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현선생의 죽음으로 잠시 슬픔에 잠겼다가 함께 살던 형님은 고향 합천으로 가고, 나는 특별히 갈 곳도 없고 해서 서울을 가려다가 돈도 없고 인연도 없어 팔현선생의 말씀따라 지리산 구례에 있는 화엄사를 찿아갔다. 주지스님을 만나 팔현선생께서 하신 말씀과 마지막 목격담을 말하였는데 주지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참 아까운 사람 갔구먼 모든 일에 철저하시고 이치에 통달하신 분인데 시대를 잘못만나 허무하게 가셨구나, 나 혼자라도 천도제를 지내야 겠구나" 라고 하셨다 내가 물었다 "천도재가 무엇인가요?" 주지스님께서 말씀하셨다. "팔현선생이 갑자기 죽었으니 저승갈 일에 준비나 했겠어, 마치 사람이 길가다 갑짜기 소낙비를 만나면 아무 집 처마밑으로 가서 비를 피하듯이 팔현선생이 살아생전 살생도 많이 하였고 갑짜기 죽었으니 아무곳에나 가서 몸을 받을 것 같아 악도 인연에 태어나지 말고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부처님께 부탁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절에서 돈을 들여 천도제를 지내면 오히려 팔현선생께 이생에서 빚이 되니 나와 친구 인연이 있어 나혼자라도 지내야 하는 것이 좋겠구나"라고 하셨다.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너도 절에 있으면서 행자노릇 똑똑히 하거라 신도의 공양을 받고 사는 불자는 빚지면 않되는거거던" 하시면서 "잘 왔어 이제 산꾼을 만났으니 절산에 나무 도둑 맞는 일은 없겠구나" 하셨다. 내가 다시 물었다. "펄현선생께 많은 배움과 은헤를 입었는데 입산하시기 전에는 화엄사에서 스님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전에도 어떤일을 하셨는지 아시면 말씀해주세요?" 주지스님\께서 말씀하셨다 "팔현선생은 일제 식민지 시절에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서 조선일보사에 근무할 때가 30살이였어 그 때 3.1 만세운동이 났거든 그 때는 용케도 붙잡히지 않았어 그뒤 팔현선생 나이 35살 적에 '조선노동총연맹'과 조선청년총년맹을 조직할 때 실행위원으로 참가하고, 다음해에 조선공산당 조직할 때 참가하고 그 다음해 선생의 나이 37살에 6.10만세 운동에 적극 가담해서 일본경찰이 대대적으로 채포할 때 그 때도 용케 잡히지 않은 분이거든 그 때 105인 체포사건으로 주로 언론계 인물이 대부분인데 그래서 하든 일을 그만두고 화엄사로 출가하신분이여!," 라고 하셨다. 내가 다시 물었다. "화엄사 승려생활하시다가 다시 지리산으로 숨은 일은 어떠한가요?" "나는 모르지 나보다 10살이나 많으니 자상한 것은 물을 수가 없었고 팔현선생께서 말해줘서 나도 그 정도 밖에 모르네 짐작하건데 해방정국과 6.25사변으로 해서 과거 사상운동에 가입된 이력 때문일꺼로 생각되네 주로 지리산 부근에서 공비토벌이니 여수순천 사건과 제주 4.3사건으로 더 이상 화엄사에 승려생활이 어려웠던 거로 생각되네 "라고 하셨다. 주지 스님은 나에게 한 열흘 아무 일도 시키지 않으시고 나를 관망하시는 것 같았다. 하루는 주지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침 저녁 예불은 참석하거라 모두 부처님의 은덕으로 도량에 사는 사람은 부처님께 조석으로 인사는 드려야지" 라고 하셨다. 또 몇일 지나 스님께서 가까운 광주를 다녀오시면서 체격이 건장한 청년 2명을 데리고 오셨다. 지금 절에서 가장 큰 일은 절산에 아름더리 소나무를 지키는 일이다. 구례사람들이 날마다 밤에는 절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가니 밤에 도끼로 나무찍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괴로운 것이여 못베어가게 막아야지" 하셨다. 낮에는 할일없어 광주에서 온 형님들과 배구도 하면서 놀고 저녁 먹고는 함께 절산을 지키려 다녔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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