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해운대 서쪽 변두리 운촌에서 살다가 중동 가장 번화가인 시장통으로 이사를 했다.
처음 해운대로 이사오기는 아버지와 함께 일본에서 유학하던 분이 철도 공작창 높은 분이라 부산 범천동 철도공작창에서 직원식당을 맡아하다가 아버지와 이별하시고는 그곳 기술자들이 해운대에서 무기 만드는 좌동 언덕배기 대동공업으로 올 때 따라와서 식당 보조원으로 있다가
다음에는 수영비행장 노무자로 일하는 것이 돈을 더 많이 받는다고 수영비행장과 가까운 운촌으로 이사를 했고, 마지막으로 부산 범내골(농막)에서 살던 집 매매 잔금으로 재봉틀을 받아 해운대 시장에서 한복집을 하기 위해 중동으로 이사를 왔으므로 우리는 해운대 전 지역을 고루 살았다
내가 오래 전에 살던 해운대를 떠나온 뒤로는 처음가 보았다
순천 사는 회원집의 구들공사를 위해 동해안으로 해서 가면서 잠깐 들러보고자 갔는데 변해도 너무 변해 차로 몇 바퀴 돌면서 길을 찾지 못해 그냥 왔는데 교통법규에 걸렸다고 딱지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2장이 날아온 적이 있었다. 참으로 변해도 해운대는 너무 변했다.
그때 우리 어머니께서는 그동안 벌은 돈과 고향의 전답을 팔아 시장 바로 앞에 이 층집 땐스홀이 있었는데 미군이 철수하므로 망해서 그 이층 집이 값싸게 나와서 구했다
그리고 시장 안에서 바느질로 한복을 만드는 일을 오래 하셨다.
그때 우리 어머니를 <이 층집 아줌마>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졌는데 한복집 말고도 어머니가 여러가지로 봉사활동을 하시던 때라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일본유학하면서 유도를 배워오셨기에 어머니께서도 아버지께 아이들 팔뚝 빠진 것도 교정해 주었고 침도 잘 놓으시고 특히 그때는 갓난아기들이 정끼(갑자기 졸도하는 아이들)라는 것이 많았는데 해운대에서 간난아기가 정끼라도 들면 모두 우리 집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어머님께서는 돈을 받지 않으셨다.
그러면 추석같은 명절이 오면 흰 고무신은 많이 들어와서 이웃에 나누어주시는 것도 보았다.
돈을 받지않는 이유를 한참뒤에 우리가 성장해서 알았다.
내 밑에 동생이 특히 '정끼'를 많이 하여 놀래면 눈을 뒤집어 깔고 숨을 멈춘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동생을 살리지 않겠나 싶어 애기를 안고 사람이 많은 시장으로 뛰어갔다.
마침 그곳에 할머니 한분이 있어서 동생의 생명을 구했는데 그 뒤 그 품삯을 깜박 잊고 시장에 갔더니 많은 사람 앞에 창피를 주더랍니다.
어머니는 바로 값을 치르고 수소문하여 신당이라는 곳에 용하다는 할머니를 찾아가서 그 비법을 배웠답니다.
다시는 남에게 가지 않고 내손으로 자식을 치료하겠다고
그래서 항시 우리 집에는 경면주사(鏡面朱沙)라는 붉은 약품이 있었고 그러한 비법이 널리 알려져서
어머니께서 시장 안에서 바느질하시면서 정끼를 낮게 해주는 분으로 사셨다.
혹 어머니께서 집에 계실 때 손님이 찾기라도 하면 시장통의 사람들이 우리 집을 알기 쉽게 가르쳐준다고 이층 집 아줌마 라고 해서 그 뒤 우리 아머니 택호가 <진영댁>에서 <이 층집 아줌마>가 되었다.
그 당시 이층 집은 시장 앞에 금강상회와 우리 집 뿐이었다.
우리 어머님은 처녀시절부터 바느질하시는 친정어머님께 배워서 바느질 솜씨가 좋았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 가끔 자랑삼아 "재봉틀은 사람얼굴이 새겨진 인표 재봉틀이 고장도 나지 않고 최곤 기라"라고 하셨습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한복일감이 많아 집으로 가져와서 밤늦게 까지 화로에 숯불 피워 윤두로 달구어 옷고름 짓 섶 동정 소매 같은 곳을 맵시 좋게 하시고 용어도 쉽게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