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와 페미니즘 - 대화인가 투쟁인가?"
PAO Chia-Lin, "음양사상과 여성의 지위"
이숙인, "'차이' 해석의 유교적 특성"
이은선, "유교와 페미니즘, 그 관계 맺음의 해석학"
대부분의 문명사회는 남성중심적 사회를 강화해온 방향으로 변화되어 왔다. 그것을 지속해 온 남성들의 지배 전략은 힘 뿐 만이 아니라 정교한 이데올로기 구축과 그 심화를 수반해왔다. 그러므로 여성해방은 그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드러내 새로운 인간관계-평등-을 재건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교와 페미니즘은 대화의 요청보다는 '폭로'와 '반성'의 차원을 먼저 요청하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대화의 한 주체인 유교는 아직 성 차별의 긴 역사를 철저히 반성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텍스트로 정한 세 논문의 공통점은 유교의 근본 입장은 성 차별을 정당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출발한다.
PAO Chia-Lin은 원래 동등했던 음양사상이 일시적으로 편향되어 여성차별로 나타났지만, 그 원래 사상을 회복함으로써 평등의 비전을 갖게 된다고 제시했다. 이숙인은 우선 세계 구성의 적극적 계기로서의 성차를 인정하는 '논리'와 남녀의 엄격한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현실'의 괴리를 제기한다. 차이는 창조적 행위의 필수적 전제이지 차별을 지향한 것은 아니지만, 즉 생성에 참여하는 남성/여성의 우열은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사회화 과정에서 차별을 정당화하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한국 여성학을 민족적 전통과 대면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이은선은 보다 적극적이다. 저자는 원시유교, 혹은 유교의 근본 이상의 수용을 넘어 역사속의 현실 유교마저도 긍정한다. 즉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 개념을 빌어 가부장주의 시기의 '원리적 메시지'를 긍정하는데, 그것은 구별과 나눔, 질서와 조화를 통한 선한 공동체의 형성 노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현실 유교 문화권에서 왜 그토록 가혹한 차별이, 이숙인의 지적처럼, 여성을 '자살'의 절박한 상황으로 내모는 반생명적 현실이 파생한 것인가? 이에 대해 세 학자 모두 역사적 왜곡, 즉 사회화 과정의 불평등이라는 맥락을 제시한다. 여기서 작동한 억압기제는 禮이다. 비록 이은선은 예가 억압적이지만은 않았다고 해석하지만, 유교적 예제의 발달에 따라 남녀의 우열이 정해지고 그것이 누적되어 성차별을 구조화했다는 것이 일반적 입장이다.
이런 입장에 대한 논자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첫째, 인정과 비판이 병진해야 한다.
근본 '이상'과 역사적 '현실'을 구분하여 논의를 전개하는 이런 입장은 대화를 원활하게 하는 전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또한 유교가 현실 역사 속에서 자기내적 개혁을 이룬다면 여전히 의미있는 종교, 혹은 사상으로서 역할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 전통에서 남녀의 역할 구분과 조화의 긍정적 의미를 찾아가는 노력은 유의미하다. 여성억압의 반대가 남성억압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노력이 억압의 근본 기제를 변혁하지 못하는 위험성이 있지는 않은가? 이은선의 경우 조선 시대 여성의 '권위'를 주장하는 장병인의 글을 인용하는데 논자가 보기에 그것은 매우 위험한 논리이다. 조선시대 여성의 권위는 결국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그대로 지속시키는데 헌신적으로 '협력하는' 여성상이기 때문이다. 이숙인이 주장한 것처럼, "어머니가 누릴 수 있는 권위는 여성 일반이 겪는 구조적 모순을 강화하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유교의 근본사상을 긍정하기 위한 의도가 특수한 사례의 과도한 일반화로 전체적인 역사 맥락을 이탈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논평자인 고정갑희의 주장처럼 대화 이전의 갈등의 현장을 먼저 직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정'이라고 하는 부분이 근본적 '비판'과 병진하지 않으면 의미를 갖기 힘들 것이다. 유교의 이상적 측면을 강조하는 '인정' 담론은 유교 내부의 개방적 남성들도 충분히 하고 있는 연구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들의 역할은 그들이 자각하지 못하는 한계성을 철저히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이상'에 결함은 없는가?
이숙인은 "훌륭한 이론이 때로는 구조적 모순과 암묵적으로 결탁하거나 부조리를 암암리에 은폐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그 이론에는 근본적 결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인가? 논평자인 고정갑희는 "이미 성차별이 존재하는 현실이 있기 때문에 차이를 주장하는 유교이론이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근본 사상에 대한 심각한 문제제기를 "이상은 좋았는데 현실은 나빴다." 라는 논리로 대해서는 안 된다. 이상이 좋았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한 사회,문화적 맥락이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사라진 맥락을 재건하는 정밀한 노력이다. 그것은 향후 한국 유교의 여성 주제에 있어서의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거시담론과 미시담론의 균형
이은선의 생명진화론적 법칙의 기대는 여성문제에 있어서 적절한가? 현대 성 차별의 심각성은 그것이 대단한 사상이나 이념으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구체적 개인의 일상생활속에 문화로 정착해 있는 것 때문이지 않은가? 그러므로 차별의 극복은 실천의 구체적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주론적, 진화론적 차원이 성, 계급, 종교갈등을 예기치 못한 차원에서 치유된다는 기대"는 자칫 현실 조건을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할 수 있다. 결국 모든 인간이 '군자'가 되고 '성인'이 되면 이 세상의 모든 불평등과 부정의가 극복된다는 거시담론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 뿐이다. 문제는 그 이상만으로 현실의 절박한 여성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유교의 근본 이상이 현실에서는 왜곡되었다는 성차별의 역사적 기원이 그것을 반증하고 있다. 물론 대동의 이상을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위해 현실에서 수행해야할 구체적, 미시적 평등의 실현을 위한 저항의 희석화를 경계하자는 것이다. 이은선이 인용한 맥훼이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학은 어디까지나 이 세상의 일이다. 즉 신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터전인 땅 위에서 올바르고 합당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S. 맥훼이그, "지구신학의 과제", [세계의 신학], 1995 가을, pp.229-230) 맥훼이그는 또한 여성신학자의 방법론은 '퀼트'(quilt) 메타포로서, 우리들 각자는 전체에 대하여 아주 작은 부분만 기여할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 기여는 우주론적으로 일반화될 수 없다. 아직 차별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평등을 위한 저항이 기여이며, 평등이 정착된 곳에서는 불평등이 남아있는 곳과 연대하고 지원하는 것이 기여이기 때문이다.(2000. 5. 24)
PAO Chia-Lin, "음양사상과 여성의 지위"
이숙인, "'차이' 해석의 유교적 특성"
이은선, "유교와 페미니즘, 그 관계 맺음의 해석학"
대부분의 문명사회는 남성중심적 사회를 강화해온 방향으로 변화되어 왔다. 그것을 지속해 온 남성들의 지배 전략은 힘 뿐 만이 아니라 정교한 이데올로기 구축과 그 심화를 수반해왔다. 그러므로 여성해방은 그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드러내 새로운 인간관계-평등-을 재건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교와 페미니즘은 대화의 요청보다는 '폭로'와 '반성'의 차원을 먼저 요청하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대화의 한 주체인 유교는 아직 성 차별의 긴 역사를 철저히 반성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텍스트로 정한 세 논문의 공통점은 유교의 근본 입장은 성 차별을 정당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출발한다.
PAO Chia-Lin은 원래 동등했던 음양사상이 일시적으로 편향되어 여성차별로 나타났지만, 그 원래 사상을 회복함으로써 평등의 비전을 갖게 된다고 제시했다. 이숙인은 우선 세계 구성의 적극적 계기로서의 성차를 인정하는 '논리'와 남녀의 엄격한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현실'의 괴리를 제기한다. 차이는 창조적 행위의 필수적 전제이지 차별을 지향한 것은 아니지만, 즉 생성에 참여하는 남성/여성의 우열은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사회화 과정에서 차별을 정당화하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한국 여성학을 민족적 전통과 대면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이은선은 보다 적극적이다. 저자는 원시유교, 혹은 유교의 근본 이상의 수용을 넘어 역사속의 현실 유교마저도 긍정한다. 즉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 개념을 빌어 가부장주의 시기의 '원리적 메시지'를 긍정하는데, 그것은 구별과 나눔, 질서와 조화를 통한 선한 공동체의 형성 노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현실 유교 문화권에서 왜 그토록 가혹한 차별이, 이숙인의 지적처럼, 여성을 '자살'의 절박한 상황으로 내모는 반생명적 현실이 파생한 것인가? 이에 대해 세 학자 모두 역사적 왜곡, 즉 사회화 과정의 불평등이라는 맥락을 제시한다. 여기서 작동한 억압기제는 禮이다. 비록 이은선은 예가 억압적이지만은 않았다고 해석하지만, 유교적 예제의 발달에 따라 남녀의 우열이 정해지고 그것이 누적되어 성차별을 구조화했다는 것이 일반적 입장이다.
이런 입장에 대한 논자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첫째, 인정과 비판이 병진해야 한다.
근본 '이상'과 역사적 '현실'을 구분하여 논의를 전개하는 이런 입장은 대화를 원활하게 하는 전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또한 유교가 현실 역사 속에서 자기내적 개혁을 이룬다면 여전히 의미있는 종교, 혹은 사상으로서 역할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 전통에서 남녀의 역할 구분과 조화의 긍정적 의미를 찾아가는 노력은 유의미하다. 여성억압의 반대가 남성억압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노력이 억압의 근본 기제를 변혁하지 못하는 위험성이 있지는 않은가? 이은선의 경우 조선 시대 여성의 '권위'를 주장하는 장병인의 글을 인용하는데 논자가 보기에 그것은 매우 위험한 논리이다. 조선시대 여성의 권위는 결국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그대로 지속시키는데 헌신적으로 '협력하는' 여성상이기 때문이다. 이숙인이 주장한 것처럼, "어머니가 누릴 수 있는 권위는 여성 일반이 겪는 구조적 모순을 강화하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유교의 근본사상을 긍정하기 위한 의도가 특수한 사례의 과도한 일반화로 전체적인 역사 맥락을 이탈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논평자인 고정갑희의 주장처럼 대화 이전의 갈등의 현장을 먼저 직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정'이라고 하는 부분이 근본적 '비판'과 병진하지 않으면 의미를 갖기 힘들 것이다. 유교의 이상적 측면을 강조하는 '인정' 담론은 유교 내부의 개방적 남성들도 충분히 하고 있는 연구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들의 역할은 그들이 자각하지 못하는 한계성을 철저히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이상'에 결함은 없는가?
이숙인은 "훌륭한 이론이 때로는 구조적 모순과 암묵적으로 결탁하거나 부조리를 암암리에 은폐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그 이론에는 근본적 결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인가? 논평자인 고정갑희는 "이미 성차별이 존재하는 현실이 있기 때문에 차이를 주장하는 유교이론이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근본 사상에 대한 심각한 문제제기를 "이상은 좋았는데 현실은 나빴다." 라는 논리로 대해서는 안 된다. 이상이 좋았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한 사회,문화적 맥락이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사라진 맥락을 재건하는 정밀한 노력이다. 그것은 향후 한국 유교의 여성 주제에 있어서의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거시담론과 미시담론의 균형
이은선의 생명진화론적 법칙의 기대는 여성문제에 있어서 적절한가? 현대 성 차별의 심각성은 그것이 대단한 사상이나 이념으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구체적 개인의 일상생활속에 문화로 정착해 있는 것 때문이지 않은가? 그러므로 차별의 극복은 실천의 구체적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주론적, 진화론적 차원이 성, 계급, 종교갈등을 예기치 못한 차원에서 치유된다는 기대"는 자칫 현실 조건을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할 수 있다. 결국 모든 인간이 '군자'가 되고 '성인'이 되면 이 세상의 모든 불평등과 부정의가 극복된다는 거시담론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 뿐이다. 문제는 그 이상만으로 현실의 절박한 여성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유교의 근본 이상이 현실에서는 왜곡되었다는 성차별의 역사적 기원이 그것을 반증하고 있다. 물론 대동의 이상을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위해 현실에서 수행해야할 구체적, 미시적 평등의 실현을 위한 저항의 희석화를 경계하자는 것이다. 이은선이 인용한 맥훼이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학은 어디까지나 이 세상의 일이다. 즉 신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터전인 땅 위에서 올바르고 합당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S. 맥훼이그, "지구신학의 과제", [세계의 신학], 1995 가을, pp.229-230) 맥훼이그는 또한 여성신학자의 방법론은 '퀼트'(quilt) 메타포로서, 우리들 각자는 전체에 대하여 아주 작은 부분만 기여할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 기여는 우주론적으로 일반화될 수 없다. 아직 차별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평등을 위한 저항이 기여이며, 평등이 정착된 곳에서는 불평등이 남아있는 곳과 연대하고 지원하는 것이 기여이기 때문이다.(2000. 5. 24)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