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봉(初峰) 김철수(金錣洙) 선생께서는 당신의 유년 시절 학업에 대한 열망과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운명적인 계기를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회고하셨다.
"나는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제 발로 서당을 쫓아갔다네. 할머니는 내가 너무 어려 고생할까 봐 가지 못하게 말리셨지만, 어머니는 나를 기필코 가르치려 하셨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저 나를 곁에 두고 예뻐만 하려 하셨으나, 나는 글을 배우고 싶어 기어이 울어가며 서당을 다녔네.
마침 우리 어머니의 젖을 같이 먹고 자란 동갑내기 동무가 하나 있었는데, 참 묘하게도 그 아이는 서당에 가기 싫다고 울었고, 나는 서당에 가고 싶어서 울었으니 늘 대조를 이루었지. 그렇게 시작한 공부였네. 함께 배우던 동무 중 하나는 나와 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잘 따라왔으나, 다른 한 아이는 지능이 원체 낮아 늘 글을 익혀오지 못하더군. 다행히 나는 머리가 둔하지 않아 그 어린 나이에 《맹자(孟子)》와 《시전(詩傳)》을 막힘없이 전부 외웠다네.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이미 《시전》을 떼고 그 깊은 도리까지 다 배웠으니 말일세.
열네 살이 되던 해에는 혼인을 하여 장가를 들었네. 그리고 상투를 튼 채로 군산의 금오학교(錦吾學校)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지. 한창 학교에 다니던 중 나라에서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져 학교마다 머리를 깎으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네. 보수적이셨던 아버지는 깜짝 놀라 나를 집으로 데려오셨고, 나는 졸지에 학업을 중단한 채 집에 머물게 되었지.
집에만 있으려니 좀이 쑤시고 심심하던 차에, 고향 집에서 한 십리쯤 떨어진 '말목'이라는 마을로 분가해 살던 형님이 떠 올랐네. 그 말목이라는 동네는 그야말로 내로라하는 문장가들이 모여 살던 거대한 한문 소굴이자 학문의 깊은 서식처였지. 그곳에 구한말 구례군수(求禮郡守)를 지내신 우당(愚堂) 서택환(徐澤煥) 선생이 계셨다네. 풍채가 대단히 당당하고, 글씨를 기막히게 잘 쓰실 뿐만 아니라 학식의 깊이가 비길 데 없는 당대의 거유(巨儒)이셨지. 선생께서는 나라가 일제에 강탈당하자 미련 없이 군수직을 던져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서당을 열고 후학을 가르치고 계셨네.
그런데 우당 선생께서는 여느 완고한 선비들과는 완전히 다르셨네. 서당에 모인 우리를 향해 준엄하게 말씀하셨지. '이제 낡은 과거의 학문은 과감히 그만두어라. 지금은 일본말을 배우고, 산술을 익히고, 물리와 같은 신학문을 배워야 할 때다. 그리고 힘을 길러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쳐야 한다!'
선생께서는 친히 동네에 신식 학교를 세우시고, 마땅히 갈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서당 대신 학교로 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셨네. 이 혁신적인 주장을 두고 말목 마을에서는 고리타분한 구식 서당 훈장들과 큰 싸움이 번지기도 했고, 심지어 같은 친족끼리도 이념이 갈려 반목하며 평생을 등지고 산 이들도 생겨났지. 그러나 어린 내가 깊이 생각해 보아도 우당 선생의 주장이 백번 옳았네. 시대가 바뀌었는데 서당 공부만 고집해서는 나라를 구할 수 없으니, 마땅히 신학문을 닦아야 했던 것이지.
돌이켜보면, 호령하듯 우리를 일깨우시던 우당 선생의 그 서슬 푸른 가르침이, 가난한 청년이었던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한 독립운동의 제단에 온몸을 던지게 된 필연적인 계기이자 영원한 사상적 뿌리가 되었던 셈이네."
선생의 구술이 끝난 뒤 눈을 돌려보니, 여전히 방 안 책장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수많은 편지봉투와 연하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수많은 종이 위에는 세월의 풍파를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한 사람을 향한 세상의 경외심이 붉은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초봉(初峰) 선생님 전(前)'
유년의 총명함으로 낡은 시대를 뚫고 나와, 우당 선생의 가르침 아래 격동의 최전선에서 ‘가장 먼저 일어서는 첫 번째 봉우리’가 되었던 인물. 말년의 서재에 쌓인 저 무수한 '초봉'이라는 호칭은, 선생이 걸어온 독립투쟁의 발자취가 얼마나 정당하고 찬란했는지를 역사의 이름으로 묵묵히 증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