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봉 김철수 선생의 낡은 앨범을 함께 넘기던 어느 날, 나는 대한민국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선생이 보내온 빛바랜 연하장 한 장을 발견했다. 그 위에는 굳센 필치로 ‘초봉(初峰) 동지 혜존(惠存)’이라는 글귀가 선명히 적혀 있었다. 내가 조심스레 여쭈었다.
"선생님, 아호 중에 '초봉'이라는 이름도 있으셨습니까?"
초봉(初峰) 김철수(金綴洙) 선생께서는 옛 기억이 감연하신 듯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그려, 해공 신익희 씨는 나와 일본 와세다 대학 동기생이라네. 훗날 상해 임시정부 시절에는 사상적 궤적이 달라 항상 나와 반대파에 서서 치열하게 논쟁하곤 했지. 하지만 그 옛날 도쿄 유학 시절에는, 내가 수많은 유학생 중 가장 앞장서서 고초를 겪으며 애를 쓴다고 하여 동료 학생들이 '처음 초(初)' 자에 '봉우리 봉(峰)' 자를 붙여 '초봉'이라 불러주었다네."
"그토록 명예로운 이름을 지금은 왜 사용하지 않으십니까?" 나의 질문에 선생은 쓸쓸히 고개를 저으셨다.
"내가 해방 정국의 격랑 끝에 정계에서 물러난 이후로는 이 나라를 위해 온전히 이뤄낸 것이 없는데, 내 무슨 염치로 감히 그 빛나는 이름을 쓰겠는가."
나는 다시 선생께서 보여주신 1916년 와세다 대학 졸업 기념 합동 사진을 떠올리며 여쭈었다. 서열과 신분을 극진히 따지던 그 엄혹한 시절에, 선생께서는 정중앙 맨 앞줄에 홀로 당당히 팔짱을 낀 채 좌중을 압도하는 모습으로 앉아 계셨다.
"이 사진을 보면 동창생들 사이에서 선생님의 인망과 인기가 대단하셨던 듯합니다."
선생께서는 당시의 긴박했던 정세를 회고하며 목소리에 힘을 주셨다.
"그 시절 일본 유학생들 중에는 타협 없는 '절대독립파' 청년들이 많았네. 동지들은 내가 언제나 사선을 넘나들며 최선두에 선다고 여겼지. 그래서 사진을 찍을 때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이 수두룩했으나, 나를 유학생들의 대표 인물로 예우하며 기어이 정중앙 자리에 앉히고 장내를 주도하게 했던 것이네.
왜 그런 대접을 받았는고 하니, 내가 와세다 대학에 다닐 무렵 우리 학교 총장이자 당시 일본의 국무총리대신이었던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가 중국을 협박해 군국주의적 ‘21개조 요구’를 강제 체결한 일이 있었네. 오쿠마 총장이 학교에서 이를 정당화하는 강연을 열자, 내가 벌떡 일어나 그의 제국주의 외교정책이 동양의 평화를 짓밟고 일본의 패권만을 탐하는 간악한 짓이라며 정면으로 폭교(爆敎)하고 공격해 버렸지. 그 길로 일제 고등계 형사들이 내 하숙집을 샅샅이 뒤지며 탄압이 시작되었다네.
결정적인 사건은 그다음이었네. 당대 일본에서 문학박사이자 법학박사로 명성이 자자했던 거물 국수주의자 미야케 세이세이(三宅雪嶺)를 기독교청년회관(YMCA)에 초빙해 강연을 듣는 자리가 마련되었지. 수많은 이들이 그의 명성을 듣고자 모인 자리에서, 미야케는 오만방자하게도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보아서 조선은 일본과 한나라가 되어 합방되는 것이 피차의 지위를 유지하기에 가장 이롭다'는 망언을 배설하더군.
그 매국적인 발언을 듣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구쳐 참을 수가 없었네. 강연이 끝나면 뒤이어 다른 연사들의 순서가 줄줄이 남아 있었으나, 나는 대의를 위해 주저 없이 전면으로 돌진했지. 분노한 내가 강단 앞으로 달려들어 호통을 치자 미야케는 당황하여 '어찌 감히 내게 달려드느냐'며 적반하장으로 대들었네. 나는 그가 보는 눈앞에서 내가 앉아 있던 무거운 나무 의자를 번쩍 들어 지체 없이 교단 바닥으로 내동댕이쳐 부숴버리고는 단호히 문을 박차고 나왔다네.
이 '의자 투척 사건'으로 인해 유학생 사회 내부에서 거센 사상적 격돌이 일어났지. 송진우, 이광수, 최두선 같은 이들은 일본의 명사를 초청해 놓고 무례를 범했다며 나를 맹렬히 비판했고, 다른 한편의 절대독립파 청년들은 '조국을 모독하는 자의 말을 대체 무엇 때문에 듣고 앉아 있느냐'며 맞받아쳐 유학생들끼리 격렬한 육탄전이 벌어졌네.
결국 그 친일적 강연회는 형편없이 무산되어 버렸고, 내 하숙집에는 또다시 형사들이 들이닥쳐 모진 조사를 받아야 했지. 비록 몸은 고달팠으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낸 이 사건을 계기로, 대일항쟁의 전선에 서 있던 동지들은 연하장이나 편지를 보낼 때마다 한결같이 나를 ‘초봉(初峰) 동지’라 부르며 투쟁의 선두 주자로 우러렀던 것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