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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와 그리스도교의 영성적 대화 모색"

작성자손님|작성시간06.04.14|조회수77 목록 댓글 0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영성적 대화 모색


김승혜, "공자의 인간관과 천명관"
송영배, "기독교와 유교의 상충과 대화의 모색-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의 분석을 중심으로"
정용두, "한국종교·윤리·문화 사상의 줄기", "퇴계와 바울사상의 윤리, 교육적 고찰"


"Compare"는 "함께", "같이"라는 'com'과 '동등', '표준', '기준'이라는 'par'의 합성어로, 비교하는 쌍방을 '동등하게 만들거나', 쌍방에게 '같은 기준이나 표준을 적용한다'라는 의미이다. (나성, "유교의 구원관", [이성과 신앙] 15호(1998,4), 수원가톨릭대학출판부, p.11) 이런 관점에 비추어볼 때, 종교 대화를 위한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비교에 적용할 '같은 기준'은 종교성, 다시 말해 영성의 차원이다. 만약 정용두의 논지처럼 윤리적 차원에 유교를 놓고, 종교적 차원에 그리스도교를 설정한다면 사실상 대화는 불가능하다. 유교는 종교간 대화의 파트너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 대화를 시도하려면, 설령 유교의 영성이 심각히 위축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재해석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미 400여년 전 마테오 리치에게서 '부분적으로' 견지된 이런 태도는 현대 그리스도인 유학자들에게서 발전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논자는 그것을 송영배 교수와 김승혜 교수의 논문을 통해서 확인해보고자 한다.

400년전의 대화 -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모델

마테오 리치는 우선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것은 원시유교의 天, 上帝 개념이 하느님과 동일한 존재를 밝히고 있다는 점, 그리스도교의 인간 윤리가 중국인들이 추구하는 윤리 이상인 仁과 義의 추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 등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유교문화와 융합하는 그리스도교의 토착화라는 측면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와 시사점을 남겼다.

그러나 리치는 유교의 근본 사상이 그리스도교 진리와 상충하는 것 또한 제시한다. 대표적으로 성리학의 무신론적 성격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즉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속성'인 理나 太極은 사물의 존재근거가 될 수 없으며, 단지 사물 밖에 있는 運動因에서 비롯된다. 이는 초월자의 목적에 따라서 합리적, 규칙적으로 우주가 움직인다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전제하는 것이다. 한편 인간관에 있어서도 본성적 善만을 강조하면 현실적 악행의 존재와 그것에 대한 제재의 효과적 방책을 세울 수 없음을 비판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과 성리학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우선 전통적인 유교는 우주만물을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생명력이 충만한 생명체로 본다. 즉 理는 무한한 생명 전개의 존재론적 원인으로서 형상인이면서 운동인, 목적인이다. 따라서 理는 개개 사물의 존재 근거로서 일종의 관념적 실재이다. 그러나 이 理는 천지만물에 내재해 있다는 것이 성리학의 특성이다. 다만 그것이 은폐되어 있어서 인간의 도덕적 의지와 실천 공부에 따라 천리가 복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存天理 滅人慾"의 이상은 이런 맥락이다.

저자는 리치가 심신이원론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반면 현세의 인생가치는 지나치게 경시했기 때문에 유교전통에 수용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리치의 유교 비판은 배타적 반감에 기초해있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즉 토미즘의 세례를 받은 리치는 자신의 신학적 성찰에 근거한 '논리적' 비판을 한 것이다. 이런 학문적 양심은 유교의 입장을 [천주실의]에 상당히 객관적으로 소개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이상의 분석을 통해 그리스도교와 유교의 새로운 대화 지평을 '양심'의 차원에서 전망한다. 유교의 하느님은 외재적 초월자가 아니라 개개 사물 속에 잠재해 있는 天理인데, 인간의 경우 '양심'이 그것이다. 유사하게 그리스도교 전통도 하느님의 존재 증명을 인간의 양심에서 찾았다. 그러므로 두 종교의 새로운 대화 지평은 인간의 양심의 소리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다시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리치의 [천주실의]는 400년 전의 출판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리스도교 중심적 인식에 기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대 그리스도교의 유교 연구에 의미를 주고 있다. 그것은 리치 자신이 중국의 종교와 문화에 대해 최소한 '포용주의적'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며, 중국인의 종교, 문화적 맥락을 부정하지 않는 것을 중요한 선교 전략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런 리치의 태도는 아직도 호전적 배타주의의 영향력을 벗어나고 있지 못한 한국의 그리스도교에 도전을 주는 한 모델일 수 있다.

오늘날의 대화 - 그리스도교가 배워야 할 유교의 영성

김승혜 교수는 유교의 영성을 심층적으로 접근해, 그것으로부터 그리스도교가 배워야 할 것을 제시한다. 이것은 유교의 종교성 인정을 전제하는 것이고, 그 핵심은 천인합일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 천인합일이 인본주의에만 머물지 않는 것은 존재론적 합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유교의 전통적 천인합일 사상은 어느 정도 천과 인의 구분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즉 하늘은 덕을 주는 존재이고, 인간은 그것을 받아 닦는 관계이다.

이러한 천인관계에서 발원한 유교의 영성은 '修己'와 '安人'의 차원에서 풍부하게 발현한다. 우선 '수기'의 주체인 군자는 적극적 수양인 '崇德'과 수동적 수양인 '知天命'을 겸비한 사람이다. 특히 지천명은 使命的 요소와 運命的 요소 모두를 함의하며, 이중 후자인 운명적 요소에 대한 자각이 天에 대한 감각을 내포한다. 공자가 道의 성패는 결국 천명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이 점에 대해 저자는 인간의 삶을 능동적 영역과 수동적 영역의 조화로 설명한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사상과 연결시킨다. 즉 양 측면의 조화를 통해 인간적 깊이를 이룰 수 있으며 하느님도 전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교에 도전을 주는 유교의 영성은 '安人'의 사회성이다. 유교에서 안인은 범위가 점점 넓어지는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그 사람이 덕이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가 속한 공동체를 편안하게 해주는지 여부이다. 군자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시작해 지역 공동체, 사회, 국가로 점차 그 단위를 확대시켜 나간다.

저자는 이러한 유교, 특히 공자의 天人觀과 사회영성을 어떻게 그리스도교 안에 수용할 수 있을까 모색한다. 그것을 위해 먼저 공자의 天 사상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는 天을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天과 절대 실재로서의 天 두 의미로 이해했다. 인격적이라는 것은 天이 주체성을 나타낼 때, 의지를 지니고 있을 때, 도덕성과 연결될 때, 관계성을 나타낼 때 해당한다. 동시에 天은 절대 실재 혹은 궁극적 원리로서의 면도 지닌다. 이 때의 天은 내재성을 지닌다. 이런 공자의 天 사상은 '일상적 삶'에 깊이 뿌리 박고 있는 신앙이라는 점, 사명의식이 뚜렷하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어쩔 수 없는 부분을 命으로 이해하면서 인간의 현실적인 한계를 받아들였다는 점, 나아가 하늘의 '말없음', 곧 '침묵'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에게 도전을 준다. 저자는 '말씀의 하느님'의 측면과 '무언의 하늘'의 측면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 때 하느님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가능해진다고 한다. 즉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을 자연의 움직임 속에서 전해오는 '말없는 말씀'을 들음으로서 깨닫고, 역사의 주님을 공자의 사회영성적 의미-정명, 균등, 사회적 믿음-의 수용속에서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유교의 도전은 그리스도교의 영성이 자기 자신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에만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이러한 저자의 연구는 종교대화의 중요한 모델을 제공한다. 그것은 우선 유교의 시각으로 유교의 종교성을 해석하고 복원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그것을 전제로 한 "Compare"속에서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자기갱신을 위한 시너지 효과가 창출한다는 것이다.

건너가 보기

대화를 위해서는 '판단중지'속에 '건너가 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서는 우선 한 종교의 완성을 불변의 사실로 고집한 채 다른 종교로부터는 부분적으로 이용 가능한 것(예를 들면 윤리)만을 선택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 종교의 개념에 맞춰서 이웃 종교를 자의적으로 재구성하지 않아야 한다. 진정한 대화는 진리의 차원에서 자유로이 넘나드는 것이다. 이 넘나듦은 각 종교의 정체성을 희석화하기보다는 오히려 각 종교의 창조적 성숙을 실현할 것이다. 왜냐하면 대화를 통해 자기 종교를 새롭게 할 영감을 이웃 종교로부터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과 유교인의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므로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에서 실천적 진전을 이룰 가능성이 매우 클 것이다.  (2000.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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