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울 아버지는 일본유학을 마치시고 귀국해서 고향 진영을 잘 살게 하기 위해 일본에서 경험한 단감나무와 기술자를 데리고 오셔서 고향 뒷산에 처음으로 심으셨고,
마을 앞 저지대는 여름 장마에는 항상 홍수로 작물이 되지 않아 그곳을 '뻘퉁구리'라고 부르는 곳을 가산을 제공하여 매축을 해서 공동체 단원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시기도 하고,
배워야 지식평등이 되어서 사람구실을 하고 차별받지 않는다고 학교를 세우시고, 주경야독으로 신개념의 공동생활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러한 것이 그 당시에는 좌익이라 해서 정치적으로 줄을 좌측에 서신 관계로 사람도 많이 죽고 고향을 버리고 부산으로 피신해 살았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경상남. 북도 도당위원장의 직책으로 있었다고 오촌 당숙께서 일러주셨습니다.
부산에서도 도망 다니며 사시기를 대신동에서도 사셨고, 서면 개성중학 앞 개울가에서도 사셨고, 범천동동 철도 공작창에서도 사셨고, 범일동 굴다리 근처에서도 사셨고, 범내골골인가 조선방직공장근처인 농막이라고 하는 곳에서 사시다가
아버지께서 잡혀가고는 어머니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식들을 지인이 사는 사찰로 보내기도 하고, 다시 모여 먼 해운대까지 이사 와서 힘겹게 사셨습니다.
그동안 일을 안 해 본 어머니께서는 막노동으로 수영비행장 건설노동자로 나무에 박힌 못 빼러도 가시고,
미국에서 탄약과 무기를 싣고 동백섬 항구에 정박한 엘시티(LCT) 하역작업하는 노무자에게 밥을 하러 다니기도 하고,
수영비행장 건설에 사용할 안적사 골짜기에 자갈채취하러 가시기도 하셨습니다.
뒤에는 범내골 농막집 매매 잔금으로 재봉틀을 받고는 해운대 시장에서 한복을 짓는 일을 하셨습니다.
원래 고향이 김해 진영이라 아버지께서 일본에서 유학 다녀오시면서 배운 단감재배기술이 발전해서 지금의 진영단감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던 진영에는 우리 집의 감나무밭이 가장 좋은 곳에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가끔 나 보다 6살이 위인 누나가 하는 말이 "우리 집은 일본인이 살던 집이라 마루에는 그네도 있고 미끄럼틀도 있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민족 개몽운동하시는 아버지 때문에 쫏겨나서 부산 살다가 잡혀가시고는 어머니께서 해운대에 숨어 살 적에도 아버지 친구들이 아버지의 소식을 몰라 어찌 알고 어머니를 찾아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분들이 다녀간 뒤에는 돈도 좀 주고 간 것인지 쌀밥에 고깃국을 먹곤 했습니다.
한 번은 그 아저씨들이 다녀가면서 하시는 말이 "다시는 못 볼 것이다." 하고 간 다음 날
해운대 장산의 그 많은 화약고가 터져버렸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치솟는 포탄도 보았고, 바다에 떨어지기도 하고 논밭에 비 오듯 내리꽂는 포탄도 보았습니다.
해운대 주민 모두는 바닷가로 해서 저 멀리 수영이란 곳에 비행장이 있었는데 수영과 비행장에서 한자식 따서 부른 '수비사거리'에서 산 쪽 계곡으로 임시 천막을 친 피난소에 사흘이나 지내다 왔습니다.
그곳에서는 소금물에 손으로 뭉친 주먹밥을 줘서 먹고 지냈습니다.
피난 가면서 어떤 이는 바닷가에 이불을 버리고 가는 사람,
심지어는 어린애도 두고 도망간 사람도 있었을 정도로 위험하고 굉장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 식구도 형님과 나는 제일 먼저 손을 잡고 피난을 갔으며
어머니께서는 집 단속을 하느라 늦어 피난을 못하시고 정차해 있는 차량밑에 누나와 함께 숨고
어머니는 재봉틀을 마루밑에 숨기고 나와 나와 형님을 찾느라 그냥 집 주위에 계셨답니다.
어머니께서는 피난 후 식구들이 돌아온 자리에서 장산 탄약고에 불을 지른 사람이 아버지 친구인
김해 진래에 사는 '순태'라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뒤에 신문을 보니 우리에게 왔다간 그 순태라는 사람이 김해에서 잡혀 죽었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