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공작창에서 높은 분으로 계시는 아버지와 일본 유학 친구의 주선으로 철도 공작창에서 꿈같은 세월을 몇 해 보낸 것 같다.
아버지께서는 사상운동하신다고 가정은 개인적으로 돌보지 못함으로 옮기며 피해사는 것보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기관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 그 당시로서는 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는가보다.
그리고 일본 유학을 함께 다녀온 친구이기에 아버지는 사업을 한답시고 직접 그 곳에서 근무를 하지 않으셔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는 근무를 하지 않고 바깥에서 일을 하실 수 있으면서 식구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면서 한편으로는 어머니께서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본다,
잘은 모르지만 몇 년은 걱정 않고 철도 공작창에서 지낸 것 같다.
철도 공작창은 얼마나 넓은 곳인지 걸어서는 모두 구경할 수 없을 만큼 넓고 크고 기차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크서 알은 것이지만 영화 '친구'에서 친구들이 철조망 쳐지고 아래에는 철도가 있는 굴다리를 넘어 도망가던 그 장면이 바로 내가 어릴 때 한 때 살은 철도공작창 위로 난 범천동 굴다리였다.
그런데 하루는 어머니께서 빈손으로 우리들의 손을 잡고 아침 일찍 철도 공작창으로 나와 그리 멀지 않은 농막이라고 부르는 지금의 범내골로 빈 몸으로 도망을 나왔다.
농막이라는 동네는 주위에서 가장 뒤떨어지고 집도 냇가 따라 피난민같이 사는 집을 짓고 사는 동내였다.
내 기억으로는 조금 먼 곳에는 철길도 있었는데 가끔 화물기차가 지나가기도 하였는데 뒤에 듣기로는 주위에 동명목재상사가 있어서라고 하였다.
농막이라는 동네에서 살 적에는 어머니도 집을 나가면 며칠이고 집에 오시지 않아 누나가 살림을 도맡아 하였다.
그래고 어머니는 누나에게 어떻게 될지 모르니 여러 장의 아버지 사진과 가족사진을 맡겼는데 뒤에 도둑이 들어 상자 속에 고이 간직 한 사진까지 모두 가져가버리고 가끔 꺼내보던 어머니 사진만 몇 장 남아있다.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도둑이 가져갈 것은 있다"라고 하였던가
그래서 지금으로서는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할 수 없는 것이 아쉽고 서글프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사진을 설명하시면서 "너희 아버지가 일본유학 다녀 오면서 사진기를 가져와서 진영에 심은 단감나무 밭에서 찍어주셨다."라고 하시면서
"그 당시 일본에서 유행한 명주에 검은 점이 박힌 명주목두리를 선물로 주셨지, 한국에서도 양모로 만든 적삼은 잘 사는 사람들만 입었는데 그때 사진 찍는다고 농짝 속에 넣어둔 양모 적삼과 명주 목두리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하시였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당감묘목 가져다 한국 최초로 고향 진영에 심었고, "배워야 남녀평등 생활평등이 된다"라고 학교를 지어 야학을 시키시며, 마을 앞 장마에 항상 물이 잠기는 뻘퉁구리 습지에 흙 지다 부어 논 만들어 무상으로 주시느라 많은 가산을 소모하였다.
내가 어머니 사진을 봐도 평범하게 사시는 분 같지 않으시고 비녀 없이 올린 머리모양이나 눈썹을 가느다랗게 다듬고 한 것을 보면 그 당시 소위 말하는 신여성으로 사셨던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