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공엽에 와서 짐을 풀고 어머니는 부산 철도 공작창에서 식당을 운영한 경험이 있어 바로 대동공업에서 운영하는 식당에 취직을 하게 되었고 우리는 대동공업 주위에 있는 판자촌에서 살게 되었다.
우리 삼남매는 지금까지 살아온 중에 가장 행복하게 살았다.
지형이 높아 경치도 해운대 전부가 보였고 먼바다에 오륙도 섬도 보였고 언덕 아래로 기차가 산허리를 휘감고 돌아 해운대 역에 도착하는 구경도 하면서 지냈다.
해운대 지형을 보면 반달모양인데 좌측의 기다랗게 바다로 나간 언덕을 '고두배이'라고 불렀다. 뜻은 잘 모르지만 뾰쪽한 포탄을 '촛배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고두'는 언덕을 말하고' 배이'는 뾰쪽하다는 뜻인 것 같다.
해운대 온천장 주위에 집들은 조금 근사한 집은 있었지만 이층 집은 보이질 않았다. 그 외에는 모두 허허벌판에 가끔씩 집 몇 채가 보이는 해운대였다.
동네 이름도 좌측에 있다고 좌동, 우측에 있다고 우동, 중앙에 있다고 중동으로 이름 지어 졌었다.
그리고 주위에는 그들만이 전해내려오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더 좋아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동네가 '운촌'이라는 동네도 있었고, '승당(勝堂)'이라는 동네도 있었고 '청사포'라는 동네도 있었다.
해운대 역은 바닷가 멀리 뒷산 쪽으로 붙어 있었고 뒷산 골짜기로 난 길로는 가지 말라고 했다. 그 곳에는 나병(문둥병) 환자가 사는데 과거에 문둥병 환자가 병을 낮기 위해 아이의 간을 꺼내 먹은 사건이 있었다고 해서 무서웠다.
그리고 주위에는 육이오사변으로 고아들이 많아 이를 수용하는 고야원이 많았는데 내가 기억하기로는 동백섬에 종덕보육원, 해운대 역 뒷편의 아내리세 보육원, 박이 고아원(?), 그 이외도 두곳이나 있었던걸로 기억된다.
내가 사는 대동공업 아래 마을인 '미포'에 가면 후리라고 그물을 배에 싣고 바다로 나갔다가 빙 둘러 거물을 치고는 육지로 나와 양쪽에서 그물을 잡아당기면서 고기를 잡는 방법으로 하는데 참가하여 고기도 얻어오고 했다.
좌동에서 '장산'이라는 해운대에서 가장 높은 산 8부 능선에는 내가 듣기로는 죄수들을 이용해서 토지를 개간하던 곳을 그당시 부르기를 '개척단'이라고 불렀다.
좌동 뒷산 골짜기는 '안적사'라는 절로 가는 길 이외는 출입이 통재되는데 반 지하를 판 곳에 포탄을 보관하는 곳이였고 미군들이 지키고 있었고 미군들의 본거지는 동백섬 미군 항구와 운촌사이에 자그마한 미군부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