 하고 세속이라고 한다.

길을 가면서 아래를 보지 않고 하늘만 보고 간다면

넘어지기도 하고, 수렁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현실을 보지 않고 이념이나 욕망, 지식만을 추구한다면

부질없는 분별 망상과 邪見만 늘어 날 뿐이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이를 발밑을 조심하라는 의미를

<조고각하(照顧脚下)>를 말한다.

 

삶은 평탄한 길이 없다.

갖가지 유혹과 야망이 눈을 가린다.

그래서 苦海라 한다.

자기 발밑을 보고 사람은 <下心)을 아는 자다.

<바로, 지금, 여기에 서 있는 사람이다.>

 

人生이란 글자가 주는 이미지가 이것이 아닌가?

강변을 걸으면서 생각해 본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원광 | 작성시간 26.06.22 거룩하신 부처님께 귀의 합니다
    거룩하신 가르침에 귀의 합니다
    거룩하신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

    어서오세요
    환영합니다.

    원공법계 제 중생
    자타일시 성불도
  • 작성자목탁 | 작성시간 26.06.24 반가워요
    거룩하신 삼보님께 귀의 합니다
    일체 중생의행복을 발원합니다
  • 작성자전희규 | 작성시간 26.06.25 new 거룩하신 부처님께 귀의 합니다
    거룩하신 가르침에 귀의 합니다
    거룩하신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

    생활속불교에서 삶의 지혜를 배웁니다 나무관세음보살 _()()()_
  • 작성자연꽃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16 new 삼보에 귀의합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성불하세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