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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J. Ivanhoe, "원시유교와 환경윤리" - Phiip J. Ivanhoe, "Early Confucianism and Environmental Ethics", Ed by, Mary Evelyn Tucker and John Berthrong, [Cinfucianism abd Ecology],Harvard CSWR, 1998, pp.59-76
논문의 목적과 구성
아이반호는 유교가 현대 환경윤리를 위한 자원이 될 수 있는 길을 설명할 의도로 이 논문을 썼다. 우선 그는 현대 환경윤리 이론의 네 가지 유형을 개괄하고, '全一性'과 '인간중심주의'를 분석한 후, 이것과 관련지어 원시유교의 세 사상가인 孔子, 孟子, 筍子의 자연관이 가지는 현대적 함의를 다뤘다. 그는 이 논의 과정에서 孔子와 孟子에게서도 환경윤리에 적합한 내용이나 태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특히 筍子의 사상은 현대 환경윤리의 현실적 구성에 가치있는 내용을 담고 있음을 밝히고자 했다.
환경윤리의 네가지 유형
1. 가이아 가설
러브록은 지구는 단일한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것을 기본적 입장으로 제시한다. '유기체'라는 것은 생명체의 진화, 변화를 의미하며, 동시에 모든 생명체가 가이아의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가이아가 그 유기체적 구성원들에 대해 포용성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지구의 구성원중 어떤 것이 생명의 이상적 조건을 방해할 경우, 문제되는 그 구성원을 제거하기도 한다. 이러한 러브록의 기본 입장을 강하게 발전시킨 학자들 중 일부는, 우주적 유기체는 의식적 계획적으로 행동하며, 우리는 그것의 일부라고 주장했고, 어떤 이들은 가이아와 신을 동일시하기도 했다.
2. 심층생태학
심층생태학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全一性'을 주장한다. 이들은 각각의 유기체와 생태계는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므로, 만물은 '그 자체로서' 보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간의 파괴적 행동으로 인해 생태계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었고, 이 현실의 극복은 인간의 극적인 행동변화와 인구 삭감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지구윤리
지구윤리의 기본적 입장은 자연의 다양한 구성요소들 사이의 '균형'과 '조화'이다. 이들은 생태계의 본질적 '동등성'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심층생태학과 구별된다. 지구윤리에 의하면, 인간은 자연의 '사용자'이며 '보호자'로서의 존재이다.
4. 사회생태학
사회생태학은 자연에 대한 왜곡된 관념과 믿음은 성, 인종, 계급과 같은 사회구조적 문제로부터 파생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생태여성론자들은 환경파괴의 근본원인이 타자를 대상화하고 개인적 만족을 위해 억압하는 가부장적 사회구조에 있다고 한다. 마치 남성이 여성을 대하는 것처럼(강간,착취) 자연을 억압한다는 것이다. 한편 인종우월주의도 같은 맥락인데, 인종적 우월성에 대한 사고처럼 자연에서의 인간의 특권과 우월성을 강조하여 억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관점도 자연을 인간의 '소유물'로 인식하도록 작용했다.
아이반호는 이상의 네가지 이론 모두는 자연에 대한 현대적 관점이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인식론적으로 눈을 떠 세계의 실상을 이해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바른 관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全一性'과 '人間中心主義'
아이반호는 우선 '전일성'의 다섯 가지 의미를 개괄했다. 첫째, 전일성은 자연과 우리의 관계를 '같은 팀의 일원'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멤버 없이도 팀은 지속될 수 있다는 것으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한다. 둘째, 자연의 일부인 '그 무엇'이 직, 간접적으로 나머지 생태계와 상호작용하고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첫째 의미보다는 더 강한 것인데, '그 무엇'이 존재하지 않을 때 자연이 지속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 '몸'과 '팔'의 관계처럼 인간과 지구의 생명체가 단일한 유기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몸과 팔의 '직접적' 인과성과는 달리, 자연의 관계성과 변화는 덜 직접적이다. 넷째, 가이아 가설에 강하게 기초한 것으로,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며 동시에 생명체의 중요한 구성요소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과 자연의 상호관련성과 상호교통을 의미한다. 다섯째, 존재의 '동일성'에 대한 것으로, 선불교의 '붓다-자연' 은유나, 신유교에서 말하는 만물이 공유하는 理와 같은 의미이다. 즉 우리와 자연은 분리할 수 없이 얽혀있으면서 중요한 구성요소들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아이반호는 세 가지 유형의 '인간중심주의'를 설명하면서, 인간중심주의가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한다.
첫째, '인식론적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의 위치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이것은 같은 세계 안의 다른 존재들이 갖는 주관적 느낌을 인간이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경험과 다른 존재의 경험 사이의 유사성을 통해 그들의 필요를 이해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다.
둘째, '형이상학적 인간중심주의'는 자연에서 인간이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연의 '관리자'인 것은 인간이 나머지 자연과 다르게, 우수하게, 그리고 독특하게(sui generis)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관점은 자칫 자연은 인간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은 대상이라는 생각을 초래할 수 있다. 한편 반대편의 유물론도 자연에 대한 기계론적 관점으로 인해 자연을 대상화하는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셋째, '윤리적 인간중심주의'는 어떠한 것이 가치를 가지는가에 대한 가치론적, 윤리적 차원에 관계된다. 여기서 '강한 의미'의 윤리적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의 복지에만 관심을 두어 자연은 인간의 이익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결론을 파생시킬 수 있다. 하지만 '약한 의미'의 인간중심주의는 다른 피조물의 복지에 대해서도 동등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환경에 대한 원시유교의 가르침
1.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 나타난 생태론적 함의
아이반호는 우선 [論語]와 [孟子]에 나타난 '인간-자연 유비'의 형식에 주목한다. 그것은 윤리적으로 선하거나 우수한 사람들에 대한 표상으로 자연을 드는 경향이다. 예를 들면 [논어] 2:1은 '이상적 군주'를 '북극성'과 유비하고, 6:23은 현인을 흐르는 물이나 산에 유비한다. 또한 공자는 흐르는 물의 不斷性에서 道의 이미지를 보았다(9:17). 또한 공자는 자연을 금욕적 기쁨의 원천(형이상학적 위로)으로 보기도 했다. 이처럼 원시유교 사상가들은 자연을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으로 이해했고, 자연에서 '윤리적 영감', '기쁨', '위로'를 발견했다.
한편 [맹자]에서, 도덕적 본성과 그 왜곡에 대한 은유를 '牛山의 삼림 채벌'과 관련해서 예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도덕적 본성의 타락을, 한때 무성했던 초목이 조직적으로 파괴된 것과 관련지어 초목의 싹과 도덕적 싹을 유비했다. 한편 [맹자]는 '예증' 차원만이 아니라, 성인의 역할과 관련하여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제시한다. 그것은 문명의 기원에 대한 맹자의 언급(3A 4)과 관련된다. 그는 세 성인이 혼돈과 무질서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했다고 한다. 이 의미는 일반적으로 [창세기]와 달리 세계는 무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인간도 자연을 지배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인데, 하지만, 보다 강조되는 것은 이 세계는 성인이 질서를 부여하기 전까지는 기다려야 한다는 개념이다. 이 논의는 순자에 의해더 구체화된다.
이처럼 공자와 맹자는 자연을 인간우주적(anthropocosmic)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의 '윤리적 도덕', '금욕적 기쁨', '형이상학적 위안', 그리고 '생명유지'를 예증하는 것으로 대했고,또한 근본적으로 혼란한 우주에 질서를 부여한 성인의 활동은 인위적 고안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발견한 유형과 과정에 따라 조화시키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2. 순자의 생태론적 함의
아이반호는 순자의 '행복한 균형'이라는 관점을 환경윤리의 차원에서 해석한다. 순자가 농부는 "하늘, 땅과 3위적 존재"라고 한 것은, 인간의 필요와 욕망을 자연과의 조화속에서 조절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순자는 동물, 식물, 그리고 무생물을 도의 일부'로서'(qua) 조화시켰으므로, '강한 의미'의 인간중심주의는 아니다. 하지만 '약한 의미'에서는 인간중심주의적이다. 왜냐하면 그가 다른 피조물들의 복지에 대해서 언급한때조차도, 그것이 인간에게 어떻게 관계되는가를 중심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인이 있기 전의 세계는 '결핍된' 세계라는 주장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모든 우주의 피조물, 인간의 種에 속하는 모든 사람은 성인이 와서 그 적합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하기 전까지 기다려야만 한다"라고 했다. 이것은 세계가 질서와 조화를 얻기 위해서는 성인의 지혜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순자의 입장은 그의 인간관과 관련이 있다. 그는 무로부터의 창조나, 인간이 초월적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구분되는 '지적 능력'이 있음을 강조했다. 인간은 氣, 生命, 知能뿐만이 아니라 '義'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숭고한 피조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적으로는 인간보다 더 우수한 다른 피조물들을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순자의 관점은 [창세기]에서 발견되는 것보다는 덜 오만하고 덜 파괴적인 형이상학적 인간중심주의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 존재의 우월성을 제시하면서도 다른 피조물들과 인간 공동의 상호의존성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고, 인간이 자연과 정당하게 관계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경계를 두고 있으며, 인간의 '특권'만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성도 깊이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순자의 형이상학적 인간중심주의는 '지구 윤리'와 유사하다.
한편 순자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대 견해들도 있다. 즉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가치를 갖지 못한다고 하는 것에 대한 반론이다. 이에 대해 아이반호는 인간적 시각을 떠난 도덕적, 금욕적 가치가 있을 수 있는지 반문한다. 왜냐하면 자연이 가치있게 되는 것은 인간의 반성적 노력을 통해서이고, 이것 없이는 자연의 진가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자연의 진가는 '지구윤리'의 중심개념이다. 지구윤리는 절제, 금욕적 기쁨, 경이롭고 겸손한 인식론적 도덕의 양성을 호소하기 때문이다. 한편 순자의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의' 무질서하고 파괴적인 경향들이 성인에 의해 질서지워지고 조화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때, 자연에 대한 윤리적 책임성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아이반호는 순자와 도교의 자연관 차이를 언급했다. 순자는 道에 대한 찬가에서 자연에 대한 놀라움과 경외의 감정을 표현했는데, 이것은 자연 자체의 현상적 측면보다는, 명상을 통해 얻어진 도의 장엄한 균형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도교와 차이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강물의 不斷性에서 도의 이미지를 발견한 공자의 감탄과, [장자] "달생편"에서 呂梁 폭포의 급류를 타는 노인의 이야기-"소용돌이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고 솟구침과 함께 밖으로 나온다"-가 지니는 도교적 이상 사이의 차이이다. 도교는 [도덕경]의 '베어지지 않은 나무' 같은 상징에서처럼, 사회, 사회화에 대한 전면적 비판을 통해 '자연스러움'을 철저히 옹호했는데, 아이반호에 따르면 이런 자연관이 순자의 자연관을 보완(개조,강화)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아이반호는 이상의 논의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 관점들은 어떻게 사물이 실재하는지를 명백히 알 수 있게 하므로 현대 환경이론의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 그는 '전일성'의 강한 의미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 의심스러워하는데, 그것은 사물이 어떻게 실재하는지에 대한 그럴듯한 설명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은 영감을 줄 수는 있지만, 현대의 철학적 정당화에 대한 기초는 제공하지 못하며 현대인들에게는 수용되기 어렵다고 한다. 따라서 아이반호는 유교적 관점에 대한 분석을 강화하고, 그것과 환경철학을 상호 비교, 교환하여, 유교환경윤리의 작업을 촉진시키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논의를 마치고 있다.
평가 - 원시유교의 자연관이 갖는 '현실성'의 긍정적 수용
아이반호의 논의는 역사적 유교 전반이 아니라 원시유교의 자연관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유교의 모든 흐름을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가 언급한 공자, 맹자, 순자의 자연관은 新儒敎의 고도의 형이상학적 우주론과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원시유교 자연관의 독특한 특징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환경윤리적 차원의 '현실성'이라는 범주에서 이해한다.
전국시대, 순자가 '방종'이라고 논박했던 도교나, 현대의 심층생태학은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에 기초한다. 그것은 인간적 가치에 상관없이 존재하는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원시유교는 자연에 대한 어느 정도의 '다스림'과 '개입'을 인정하고 있으며, 또한 인간의 시각으로 환경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도교 자연관이 갖는 '겸손함'의 미덕이 현대인들의 의식을 자극하는 것에 비해 원시유교의 자연관은 그다지 매혹적이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환경윤리적 행동성의 측면에서는 '동일성'의 강조가 그리 효과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동기 부여 문제와 관련된다. 즉 동일성의 생태중심적 사유는 인간의 필요와 욕망만으로 자연을 도구화하는 것을 '부정'하는 차원에서는 적극적이지만, 그 자연을 보호하고 책임지는 사회적, 윤리적 '행동'의 차원에서는 능동적이지 못한 것이다. 삶의 편리를 추구하는 욕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류에게 '동일성'이 어떤 동기를 부여할지는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이 지니는 최소한의 욕구를 인정하고, 다만 그것이 자연파괴적 양상으로 왜곡되는 것을 지양하는 원시유교의 자연관-순자의 '균형'-은 보다 현실적 차원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곧 환경을 돌봄을 통해 인간이 적극적 이익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동기가 될 때, 인간은 보다 책임적으로 환경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신비로움에 대한 찬가보다는, 환경파괴가 가져오는 재앙이 구체적 개인의 일상으로 침입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오히려 환경윤리적 행동을 촉발시키는 현실이 그것을 반증한다. 이와 함께 '약한 의미'의 인간중심주의인 원시유교의 균형, 조화, 道의 표상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애정, 책임성과 같은 덕목이 현대 환경윤리의 실천적 전개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유교의 전망(2000.3.15), 지도교수: 김승혜, 발표: 정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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