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백산 원천리에서의 조우: 암흑을 뚫고 살아남은 이름, 초봉(初峰)]
1968년, 나(본명 김명환, 법명 김효명)는 처음으로 초봉(初峰) 김철수(金錣洙) 선생을 뵙게 되었다. 당시 나는 나의 부친과 생사를 함께했던 동지들이자, 대구 진보당(進步黨) 당원이었던 네 분의 어른과 함께 전북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로 내려가 선생께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그때 대구에서 온 진보당의 노투사들은 김철수 선생을 마주하자마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뜨거운 동지애를 담아 그분을 ‘초봉(初峰) 동지’라 부르셨다. 노년의 은거지에서도 선생의 항일기 투쟁의 자(字)인 ‘초봉’은 동지들의 입을 통해 여전히 푸르게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이 역사적 거목을 만나 뵙기까지의 여정은 참으로 모질고 험난했다. 앞서 기록했듯, 나는 경상도 태생이었으나 부친이 좌익 활동을 하셨다는 이유로 그곳에서 철저히 버림받고 연좌제(連坐制)의 서슬 푸른 칼날을 피해 전라도로 가출해야만 했다.
고향을 떠난 내가 처음 전라도 땅에서 인연을 맺은 분은 나에게 온돌 구들과 서법(書法)을 가르쳐주신 팔현(八賢) 김득수(金得洙) 선생이었다. 거창과 함양, 그리고 깊은 지리산 자락을 유랑하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 팔현 선생 역시 일제강점기 조선일보에 근무하던 중 6·10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몰려 투옥되었다가, 감시를 피해 전남 구례 화엄사로 숨어들어 승려가 되신 항일 지사였다.
해방 후 제주 4·3 사건과 여순사건의 공비 토벌이라는 참혹한 전란을 피해, 팔현 선생은 구례 화엄사에서 다시 경남 거창으로 숨어드셨고, 연좌제에 걸려 방황하던 청년기의 나를 거두어주셨다. 그렇게 우리는 지리산 품에서 몇 년간 고락을 함께했다. 이후 팔현 선생께서 불의의 독사 교상으로 세상을 떠나시며 내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셨다.
"내가 한때 전남 구례 화엄사에서 승려 생활을 했는데, 지금 주지가 나와 막역한 친구이다. 그곳으로 가 내 이름을 대고 의지하며 살거라."
스승의 유언을 따라 화엄사에서 지내던 나는, 잠시 서울을 거쳐 다시 화엄사로 내려가던 기차 안에서 전주 덕진동에 살던 오 주임을 운명처럼 만나게 되었다. 그의 주선으로 전북 잠종장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분이 원불교 덕진교당의 교도회장이었다. 당시 국가적인 양잠 사업 진흥 책에 따라, 원불교 삼례 과목장의 8천 평에 달하는 뽕나무 재배 시범포로 함께 출장을 다니던 중, 자연스럽게 원불교의 대의에 감화되어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오늘날 익산 원불교 영산선학대학교의 전신인 동산선원(東山禪院)에 입학하였다.
선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출가 승낙서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하여 연락이 끊긴 지 무려 9년 만에 부산에 계시던 어머니를 극적으로 만나 승낙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이때 어머니께서는 내가 머무는 선원의 주소를 소중히 적어두셨다가, 남편의 옛 친구들이자 대구에 살고 있던 진보당 당원들에게 전하며 나를 찾을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셨다.
마침내 부친의 동지들과 연락이 닿은 나는, 그 엄혹한 현대사의 상흔을 간직한 대구 진보당 어른들의 손을 잡고 백산 원천리의 토담집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대의 풍파를 온몸으로 막아선 노투사들이 서로를 ‘초봉 동지’라 부르며 눈물겨운 재회를 나누는 역사의 현장을 내 눈으로 똑똑히 목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