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전통의 생태친화적 인간주의
서론
린 화이트는 현대 생태위기는 서구 과학기술문명이 초래했고, 그 뿌리는 그리스도교 '세계관'이라고 주장했다. 생태론자들이 흔히 인용하는 그의 주장을 절대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최소한 생태계의 위기는 '세계관'의 전환을 통해서만 극복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전망은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동양적 세계관이 자연과의 '동일성' 내지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동양사상이 心德에 호소함으로써 현대 환경위기의 대안이 될 것이라고 하는 최근덕의 논지나, 도구적 타자관의 극복을 [주역]의 재해석에서 찾는 최영진의 논지도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고대 동양의 사상가들이 지금과 같은 생태위기를 예감하며 자신들의 세계관을 형성한 것은 아니다. 농경 문화 자체가 자연에 대한 파괴 내지 변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심각한 생태위기가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나 도교의 자연관이 생태 '이론' 수립을 자체의 목적으로 지녔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동양사상의 자연관에 대한 접근은 전적으로 해석학적 차원의 문제이다. 즉 생태 문제에 대한 동양사상의 활용은 현대 해석자의 재해석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최근덕과 최영진의 논문은 동양사상에 대한 조망의 현대성을 견지하고 있다. 양자는 유교 사상에 대한 특정한 해석에 갇히지 않으면서, 유교의 현대적 의미를 창조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본론
생태문제에 있어서 동양사상이 주목되는 것은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의 세계관이 갖는 차별성 때문이다. 스즈끼는 바쇼와 테니슨의 시를 비교하면서 동양사상의 특징은 종합적, 전체적, 비조직적, 직관적, 주관적 입장에 서 있고, 서양사상은 분석적, 분별적, 과학적, 개념적, 객관적 입장에 서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자연에 대한 동양인의 자세는 조화, 합일, 관조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수용하는 최근덕은 동양철학의 자연관을 [주역]("자연법칙에 순응하는 것이 도덕"), 왕필("一元의 氣로 인해 땅 위 온갖 것들이 태어나고 자라나서 다 함께 그 德化를 누린다"), 장자("天地, 四時, 萬物은 각각 大美, 明法, 成理를 지니고 있으나 말하지 아니하고, 성인은 천지의 아름다움을 바탕삼아 만물의 이치에 통달한다"), 신유학의 주희("천지만물이 본래 나와 일체")의 예를 들어 천인합일의 경지로 나아간 것으로 규정한다.
1. 새로운 환경윤리 수립을 위함 동양사상의 함의
최근덕은 생태위기의 원인은 세계관에 놓여 있다는 진단을 통해 그 극복의 대안 역시 세계관 전환(心德에 대한 호소)에 기초해야 함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동양사상의 네 가지 덕목을 새 시대의 환경윤리로 제시한다.
첫째, 생명존중 사상.
[주역]의 "낳고 낳는 것을 易이라고 이른다(生生之爲易)"는 것, 순자의 "하늘과 땅은 生의 뿌리이다(天地者 生之本也)"라는 것, 그리고 노자의 '끊임없이 활동하는 和氣'라고 하는 "仲氣"와 "낳되 지니지 않는(生而不有)" 생명외경의 표현, 장자의 "생명을 중히 여겨라, 생명을 중히 여기면 이익을 가볍게 여긴다(重生 重生則利輕)"라는 가르침과, 또한 만물과 나란히 사는 至德의 시대 이상 등은 생명존중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한민족도 "살리기를 좋아하는 心德"을 갖춘 사람들로, 생명존중의 자세를 간직해왔다.
둘째, 天人合一, 物我一體 사상.
[書經]에는 "천지는 만물의 부모이고 사람은 만물의 靈"이며, "하늘의 사업은 사람이 대신한다"는 가르침이 있고, [禮記]에도 "사람은 천지의 덕, 음양의 사귐, 귀신의 모임, 五行의 秀氣"라고 규정하면서 "사람은 천지의 마음이고 오행의 실마리"라는 가르침이 있다. 한편 맹자는 "만물이 다 나에게 갖춰 있다"고 가르쳤고, 순자도 사람이 자연의 작용에 일체감을 갖는 능력을 지닌다고 했다. 이처럼 인간은 天,地와 더불어 동격으로 三才에 참여하는 존재이며, '너(物)'와 '나(我)'가 하나가 되어야 三才가 조화롭게 자연의 生生之理를 구현할 수 있다.
셋째, 憂患意識.
다가오는 위험에 대한 가장 효과적 방비책은 '걱정'이다. 최근덕은 "憂患에서 살고 安樂에서 죽는다"는 맹자의 말은 우주의 중병을 걱정하는 인간의 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넷째, 건전한 가치관의 확립.
환경문제는 인류의 과욕의 소산이며, 맹자가 삶과 義 중에서, 의를 중시한 것처럼 가치관의 엄정한 잣대로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
최근덕의 논문 중 '憂患'의 개념을 생태학적으로 조망한 것은 시의적절한 논지이다. 인간은 사회, 경제적 처지나 종교적 기대, 혹은 감각 능력의 민감성 정도에 따라 감수성의 차이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같은 조건에서 어떤 사람들은 위기감을 느끼지 않고, 반면 어떤 이들은 절박한 위기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과 우주의 고통을 자신과 별개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 '우환' 의식은 '생태학적 감수성'으로 의역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논문 제목에서 암시하듯, 동양사상 일반의 생태론적 함의를 총론적으로 다룬 점은 일반적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는 장점을 갖는 동시에, 각 종교, 사상 전통에 대한 각론적 재해석을 과제로 남긴다. 다음의 최영진의 논문은 그런 생태친화적 동양사상을 각론적(유교) 차원에서 재해석한 의미를 갖는다.
2. 유교의 자연관 - [주역]을 중심으로
최영진은 자연을 욕구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서양의 도구적 자연관과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했다. 서양인에게 자연은 욕구충족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타자일 뿐이다. 이런 도구적 타자관은 자연이 영혼 없는 물질로 구성되었다고 보며, 그것이 기계적 원리에 의해 작동된다는 자연(物)관에 기초해 있다. 반면 유교의 자연관은 자연(物)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인식한다. 특히 유교 [주역]의 자연관은 이것을 심층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유교는 타자, 物(자연)을 그 자체의 목적성을 지닌 것으로 인식한다.
유교는 타자와의 관계성에 있어서 '욕구의 동질성'을 전제했다. '仁'을 구하는 방법인 '恕'도 너와 나의 마음이 동일하다는 것, '싫어함'(惡)의 보편성을 인정한 것이다. 이런 태도가 주자학에 이르러 하늘에서 부여받은 이치로서의 '性'은 우주적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형이상학적 토대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런 인식의 원형은 정치의 목적을 백성으로 보는 원시유교의 '民本', '爲民'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이 관점이 이후 유교 역사에 나타나는 타자 인식의 원형이 되어 타자인 物을 그 자체의 목적성을 지닌 것으로 보게 하였다.
하지만 物은 원래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을 지칭한 것이었다. 그러나 '道之爲物', '心之爲物' 같은 용례에서 보듯이 物은 관념적 존재 내지 인간의 마음도 포섭한다. [주역] '계사전'의 '精氣爲物'은 物이 精氣로 구성된 것이라 하는데, 여기에서 精은 생명력의 원천으로 설명하고, 氣는 생명현상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물론 유교 전통에서는 '인간의 氣', '자연의 氣'를 구분하기도 하나, 氣를 복합적 의미로 사용한 것이 일반적이다. 맹자의 경우 氣는 마음과 신체, 인간과 자연, 사실과 가치라는 이분법이 적용될 수 없는 전일한 개념이었다. 또한 [주역]도 '십익'과 같은 경우에는 '자연의 기'를 표현하지만, 당시 氣가 복합적 의미로 통용되었으므로 그 역시 같은 의미를 가졌을 것이다. 따라서 物은 단순히 '물체'가 아니라 생명성을 강하게 지닌 동시에 정신적, 도덕적 측면까지 고려된 개념으로서 전존재를 포괄한다.
둘째, [주역]이 드러내는 세계는 物의 유기적 관계망이다.
[주역] '설괘전'은 '하늘, 땅, 산, 연못, 우뢰, 바람, 물, 불' 여덟가지 사물이 상호 관계하여 자연을 구성함을 보여준다. 이 기본 요소들이 각각 제 역할을 하면서도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여 생명을 생성하는 것이다. 공영달은 이것을 해석하여 物은 독자적으로 생명을 생성시킬수 없음을 주장했다. 즉 생명의 생성은 '否卦'에서 보듯 어느 한 요소만의 공덕으로는 불가능하다. 이처럼 주역은 陰陽待待논리에 근거하여 상반적 타자를 자신의 존재성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 전제조건으로 삼는다는 관계의 논리를 펴고 있다. 64괘의 육효 중괘도 사물과 사물이 만나서 전개되는 일련의 사태를 상징한다. 하나의 괘라도 결여하면 이 과정은 성립할 수 없고, 또한 하나의 괘는 64괘 전체를 함의한다. 하나가 전체이며 전체가 곧 하나인 것이다. 즉 세계는 物의 유기적 그물망임이다.
셋째, 유교는 愛物의 윤리를 제시한다. 인간중심주의는 서양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순자는 인간만이 義를 지니고 있으므로 가장 귀한 존재라고 했고, 정약용도 하늘이 인간에게 영명함을 부여하여 만유를 이용하게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동양의 인간중심주의는 맹자의 '愛物' 사상에서 보듯이 자연친화적 맥락에 강하게 기대고 있다. 맹자는 제선왕이 죽어가는 소를 측은히 여겨 소 대신 양을 희생제물로 삼은 것을 어리석다고 하지 않고, '보이는' 현실에 대한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으로 설명한다. 이것이 性善의 논거가 되는 惻隱之心이다. '보이는 소'와 '보이지 않는 양'의 차이는 理一의 절대적 평등성에 기초한 '순서'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愛物 사상은 동물이 여전히 인간에게 도구적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생명 유지를 위해 다른 생명체를 희생시켜야만 한다는 것은 부인될 수 없는 현실이다. 그것을 인정한 가운데 유교는 필요 이상의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을 제시한다. 공자는 낚시는 하되 그물질은 하지 않았고 자는 새는 잡지 않았다. [주역] 比卦 5효도 동물들이 도망갈 수 있도록 한쪽 방향은 터놓고 사냥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유교의 어쩔 수 없는 '자기 변명'이라기보다는, 개체 생명의 삶과 죽음을 物의 유기적 관계망의 신진대사 과정으로 이해하여 그 죽임의 최소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최영진은 [주역]의 物은 생명성, 정신성, 도덕성을 가진 존재이며, 자연과 인간은 같은 혈통의 우주 대가정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는 유교가 여전히 인간을 중심에 놓고 있는 것은 보완해야 할 약점으로 생각하여, 이것을 '愛物의 윤리'로 변호했다. 이 愛物의 윤리는 '최소한의 소비'나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생태학적 덕목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소비 양식 자체를 폐기할 수 없는 인간 실존의 현실을 전제한 상태에서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고 소비하는 환경윤리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 : 생태친화적 인간주의의 가능성
'자연의 유기적 연대성'이 이론 생산자들에게 주는 함의는 '이론의 유기적 연대성'이라 할 수 있다. Ivanhoe가 요약한 현대 환경윤리의 네 차원은 각각이 갖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어느 하나라도 폐기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생태위기의 원인에 대한 다양한 분석과 대안 제시는 각각의 실천을 통해 공동의 위기 극복으로 총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 사상이 모든 문제 해결의 핵심고리는 아니다. 현재 모든 이론 분야에서 제기되고 있는 학제간 연대의 필요성은 생태 문제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이러한 관점을 따른다면 동양사상의 자연관 역시 종교, 사상 전통간의 유기체적 연대를 통한 생태친화적 세계관을 형성해야 할 과제를 갖는다. 그것은 한 전통만의 선택이 아니라 동양사상내 제 전통의 생태학적 의미를 현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이다. 도교와 유교의 경우만을 본다면, '인식의 차원'에서는 도교의 자연, 우주중심주의의 도전과 자극이 현대인에게 의미를 줄 수 있고, '실천의 차원'에서는 유교의 인간주의적인 현실주의가 갖는 책임성이 의미를 줄 수 있다. 이런 전제속에 유교의 생태친화적 인간주의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자연에 대한 인간적 '개입'의 불가피성에 기초해서 '절제'를 추구할 수 있다.
개입을 통한 '변형'의 과정 없는 자연은 인간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조우하는 맹수들, 천재지변과 괴질 앞에 인간은 무능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개입을 통한 변형은 불가피하다. 그것은 다른 생명체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생명체는 각각의 방식으로 자연을 변형시키며 생존을 영위한다. 다른 생물체와 인간이 갖는 유일한 차이는 변형 자체라기보다는, 그것이 '필요'만을 충족하면서 진행되는가, 아니면 그 이상인가의 차이일 뿐이다. 즉 인간은 필요 이상을 변형, 생산, 소비하고 있는 반면 자연의 나머지 구성원들은 필요에 충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태위기의 해법은 자연을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절제를 실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장자가 채소밭 노인의 입을 빌려 우려한 편리의 추구로 인해 절제되기 어렵다. 소비의 욕망이 과대하게 팽창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가피한 개입과 변형을 인정하면서 이루어져야 할 '절제'는 필연적으로 유교 수양론과 연결된다.
둘째, '수양'을 통한 인간변혁을 통해 생태위기 극복을 모색할 수 있다.
생태론이 종말론과 만날 수 있는 것은 과학기술문명을 사는 인간의 욕망이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급진적 생태론자들은 현재의 생산력을 10분의 1로 줄이지 않는 한 인류는 조만간 자멸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현대인은 위험을 이성적으로 자각하고 있지만, 일상에서는 여전히 '욕심'에 매달려 환경 파괴에 일조하고 있다. 이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마음의 변화(욕심의 제거)를 도모하고 적극적 가난인 청빈을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달려 있다. 유교의 수양론은 이 변화를 도모하는데 복무할 수 있을 것이다. 맹자의 생태학적 감수성이나 [주역]의 생명연대성은 '성인'의 이상을 향한 수양속에서 얻어질 수 있는 '이도관지'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셋째, 유교의 자연관은 '생태친화적 인간주의'로 긍정되어야 한다.
최영진은 [주역]의 자연관을 현대적 의미로 설득력있게 재해석하지만, 유교 전통과 도교 전통의 차별선을 그으면서 유교 자연관의 불완전성을 암시한다. [태극도설]의 '惟人也得其秀而最靈'을 언급하면서, 유교의 인간우월주의에 대한 이론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교의 자연관을 무엇인가 결함있는 것으로 보는 방어적 사고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일까? 자연과 인간의 동일성이라는 인식이 그 자체로 현하의 환경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기 어렵고, 또한 산업문명의 파괴적 인간중심주의가 과학기술을 통해 환경위기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것도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유교는 자연에 대한 신비화속에 이상적 복귀만을 제시하는 대안 없는 자연주의보다는 실천적이며, 현대 산업문명의 도구적 자연관보다는 생태친화적인 장점을 갖는다. 즉 양 극단을 지양한 유교의 생태친화적 인간주의의 실현이 현대 생태위기에 대한 구체적 대안으로 부각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유교 전통은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라는 심미적 세계관에 기반하여 인간의 자발적 책임성을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유교 전통 내의 여러 자연관을 현대 환경윤리의 자양분으로 전화시키는 재해석 노력이 계속되어야 하며, 동, 서양의 생태친화적 사유들과 연대하여 공동선을 이루는 과제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Text]
최근덕, "21세기의 동양철학과 환경윤리", 한국동양철학회 34차 정기학술회의
최영진, "[주역]에서 보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한국동양철학회 34차 정기학술회의
한국유교의 전망(2000.3.29), 지도교수 : 김승혜, 발표 : 정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