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運逢恩師1947~1968

또 다른 배움(政敎同心) 12, 잠종장(蠶種場)에서 <은산 육영재단> 수계 과목장(水溪果木場)으로 옮기다.

작성자無耘|작성시간26.06.22|조회수0 목록 댓글 0

국립 전라북도 잠종장(잠업시험장) 오 주임의 배려로 함께 살면서 잠업기술지원으로 농촌에 뽕나무를 심어 잠업진흥의 일환으로 선정된 완주군 삼레읍 <은산육영재단> 과목장에서 운영하는 6만 평 중에 밭 8천 평을 개척하고 뽕밭을 조성한 곳에 관리 점검으로 출장 가기도 하였다.

그 당시 배움에 목 말라 하던 시절이라 이곳에서 한문공부하는 것을 보고 감동되어 결국 나도 이곳으로 옮겨 살면서 공부하게 되었다.

<은산육영재단> 수계 과목장은 그동안 권 선생이라는 분이 책임자로 황도복숭아를 재배하여 봉숭아 통조림 공장을 하다가 망해서 교단에서 인수하고 은산(恩山) 김현관 선생이라고 목포에서 염전사업으로 돈을 많이 번 분이 투자해서 <은산육영재단>을 만들고, 책임자로 전남완도출신인 근산(根山) 지해원 선생이 책임자로, 전주 초포에 사는 양 재승 선생을 오게 해서 총무로, 원광대학을 갓 졸업한 황직평 선생을 지도 교무로 해서 주경야독과 정산종법사님께서 내려주신 신심(信心) 공심(公心) 공부심(工夫心)의 원훈으로 정전(正典) 공부를 하게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6년근 홍삼 재배 사업으로 개성에서 월남한 송암(松巖) 선생을 지도로 인삼재배를 하였으며

한문공부로는 옛날 절에서 스님으로 사시다가 오신 한문선생은 교단에서 가장 한학에 정통한 분으로 강산(剛山) 선생을 지도 교감으로 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한문공부를 하였다

이곳이 망한 농장이라 황도 복숭아 과수원은 식감이 좋지 않아 일반 복숭아와 감나무로 바꾸고, 밭에는 고구마가 주류의 작물이다.

한편 농장에는 돼지를 200여마리 기르므로 밭에는 돼지 사료로 고구마와 호밀등을 심어 엔씨레이지라는 발효 보관법으로 해서 비싼 사료를 대체하였다.

은산 김현관선생께서 삼포에 거금을 투자해서 수입금으로 논을 구입하기 전까지는 가난해서 쌀과 고구마로 만든 고구마 밥을 먹고 생활하였다.

큰 고구마는 잘게 설지만 어중간한 크기의 고구마는 그냥 밥솥에 넣어 밥을 퍼면 재수 없는 날에는 그 고구마가 내 밥그릇에 들어오는 날에는 쌀밥은 두 숟갈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 때는 밥에 물을 붓고 숟가락으로 고구마를 으개어 마시면 쌀밥이 두 숟갈도 안되기도 하였다 빠르게 먹고 밥상에서 일어나면 친구가 "너 밥 안 먹고 일어서나?"라고 농담하면 "밥이 두 숟가락 밖에 없네"라고 표현되지 않게 불평조로 대꾸하면서도 기쁘게 살든 시절이었다.

어떤 이는 고구마 밥 먹어 소화불량으로 아파서 못살고 간이도 있었지만 나는 단련된 소화기능으로 별 탈 없이 지냈다.

옛날 팔현선생과 지리산에서 약초 캐면서 산막생활을 하면서 하신 말씀 중에

"안경 낀 거지 없고, 배탈 난 거지 없다. 미친년 맨발로 다녀도 감기 드는 법 없다" "입이 밥 빌러가지 밥이 입 빌러 가는 적 없어"하시던 말씀이 기억난다.

그 당시 모두 어려운 시절이지만 배우기 위해서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었지만 악의 악식과 일이 고되어 중도에 대부분 그만두고 가버렸다.

1년 중에 5월이 가장 고비라 그때는 개척한 척박한 땅이라 여기에는 참깨가 잘된다. 참깨 밭에 거름끼가 많으면 넘쳐 패농 하는데 참깨두둑을 길게 한 두둑 만들고 오면 한나절이 될 정도로 긴 밭이였다.

참께를 심고 저녁에 마을 앞으로 흐르는 수로가 완주군 동상면 대아리 저수지에서 흘러 일본 식민지 시절에 일본으로 쌀을 수탈 해 가던 지금은 익산군 춘포(春浦)라는 곳이 그 옛날에는 대장촌(大場村)이라는 곳인데 일본에서 총리를 지낸 호소카와 총리도 어릴 때 이곳에서 살았다고 하며, 일본인 농장주들이 조선총독부에 의뢰해서 굽이굽이 흐르는 만경강을 직선화하는 대부뚝을 만들고 논으로 개척해서 그곳으로 물을 제공하기 위해 인력으로 조성한 수로가 대아리 저수지에서 우리 마을 앞으로 흐른다고 이름도 고쳐 물 수(水) 자 시내 계(溪) 자 수계리(水溪里)다.

그 당시에는 목욕시설이 없어서 그곳에서 하루 종일 일하면서 땀을 흘리고 저녁 먹기 전에 그곳에 가서 목욕하고 저녁을 먹고 공부하는데 가끔 목욕을 하고는 그냥 집으로 가버린 분들도 많던 시절이지만 나는 갈 곳이 없어 그곳에서 4년과 2년을 합쳐 6년의 세월을 지냈다.

가끔 농장에서 10리쯤 떨어진 삼례역에서 기차 출발 기적소리가 들리는 날인 5월은 해도 길고 더워서 참깨를 심다가 나도 그냥 가버릴까도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한문공부는 재미도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지리산 팔현산막에서 한문기초를 다졌고, 함양 운림동에서 팔현선생께서 서당을 여실 때 유가의 추구와 명심보감과 소학과 사서를 배웠고, 팔현선생과 산청 덕천서원에서 한문공부를 하며 공부한 터라 한문기초는 튼튼하였기에 한학을 아주 잘 아시는 강산(剛汕) 선생 밑이라 나의 한문공부는 일취월장하였던 시절이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