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진보당 어른들의 손을 잡고 마주한 자리에서, 나는 내 생애 가장 경이롭고도 눈물겨운 순간을 맞이했다. 나(본명 김명환, 법명 김효명, 불명 김청성, 호 무운, 김철수 선생께서 지어주신 이름 연관[憐觀])는 태어나 한 번도 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다. 연좌제의 굴레 속에서 그저 죄인처럼 살아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진보당 어른들이 김철수 선생께 나를 소개하며, "이 청년이 바로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였던 화산(火山) 김재봉(金在鳳, 1891~1944) 동지의 아들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 순간, 한 시대를 호령했던 노투사 초봉(初峰) 김철수 선생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선생은 내 손을 부둥켜쥐고 통곡하시며, "네가… 네가 정녕 재봉이의 아들이더냐!" 하고 외치셨다. 일제강점기 사선을 함께 넘나들며 조국 해방을 꿈꾸었던 옛 동지의 핏줄을 은거지에서 마주한 노혁명가의 가슴은 무너져 내리는 듯했을 것이다.
그날 이후, 내 삶의 이정표는 백산으로 향하게 되었다. 당시 내가 입선하여 공부하던 동산선원(東山禪院, 현 익산시 동산동 소재의 옛 일본 신사 터와 건물)은 원불교 교단의 인재를 길러내던 영산선학대학교의 전신이었다. 익산에는 연고도 없고 특별히 아는 사람도 없었으며, 경상도 고향 땅은 이틀 만에 다녀오기에는 너무나 멀고 아득했다.
그리하여 나는 강의가 없는 토요일과 일요일이 되면 어김없이 김철수 선생을 찾아 길을 나섰다. 주말 아침을 먹는 대로 곧장 이리(裡里, 옛 솜리, 현 익산)를 출발해 부안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다시 평교(平橋)행 버스로 갈아탄 뒤, 지름길인 험한 산길을 발이 부르트도록 걸었다. 그렇게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백산면 수성리(대수리)의 외딴 토담집에 계신 초봉(初峰) 김철수 선생을 뵙고 나면 가슴에 형용할 수 없는 온기가 차올랐다. 선생의 곁에서 하룻밤을 따뜻하게 자고 이튿날 다시 선원으로 귀가하는 것이 내 주말의 유일한 일과이자 기쁨이었다.
1968년 선생을 처음 뵌 이후, 내가 동산선원 4학년 졸업반이던 1971년에 이르자 내 나이도 스물다섯(25세) 청년이 되었다. 한학(漢學)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새로운 학문과 지식을 어느 정도 익히고, 세상의 민심과 돌아가는 형편을 차츰 눈여겨보던 시절이었다. 내가 청년으로서 사상과 학문의 깊이를 더해가자, 그동안 은거하며 철저히 침묵을 지키셨던 초봉 김철수 선생께서도 마침내 빗장을 푸시고 격동하는 한국 정치와 현대사에 대한 깊은 속내와 혜안을 나에게 아낌없이 들려주기 시작하셨다. 동지들의 피로 새겨진 이름 ‘초봉’의 정신이, 그렇게 주말 밤마다 작은 토담집의 등잔불 아래에서 청년인 나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