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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교 정치문화의 성격 - 강광식, [조선조 유교정치문화의 구조와 기능]
1. 문제의 제기
조선 道學은 程,朱의 성리학을 인식론적 기반으로 가치규범으로서 義理論과 행동양식으로서 禮論을 기본구조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도학적 정치문화가 지배적 정치문화로 정착한 16세기 중엽 이후에는 체제운영에 참여하는 정치주체들이 도학적 준거에 의거 현실문제를 인식하고 대처하는 主知主義的 양상을 보였다. 그러므로 정치주체들이 견지하는 성리학의 인식론적 입장이나 의리론 및 예론상의 입장이 어떤것이었느냐 하는 문제는 현실정치에 임하는 그들의 가치정향과 행태를 규정하는 핵심적 요소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글은 도학적 가치정향의 구조적 성격을 현실정치과정상의 행태와 연관하여 체계적으로 조명하여 조선조 유교정치문화의 특징적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2. 조선조 유교정치문화의 이념구조와 그 이데올로기적 기능
조선조는 주자학을 신봉하는 士族중심의 易姓革命을 통해 개창되었으므로, 유교 이념이 신왕조 개창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원용되는 것만이 아니라 儒者를 정치의 주체로 하는 유교국가체제의 역사적 출범을 가져왔다. 물론 유교이념이 經世的 기능을 수행하게 된 역사적 전통은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나, 조선조의 경우는 그것이 군신관계를 규율하는 한정된 기능뿐 아니라 사회질서 전반을 포괄하는 체제이념으로서의 기능을 갖게 된 것이다.
1) 유교정치이념의 기본구조와 그 이데올로기적 성격
유교정치이념의 지향은 [禮記]에서 제시된 大同社會 -다스리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지는 無爲而治의 사회- 라는 이상향 건설에 있다. 그러나 대동사회는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어려우므로, [예기]는 실현가능한 사회로서 '대동'에 버금가는 小康社會 -정치주체의 인위적 노력(修己治人의 行道에 의한 德治,禮治의 실천)에 의한 사회- 를 목표로 설정한다. 그러므로 현실적 사회상은 德治, 禮治라는 有爲而治의 결과로 조성되는 夏,殷,周 삼대의 사회상을 복원시키는 것이다.
孔孟이 추구했던 이상적 사회상은 중앙집권적 사회가 아닌 분권적 사회였고, 그런 사회를 존속 유지시키는 수단은 법치주의적 군사력, 刑政手段과 같은 물리적 강제력이 아니라 信義나 禮와 같은 씨족사회 연원의 공동사회적 자율규제수단에 기초를 두는 것이었다. 이는 덕치, 예치에 의한 왕도정치의 전개로 대동사회에 근접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利慾의 추구가 보편적 관심사가 되고, 중앙집권적 형태의 사회구조에서는 법치가 더 효과적이고, 덕과 예에 의한 정치는 근본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덕과 예가 사회유지의 규범이 되기 위해서는 이에 상응하는 '문화적 배경'이 필요하다. 그들이 기대하는 이상은 이런 문화적 배경의 복원이며, 이를 전제로 전제로 할 때에만 유교의 가르침은 실현가능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왕도정치의 이상은 유교정치의 목표인 동시에 유교 가르침이 의미있기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2) 유교정치이념의 조선조적 적용양상과 그 구체적 함의
조선시대 주자학은 체제이념으로서의 성격을 초기부터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정도전은 [朝鮮徑國典]에서 맹자의 民重君輕說에 입각해 정치체제가 民本과 덕치의 기본원칙하에 운영되어야 함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념적 지향이 구체적으로 적용될때 현격한 경세론의 차이를 보였다. 고려말 사회개혁에 있어서의 강경론과 온건론, 새왕조 개창문제에 있어서는 혁명론과 강상론, 그리고 왕조 개창 이후에는 참여적 훈구파와 재야 사림파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대립에 있어서 전자는 명분상으로는 왕도정치를 표방하지만 현실의 체제운영상 관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선호하며, 필요한 경우에는 刑政手段을 전면에 내세우는 패도정치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반면 후자는 도학 이념의 순수성을 견지하는 사림 중심의 분권체제를 선호하여 예치, 덕치라는 문화적, 정신적 교화에 역점을 두는 경세론적 입장으로 맞섰다. 신유학의 의리론적 도통을 보다 강조한는 재야 사림세력은 그만큼 성리학적 公道論에 충실한 도학정치를 강조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歐陽脩, 朱子의 朋黨論에 의거 자신들을 '군자의 당'으로 자처하고 權貴的 경향의 훈구파를 '소인의 당'으로 규정하면서 그들의 비리, 非道를 공격하는 비판세력이 되었고, 4대 士禍의 파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수난을 통해 사림파의 저변은 더욱 확대되었고, 의리론적 전통의 계승을 통해 도덕적 우위까지 점하게 되었다. 결국 세종, 성종, 중종대의 사림등용정책을 계기로 三司 등 중앙정계에 진출하였고, 한편으로 小學 진흥운동과 향약 보급운동 등을 통해 도학이념의 사회적 저변확대에 진력함으로써, 조선조 유교정치체제의 운영을 전담하는 주도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사림세력이 추구하는 이념적 지향은 唐虞三代의 사회상을 지칭하는 대동사회 또는 소강사회를 목표로 하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전이문화로서 이른바 '崇道的 正人心 法聖賢 興至治'로 집약되는 도학정치 추구였다. 퇴계와 율곡이 [聖學十圖]와 [聖學輯要]를 저술하여 왕을 비롯한 정치주체들에게 治道의 방략을 체계화해서 제시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도학정치의 실천이데올로기적 지향을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도학정치의 이념적 지향은 공자의 天命사상과 맹자의 重民사상에 바탕을 둔 天人合一說에 의거 唐虞三代의 至治를 실현하는데 있다.
퇴계와 율곡은 영남, 기호 양대 사림의 이념적 지향을 대표하고 있었다. 內聖外王의 도학정치를 통해 唐虞三代의 이상사회를 실현한다는 목표는 동일했지만, 그들은 실천논리상의 강조점에 있어서 대조를 이뤘다.
퇴계는 정치주체의 修身을 보다 강조하는 主靜的이며 내성적인 성향을 가졌다. 그는 도의 인식근거가 인간 심성속에 있으며, 이의 실천은 敬에 의해 가능하다고 했다. 따라서 현실의 治平 문제도 심성의 내면적 개발을 통한 도덕성 회복의 차원에서 해결하는데 주지를 두었던 것이다. 정치주체에 있어서도 내면적 심성계발이라는 수기적 측면에 비중을 두고 그것의 사회적 확산을 뜻하는 교화에 역점을 두었다.
반면 율곡은 정치주체의 수신과 더불어 治人을 아울러 강조하는 객관적이며 상황주의적인 견지에서 治國澤民의 실천적 경향을 보였다. 그는 개인적 차원의 심성계발과 더불어 제도, 환경적 차원의 여건 조성이 중요함을 역설했고, 이는'恒心'과 '恒産'을 아울러 강조한 맹자의 왕도정치론을 계승한 것이다.
3. 조선조 유교정치문화의 규범체계와 그 현실적 기능
주자학의 기본양식은 철학적으로 성리학이며, 性命論과 義理論으로 대별되는 독특한 이념구성을 갖는다. 의리론은 현실문제와 관련한 유교적 가치규범의 실천적 지향을 체계화한 것이고, 성명론은 의리론의 근거를 밝히는 방법론 내지 인식론이다. 이 주자학의 도학이념 구현 방향은 철학적 근거를 밝히는 성리학의 탐구와, 실천적 행동양식으로서 예학의 해명 두 가지이다. 조선조에서는 이 두가지 양식이 모두 정치의 현실속에서 제시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영남학파로 대표되는 정치주체의 입장에서는 [四端]의 초월적 근거를 강조하는 인식론적 바탕 위에서 [敬]을 통한 내면적 수양을 중시하여 정치현실로부터 이탈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게 되었고, 이에 비해 [七情]의 현실성을 강조하는 기호학파 입장에서는 [誠]의 개념을 근거로 이상의 현실화를 추구하는 경향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 분화된 입장이 이념적 교조로 정착됨에 따라서 자신의 순수한 입장을 고수하려는 정통주의로 강화되어갔다.
또한 의리론이 禮學으로 전개되었을 경우에도 禮의 형식규범이 의리에 따라 설정되면 확고한 옹호적 태도가 확립되어 비타협적이고 폐쇄적인 대립이 심화되었다. 17세기 이른바 禮訟 논쟁 같은 격렬한 당쟁은 의리론의 정통성과 순정성을 추구하는 도학정치문화의 소산이었다.
이처럼 조선시대 도학을 숭상하던 정치주체들은 고도로 체계화된 이론적 준거에 의거해서 거기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므로, 도학의 전통이 사회이념, 정치질서의 근간으로 확립된 16세기 말 이후에 있어서는 체제운영의 실제적 국면이 전적으로 도학적 준거에 따라 규정되는 특징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1) 성리학의 심화에 따른 인식론적 입장의 분화양상과 그 현실적 함의
의리의 실천궁행을 강조하는 사림이 현실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함에 따라 주자학의 도학적 측면이 강조되고 그 도학정신에 따른 至治主義的 지향이 정치문화의 근간을 이루었다. 따라서 이후 체제운영의 실제적 양상은 정치주체들이 견지한 성리학의 인식론적 입장에 따라 근본적으로 달리 규정되었다. 이러한 철학상의 차이가 정치관의 차이로 나타남을 뚜렷이 보여주는 사례는, 16세기 이후 정치주체들간에 主理, 主氣의 인식론적 분화양상이 제기되고, 그러한 차이가 그대로 세계관, 정치관의 차이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주리론적 입장에서는 정치주체들의 내면적 도덕성을 강조하는 바탕 위에서 수기의 실천에 역점을 두었고, 주기론은 객관적 상황주의의 가치정향을 바탕으로 수기와 더불어 치인을 강조했다.
이중 사림의 철학 안에서 주리설이 정통시됨에 따라 객관적 상황을 중시하는 입장이 응분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는 17-18세기 대두된 실학체계가 별다른 실효를 거둘수 없게 만든 배경이 되었다. 상황주의적 인식론의 바탕 위에서 현실문제에 대처하려는 經世致用學派의 제도개혁론이나 利用厚生學派의 상공업진흥론이란 한낱 사상적 요소로서만 잔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 의리정신의 고양에 따른 명분론적 비판의식성향의 심화의 그 현실적 함의
려말선초 革命論과 綱常論의 쟁점은 의리에 대한 적합성 여부를 문제삼는 것이었고, 세조와 사육신의 갈등도 의리를 기준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의리와 이익을 엄격히 구별하는 義理之辨과 그것을 인격적 양상에 적용하는 君子小人之辨의 전제하에 전자를 숭앙하고 후자를 천시하는 가치정향도 이러한 의리론의 소산이었다.
강상론적 의리의 편에서 혁명의 정당성을 부인한 이들은 재야의 신진사류에 계승되어 세조의 찬위행위나 집권층인 훈구세력들의 權貴的 비행을 비판, 저항하는 무기로 원용되면서 在野士林이라는 이념집단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특히 훈구세력과의 갈등은 사림세력의 이상주의적 의리정신을 더욱 고양시키는 정치문화적 유산을 남기게 되었다. 숱한 士禍를 통한 희생을 통해 의리의 이념적 정당성은 언제나 사림세력에게 있었고, 이를 통해 의리정신이 더욱 심화되었으며, 결국 16세기 후반 선조대에 이르러 사림집단의 [사림정치]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림정치의 개막과 더불어 사람의 정치주체들간에는 정치권력을 매개로 한 의리의 실천 문제를 둘러싸고 다시 분화,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의리의 이념적 순수성을 지키면서 권력집단을 비판하는데 정치참여의 역점을 두는 입장과 권력을 통해 도학정치이념을 직접 실현하려는 입장으로 대별되는 朋黨政治의 개막이 그것이다. 17세기 말 숙종대를 고비로 붕당정치의 과정에서는 상이한 입장의 정치주체들간에 의리론을 명분으로 지킬 수 있었지만, 그후에 있어서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집착한 '自作義理' 현상의 만연으로 의리론의 객관적 기준이 무너지면서 붕당정치의 생리적 기능이 마비되는 현상을 보였다.
또한 의리론은 현실문제에서 여러 양상을 나타내는데, 그중 국제관계상의 신의를 지칭하는 이른바 [大義]가 가장 중시되었다. 그것은 객관적 상황인식을 넘어서 대의를 지키려는 의리정신의 추구이며, 이는 병자호란시 斥和派, 조선조 말기의 斥邪衛正論으로 명맥이 이어져 국난기의 시대정신으로 고양되었다. 이는 객관적 상황인식과 실리추구의 관점을 간과한 것이긴 했지만 정당한 국가와 정치질서를 창출하려는 도통의식이 작용된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주체들이 명분적 의리에만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결과적으로 實事求是의 경세론이 전개될수 있는 소지를 원천적으로 차단시키는 폐단을 가져오게 되었다. 의리론적 명분의식은 정치사회질서를 도덕적으로 건전하게 하는데 기여한 이면에 정치사회적 긴장과 분열을 격화시키는 역기능적 작용을 하게 된 점도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포용적 가치규범으로서의 仁과 분별적 가치규범으로서의 義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는 맹자의 근본정신에 비추어보더라도 분별과 斥邪에만 편중되는 정치문화적 폐단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3) 禮崇的 풍토의 만연에 따른 명분론적 형식주의 의식성향의 고착화와 그 현실적 함의
조선시대의 禮學과 禮訟이란 단순한 학술상의 공리공론이 아닌 실천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도학이념을 구체적 상황과 현실문제에 적용하여 객관화시킨 문제였다.
유교질서는 禮樂 질서라고도 하는데, 禮는 인식원리가 아니라 실천적 행위규범으로서 인륜관계와 사회정치적 관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역할규범으로서의 기능을 갖는다. 그런데 도학정치에서는 그 질서가 '명분을 가진 질서'여야 하므로 그것은 당연히 인간의 당위적 행동절차로서의 예법과 연관될 필요가 있으며, 따라서 예법은 구체적 상호관계속의 처지 곧 분수에 걸맞는 행위규범으로 객관화, 형식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삼강오륜으로 집약된 일반적 규범체계란 어디까지나 유교적 가치질서의 기본적인 것을 체계화해놓은 것일뿐, 그것만으로는 잡다한 상충적 요소들이 혼재하는 현실세계를 규준하는 능동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갈등양상이 나타날 때 어떠한 예론상의 입장을 취할 것인가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服制 문제를 둘러싼 17세기 후반의 禮訟이나, 老論, 少論 분당의 원인이 된 송시열-윤증 간의 정치적 갈등관계도 따지고 보면 모두가 예론상의 입장 차이와 그 적용상의 우선적 비중문제와 연관된 갈등이었다.
禮崇的 풍토는 당시의 정치문화가 도학적 의리론, 예론의 엄격성과 배타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 반증한다. 그러나 명목적 예론의 형식주의에 과도하게 집착함으로써, 실사구시의 가치정향과 절충적이고 포용적인 의식성향이 사회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여지를 봉쇄하는 정치문화적 경화현상을 나타냈다.
4. 조선조 유교정치문화의 역할구조와 그 정치사회적 기능
조선 유교정치의 기본 지향은 왕도정치에 있으므로, 모든 정치행위가 군왕에서 시작되고 군왕으로 귀결되는 왕조시대정치의 기본적 범주안에서 정치과정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修己治人이라는 정치주체의 역할 역시 기본적으로 군왕의 역할에 초점이 주어졌다. 도학정치에서는 정치주체의 역할이 도학적 사유체계와 규범체계에 의거하여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므로, 도학적 사유능력에 바탕을 둔 수기치인의 자세확립이 정치주체의 자격조건으로서 강조된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세습된' 군왕에게서 이러한 선결조건의 충족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으므로, 도학적 사유능력을 '직업적'으로 체득하는 사대부 계층의 보필이 전제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君道와 臣道로 대별되는 도학정치의 役割分限 관계를 형성했다.
조선조 초기 정치과정에서는 역성혁명 주도자들이 중앙집권적 관료정치를 선호하게 됨에 따라, 정치주체의 역할수행이 관료제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기본적 전제하에 군신간의 역할분한문제를 생각했다. 그러나 중앙관료들 사이에 정파형성의 기미가 나타나게 된 15세기말부터는, 관료제로부터 정파정치의 형태로 전환되는 과도기적 양상을 나타내다가, 4대 사화와 같은 격돌과정을 거쳐 붕당정치가 대두하게 된 16세기 후반 이후에는 君臣公治主義라는 도학적 정치과정을 전제로 하는 정치주체의 역할분한문제가 현실정치의 초점으로 부각되는 기본적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이러한 전환에는 君子有朋論을 골자로 하는 구양수, 주자의 朋黨論이 이념적 지표로 중요하게 원용되었다.
1) 유교정치의 기본적 역할구조와 君臣간의 役割分限
유교의 기본 기능은 당초부터 국가의 정사와 관련된 것이었다. 유교가 지향하는 이상적 인간상은 내성외왕의 치인상, 곧 높은 인격적 수련을 바탕으로 왕도정치를 전개하는 정치주체로서의 자질을 갖추는 것이다. 이 정치주체의 역할은 천명사상에 바탕을 둔 천인합일설로 집약되는데, 주목할 것은 治權在天의 연원적 해석에 天과 民을 동일의미적 존재로 간주하는 天民一致觀을 설정함으로써 天命에 상응하는 重民의식을 강조한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유교정치에서는 치권재천의 중민의식을 바탕으로 천도의 구현을 생각하며, 그 당위적 방법론으로 星君賢相적 덕치주의를 강조했다.
덕치주의란 백성을 교화하는 것이며, 교화의 기본적인 방법은 禮樂刑政의 네 가지인데, 앞의 둘은 도덕적 문화적 교화이고 뒤의 둘은 법률적 행정적 교화이다. 유교정치의 이념적 지향에서 보면 형과 정은 덜 바람직스러운 현상이며 따라서 형정수단을 앞세우는 법치주의보다 예악수단에 의한 예치, 덕치주의를 선호하는 전통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덕치의 전개는 군자의 개별적인 역량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현실정치적 관점에서 군왕 자신의 尊賢意識과 儒者의 出仕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른바 勞心者로서의 治人적 역할의 중요성이 강조된 것이다.
2) 조선조 도학정치에서의 특징적 역할구조와 기제
정도전 등의 儒者들은 군왕의 위상과 역할을 治權在天의 重民意識을 바탕으로 하는 덕치주의와 관련하여 규정하며, 인정의 정치를 강조하여 민본과 덕치를 체와 용으로 하는 유교정치의 이념적 지향을 그대로 계승했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우는 군왕론의 立論이 '人心'과 '하늘의 뜻' 이외에 다른 초월적 권위를 설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역성혁명의 주도자들은 당초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기본적 운영방안으로 설정하고 있었고, 거기에는 체제운영을 군왕과 臣僚과 함께 담당한다는 君臣公治主義의 지향이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향이 구현되기 위해서는 도학적 이념집단의 정치적 성장이 불가피한 전제로서 요구되며, 따라서 사림세력이 성장하여 현실정치의 주도세력으로서 부상하게 된 16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군신공치주의가 체제운영의 기본적 지향으로서 정착을 보게 되었다.
군신공치주의의 이념적 지향은 통치행위의 근원으로서의 천도, 천리의 탐구를 군왕과 신료가 함께 추구하는 것을 기본 전제로 했으며, 民意와 公道에 바탕을 둔 도학정치의 전개를 기본 전제로 했다. 따라서 정치주체의 기본적 자질로서 도학적 사유능력에 바탕을 둔 수기치인의 자세확립이 요구되며, 그러한 자세를 직업적으로 수련한 신료들의 정치적 참여를 광범위하게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련에서 유자들의 집단적 정치참여를 인정하는 붕당제도는 중요한 정치적 기제로서 기능했다. 이런 맥락에서 公道 실현을 추구하는 眞朋集團이라면 군왕도 그 당에 속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歐陽脩, 朱子의 새로운 朋黨觀은 군신공치주의의 이념적 지향을 대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념적 지향과 정치적 기제는 현실적으로 사림계 臣僚의 역할을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는 군왕에 대한 신료의 맹목적 충성이 아니라, 도학적 의리규범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따라 선택적으로 설정되는 상호관계적 성격의 관계로 인식하게 되었다.
조선조 초기에는 사대부들이 군왕의 부름을 물리칠수 없었지만 16세기에 이르러서는 군왕의 부름이 있더라도 그의 처사가 도학적 의리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나아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처럼 조선 도학정치는 군왕이 최종적인 정치주체라는 왕조시대 정치의 기본적 인식은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체제운영의 현실적 국면에 따라서 사림계 신료의 상대적 역할이 크게 부각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이들이 도학이념집단으로서 수행하는 公論형성 기능은 도학정치의 성패를 좌우하는 역할기제로서 이후 정치과정을 규정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3) 조선조 사림집단의 붕당정치 운용양상과 그 정치사회적 기능
공론 형성 기능의 중요성은 그 수행 방법론을 놓고 사림세력들간의 분화, 대립의 파당양상을 나타내게 되었고, 그것이 심화되는 경우 정치적 쟁패현상을 나타내게 되었다. 붕당정치는 사림세력이 권력층의 私利추구와 權貴的 성향을 견제하고, 민의와 공도에 바탕을 둔 도학정치 실현을 위해 도학의 공인된 체제운영방식으로 태동된 것이었고, 여기에서 사림세력들은 도학이념집단을 자처하면서 자신들의 집단의사인 '당론'을 매개로 정치과정을 주도하려고 했다. 이러한 주도권 경쟁이 심화된 선조대 이후 붕당간의 쟁패양상은, 표면적으로는 의리론, 예론과 같은 도학적 규범을 준거삼아 명분을 독점화하려는 경향을 나타냈지만, 실제의 내면상으로는 銓曹의 郎官 인선문제를 둘러싼 인사권 장악이나 三司 언관을 매개로 한 언로 장악이 핵심적인 초점이었다.
인사권 장악문제의 경우 銓曹(史曹)의 낭관직이 중시되었는데, 정랑과 좌랑으로 대별되는 낭관직은 문무관원을 銓衡하는 요직으로서 내외직 임용거부권이나 三司 언권에 대한 인사권까지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붕당간에 낭관직을 장악하는 문제는 자파의 세력 확대를 위한 초미의 관심사였다.
한편 三司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세 기관은 史草의 기록을 담당하는 춘추관과 더불어 유교정치체제의 言路를 총괄하는 제도적 기제였다. 그러므로 삼사는 사림세력이 공론정치를 전개하는 핵심적인 기제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언관 활동을 자파의 수중에 장악하는 문제는 곧 공론정치기제의 독점과 직결된 것이었다.
5. 결론
16세기 중반 이후 조선조 유교정치체제의 특징적 운영방식은 사림세력이 주도하는 붕당정치였다. 도학이념집단을 자처하는 사림세력이 당론을 매개로 집단적으로 현실정치에 참여하여 군왕을 능가하는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하는 방향으로 체제가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현상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최근에 긍정적 시각으로 조선조 정치사를 재조명하려는 시도들이 있긴 하지만 그 구체적 논거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붕당정치라는 도학정치의 운영방식은 그 자체로서는 긍정, 부정의 어느 한 고정적 시각에서 평가될 성격이 아니다.그 실제적 운용 양상에 따라서 순기능과 역기능이 함께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이점에서 정치주체들의 지배적 가치정향으로서 정치문화가 구체적인 공과를 규정하는 핵심적 요소가 되는 것이다. 도학사상 역시 그것을 수용하여 구체적 현실에 반영하는 행위주체로서 정치주체들이 체득하는 가치정향이 얼마나 체계적이고 균형잡힌 것이냐에 따라 순기능과 역기능의 구체적 양상이 규정되는 것이다.
보론: 신채호의 유교 비판 글 요약
1. 유교확장에 대한 론
이미 사람들의 인정이나 풍속, 관습에 유교가 뿌리깊게 퍼져있는 상황에서 유교의 확장을 도모하는 것이 제도, 조직의 차원에서 추구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유교확장의 도는 유교의 진리를 확장하는 것이어여 한다. 매국행위를 하면서 유교의 외적 확장을 외치는 유자들은 사회의 적이며 동시에 유교의 적이기도 한 것이다. 진정한 유교의 확장은 허위를 버리고 실제적인 학문을 애쓰며, 소강을 버리고 대동을 애쓰는 것이어야 한다.
2. 경고 유림동포
시대를 이끌었던 유교사상이 정체하자 국가도 정체하고 말았다. 본래 유교는 새로움에 대해 개방적이어서, 일찍이 공자도 노자에게 禮를 묻고 순자에게 樂을 물었고, 도가 다른 이단에게도 묻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는데, 지금의 유자들은 새로운 학문, 새로운 이론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반대하고 있다.
이러한 오류에 빠져 있긴 하지만, 한국 부흥의 여부는 여전히 유림에 존재한다. 유자가 나서야 부패한 사회가 개혁되며, 백성이 깨어 외칠 것이며, 문명 학문도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유자는 산림에서 나오지 않고, 나오더라도 時勢를 오해하며, 사회에 나타나는 자는 거짓 유자들 뿐이다. [일진회] 회원, [대동학회]회원으로 일본에 굴복하는 자들운 유교의 커다란 수치이다. 이제 유자들은 깨어야 한다. 회두해야 한다. 유자들이 시세를 바르게 알고 고등 지식을 통해 깨닫지 않으면 외세에 멸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종교를 지키려면 국가를 위해, 동포와 자손을 위해 회두해야 하며, 이는 결과적으로 종교를 위해 회두하는 것이다.
3. 유교계에 관한 일론
한국은 유교국이었으므로 국가 쇠약의 원인을 유교라고 볼수 있을것인가. 그렇지 않다. 유교를 신앙해서 쇠약해진 것이 아니라, 유교의 신앙이 그 도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쇠약해진 것이다. 유교 자체가 망국의 원인이 아니다. 유자들이 입으로는 孔孟과 顔曾을 말하나 그 뇌수에는 부귀만을 바라고, 외면으로는 인의예지를 말하나 그 속은 명예를 탐낼뿐이다. 진정한 정신은 계승하지 않고 형식과 문자와 외형만을 계승하고 있다. 이러한 이들은 유교를 崇奉함이 아니라 유교를 반대하는 것이다. 이제 유교는 지금이라도 진리를 발휘하여 실천적으로 새로운 것을 취하고, 활동하고, 국민 지식을 진흥시켜야 한다.
4. 국가는 즉 일가족
한국이 몇 백년 동안 밖으로 경쟁이 없어 국가적 관념이 희박해졌다. 그래서 황실을 국가로 믿기도 하고, 정부를 국가로 믿기도 한다. 그래서 국가에 대한 책임은 군주나 관료들에게 있고 일반 백성에게는 상관할 바가 없는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서양속담에 "국가는 가족 두 글자의 큰 글씨다"라는 말로서 그러한 오해를 타파하고자 한다. 시조 단군이 이 나라를 개창한 후 삼천리 강토에 사는 이천만 동포이니 국가와 집이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5. 타파 가족적 관념
국가적 난국에 처하여 자기 일족의 안보만 구하는 가족이기주의적 발상과 행동이 횡행하고 있다. 국가의 개념, 민족의 관점 없이 자기 가문의 안보만 도모하고, 수백여 성씨로 나뉘어 수백여 마을을 만들고, 이천만을 흩어 이천만을 만드니 국민적 단결을 어찌 얻을수 있을 것인가. 각 문중이 학교를 만들고 하는 것도 실은 가문의 자손을 위한 교육에 급급한 실정이다. 이제 소가족 관념을 버리고 대가족(국가) 관념을 만들어야 한다.
6. 논충신
한 왕. 한 황실을 위해 죽는 자를 충신이라 하는 사상은 협소한 것이다. 그러한 충신은 가짜 충신, 작은 충신이다. 진정한 충신, 큰 충신은 가슴에 국가만이 있고, 눈에는 국민만이 있는 자다. 나라를 위해 살고 나라를 위해 죽은 연후에야 충신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폭력적인 왕, 음란한 왕, 혼미한 왕을 위해 죽은자도 충신이라 하는 풍조속에 개나 말같은 충신이 나라에 가득하니, 충신이 많으나 이익될 것이 없다. 맹자는 [民爲重社稷次之君爲輕]이라 하였다. 군은 군주요, 사직은 황실이며, 민은 국가이니, 국가를 위하는 충신이 가장 크고 진정한 충신인 것이다.
단상 - 전적인 긍정과 전적인 부정을 넘어
한 시대의 주도이념은 그 시대의 종말과 더불어 맹렬한 공격을 받게 된다. 왕조 패망에 이은 일제 식민통치 과정에서 유교는 '유교망국론'의 불명예스러운 평가를 받게 되었고, 식민사관 극복의 추구에도 여전히 정치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는 원죄성을 벗어버리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오백년 역사를 단일한 時點으로 환원하는 무시간적 이해와, 장·단점을 구분하지 않는 접근자세는 유교의 공과를 밝힐 수 없다. 유교는 무엇보다 '역사'이다. 조선시대 600년 안에도 많은 부침과 변화가 있었다. 그 자신 성균관 박사출신이기도 했던 유자 신채호가 비판하고자 했던 유교도 '역사적 유교'였으며, 그것은 유교의 본지(忠君愛國, 救世行道)를 상실하고 이욕에 빠진 유자들이 지배하는 '타락한 유교'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신채호의 유교비판은 '진정한 유교'를 위한 立論이라고 볼수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 유교정치문화 안에는 우리가 새롭게 하여 계승하여야 할 정치적 덕목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낡은 이데올로기가 병존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얻어진 결론은, 우선 조선조 유교정치문화는 ① 도학이념(종교적 지향)의 세계내적 실현을 위한 유교 지식인들의 열정과 참여, ② 정치주체로서 유자들이 겸비한 높은 도덕성, ③ 공론 형성을 통한 정치실현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점을 가진다는 것이다. 반면 사림정치시대의 심화 이후에 주로 나타난 부정적 성향들로 ① 명분적 의리, 예론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빚은 형식주의, ② 객관적 사상 투쟁보다는 가문, 학통에 치중하는 세력다툼 ③ 새로움에 대한 비개방성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조선시대 유교정치문화의 양면성은 유교 전체를 향한 전적인 긍정과 전적인 부정을 부적절하게 만든다.
이상의 평가에 덧붙여 지식인의 사회참여라는 측면을 중요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세계종교사, 정치사에 있어 조선시대만큼 정치주체들이 종교적 이념을 정치공간에서 철저히 실현시킨 사례는 희박할 것이다.
그점에서 지식인들의 사회참여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 참여가 '기능적 참여'만이 아니라 '자기수양을 전제로 한' 진출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전형성을 획득한다. 오늘날 지식인은 기술만 있고 정신이 없거나, 이론만 있고 실천이 없거나, 권력에 좌지우지되는 유약성을 보이고 있다. 이런 지식인의 모습이 잔존하는 한 대동사회도, 소강사회도 불가능하다. 도의 실현이라는 종교적 비전을 가지고 현실정치에 주체로서 참여했던 조선조 유교 지식인들의 역사적 경험은, 새로운 문명을 준비하해야 하는 오늘날의 종교적 지식인들에게 강한 영감을 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유교의 쟁점, (1999.3.31), 지도교수: 김승혜, 발표자: 정경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