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에 대한 유교의 자기 반성과 현대적 접목 가능성"
이승환, "유가의 정의관", [유가사상의 사회철학적 재조명], 고대, 1998, pp.3-44.
이승환, "유가에 권리 개념이 있었는가?", [유가사상의 사회철학적 재조명], 고대, 1998, pp.203-228.
함재봉, "유교 전통과 인권사상", [계간 사상], 1996 겨울호, pp.108-120
쟈카리아, 리콴유와의 대담, "문화는 숙명이다", [아시아적 가치], 전통과 현대, 1999, pp.15-50.
김대중, "문화는 숙명인가?", [아시아적 가치], 전통과 현대, 1999, pp.51-64.
유교에도 인권 개념이 있는가?
한국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인권이라는 용어가 유교에는 없었지만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는 가르침들이 유교 전통내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유교 문화권의 중심적 태도는 개인의 권리보다는 공동체의 질서와 조화를 향한다. 함재봉은 유교의 인치, 덕치, 위민, 민본사상 등은 인권유린을 용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유교는 인간을 간주관적, 도덕적 존재로 보기 때문에 개인의 권리가 인간관계와 충돌할 때는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동체의 영향을 옹호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했다. 같은 맥락에서 리콴유는 공동체를 중시하는 유교 문화권의 태도를 흥미롭게 설명했다. 수많은 왕조가 흥망성쇠했던 중국역사에서 인간의 생존 조건은 가족, 친족, 족벌과 같은 연속적 집단이었기 때문에 공동체 중심의 의식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집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윤리적 차원에 그대로 투영된다. 이승환은 형식논리적으로 규율에 순종하는 直躬의 '곧음'보다는 가변하는 상황속에서 최적의 선택지를 찾으려는 상황윤리적인 '곧음'을 옹호한 공자의 태도를 제시하는데, 이는 유교의 시중적 조망을 보여주는 동시에 공동체에 이로운 것이 선이라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유교는 인간존중사상을 철저히 내포하고 있지만 그 발현의 공동체성을 보다 중시하는 관계적 윤리에 착목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인권을 강조하는 서구 사회의 자기모순
반면 한국 학자들은 서구 사회의 인권 옹호를 민주주의적 덕목으로 인정하지만 결핍 또한 있음을 지적한다. 즉 서구 사회는 개인의 인권을 표방하지만 그것을 도덕적으로 지탱해주는 사상적, 정신적 토양의 결핍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세속화에 따라 그리스도교 전통의 영향력이 위축된 상황에서는 결국 법과 계약이라는 형식과 절차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법 테두리 안에서' 자행되는 사적 이익의 과도한 추구와 타자에 대한 부정을 초래했다.
미국에서는 법정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꾸준히 영화나 소설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것은 법을 악용하는 이들의 잔혹함을 폭로하는 동시에 법 형식의 비정함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런 영화와 소설에 열광하는 미국인의 심리 이면에는 도덕적 공황에 대한 반감과 인간적 삶에 대한 기대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한편, 리콴유의 지적처럼 미국은 총기, 마약, 폭력, 부랑인들, 공공에서의 무례한 행동 등 시민사회의 붕괴에 직면해 있다. 특히 총기의 경우 개인의 자위권 차원에서 소지를 합리화하고 있지만 최근 청소년들의 총기난사와 같이 오히려 익명적 타자의 생명권을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미국인의 인권을 최상의 가치로 하다보니 타국인의 인권을 상대적으로 경시하는 경향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서구 법, 인권 사상의 한계는 양심에 따른 도덕적 판단과 공동체의 안위를 끌어내지 못하는 과도한 형식주의로 변질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유교는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
유교는 변명인가 대안인가?
1) 부정적 요소들 - 유교의 내적 자기반성의 요청
서구 민주주의의 실패와 유교 사상의 긍정적 적용 가능성을 주장하는 이들의 태도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그것은 유교 문화권이 경험한 역사적 인권 억압을 은폐하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대중은 리콴유가 서구 민주주의를 거절하는 명분으로 유교를 이용한다고 비판했고, 함재봉도 유교가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변명으로 이용될 수 있는 점을 경계했다. 물론 이승환은 유교 문화권의 개인들이 비록 불평등하게나마 사회적 역할 분담의 원칙에 따라 각기 다른 항목과 범위의 권리들을 부여받았다고 하나, 이것은 지배자의 권리를 우선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인권을 경시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사회학자 한상진은 역사적으로 유교 전통이 보여준 신분제의 차별, 지배이데올로기로의 오용 등의 부정적 결과에 대한 비판을 전제해야 할 것을 명시한다. 이처럼 유교 사상이 권위주의 지배체제를 변호하는 이데올로기로 오용된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유교는 내적 자기비판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만 유교가 현대의 인권 상황에 대한 적절한 의미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2) 긍정적 요소들
첫째, 유교는 인권을 지켜나갈 정치주체들의 도덕적 책임성을 자극할 수 있다.
현대의 복잡한 사회구조는 대의민주주의를 불가피하게 요청한다. 따라서 시민의 대표자로 사회를 이끌어가는 이들의 도덕적 자질에 그 사회의 인권 상황이 좌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치 주체들의 도덕성과 위민, 민본 의식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그런 면에서 지배계층의 도덕적 책임성을 강조하는 유교 정치철학은 현대 인권 상황의 개선에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둘째, 유교는 인간존중에 기초한 법의 인간화, 도덕화를 모색하게 할 수 있다.
서구 법의 여신은 눈을 가린채 한 손엔 칼을 한 손엔 저울을 들고 있다. 이는 不偏不黨 의 객관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법 형식적 경중만으로 처벌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법 형식으로는 잘못이지만 도덕적 차원에서는 비난받을 수 없는 일들이 존재한다. 그것에 눈감지 않고, 사회적 공감대에 기초한 양심과 도덕에 호소할 수 있는 '인간적 법치주의'가 필요한 것이다. 이승환은 한 대에 '법의 유가화'가 이루어졌음을 논증하는데, 이는 덕치라고 하는 유교적 이상이 법치에 적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경험은 현대 법 형식주의의 인간화, 실질적 정의의 수립에 의미있는 도전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유교는 공동체정신에 기초한 인권 의식 함양에 기여할 수 있다.
서구의 공동체 파괴 현실은 급속하게 산업화한 아시아권 나라들도 경험하고 있는 현재적 사건이다. 서구인들은 아시아로부터 가족의 가치, 공동체의 윤리를 배우고자 하지만, 역으로 현대 아시아 국가들은 개인주의의 심화에 따른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더불어 살아가는 공존의 윤리, 상생의 윤리는 인권 문제에 있어서도 간과될 수 없는 공동생존의 필수적 요소이다. 그런 맥락에서 유교의 관계적, 공동체적 관점은 인권의 보호와 확장을 더욱 풍부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권에 있어서 유교의 '이상주의' 측면과 '주체 부재' 문제의 성격
위와 같은 대안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유교의 인간존중 사상은 현대의 복잡한 사회상 속에서 제도화되기 어려운 이상주의일뿐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 실현의 주체가 조직되어 있는가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상주의와 주체 부재의 문제는 역으로 현대적 상황에서 유효한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첫째, 현실비판의 힘으로서의 '이상주의'
우선 유교의 인간 존중 사상이 현대와 같은 복합적, 다차원적 상황에서 현실화되기는 어려운 이상주의일 수 있다. 그러나 이상주의는 현실의 결핍과 왜곡에 대한 제한없는 비판의 기능을 할 수 있다. 비록 유교의 역사, 중국과 아시아 제 국가의 역사에서 유교의 근본정신이 철저하게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비인간적 현실에 대한 유자들의 비판이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현대에도 유효한 비판기능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주체 확대의 조건으로서의 '주체 부재'
인권 문제에 있어서 유교의 자기 비판과 갱신을 요청할 때 그것을 책임적으로 수행할 주체는 누구인가? 유교는 단일한 종파로 존재하지 않으며, 유교 문화권에서 사는 사람들도 헌신적 유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유교의 제 문제에 대한 담론은 자칫 공허한 울림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점이 현대의 다차원적 상황에 유교가 더 적절하게 기여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닐까? 주체의 부재 혹은 모호함은 자유로운 해석과 적용에 개방되는 것을 용이하게 하는 조건이 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교와 사상에 근거해 살아가는 이들에게 유교의 인간존중 사상은 반감 없이 수용될 수 있게 만든다. 유교적 그리스도인, 유교적 정치인, 유교적 생활인 등이 실존할 수 있는 것이며, 이 결과 인간존중의 유교 사상은 종교와 민족의 차이를 넘어 현대에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2000, 봄)
이승환, "유가의 정의관", [유가사상의 사회철학적 재조명], 고대, 1998, pp.3-44.
이승환, "유가에 권리 개념이 있었는가?", [유가사상의 사회철학적 재조명], 고대, 1998, pp.203-228.
함재봉, "유교 전통과 인권사상", [계간 사상], 1996 겨울호, pp.108-120
쟈카리아, 리콴유와의 대담, "문화는 숙명이다", [아시아적 가치], 전통과 현대, 1999, pp.15-50.
김대중, "문화는 숙명인가?", [아시아적 가치], 전통과 현대, 1999, pp.51-64.
유교에도 인권 개념이 있는가?
한국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인권이라는 용어가 유교에는 없었지만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는 가르침들이 유교 전통내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유교 문화권의 중심적 태도는 개인의 권리보다는 공동체의 질서와 조화를 향한다. 함재봉은 유교의 인치, 덕치, 위민, 민본사상 등은 인권유린을 용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유교는 인간을 간주관적, 도덕적 존재로 보기 때문에 개인의 권리가 인간관계와 충돌할 때는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동체의 영향을 옹호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했다. 같은 맥락에서 리콴유는 공동체를 중시하는 유교 문화권의 태도를 흥미롭게 설명했다. 수많은 왕조가 흥망성쇠했던 중국역사에서 인간의 생존 조건은 가족, 친족, 족벌과 같은 연속적 집단이었기 때문에 공동체 중심의 의식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집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윤리적 차원에 그대로 투영된다. 이승환은 형식논리적으로 규율에 순종하는 直躬의 '곧음'보다는 가변하는 상황속에서 최적의 선택지를 찾으려는 상황윤리적인 '곧음'을 옹호한 공자의 태도를 제시하는데, 이는 유교의 시중적 조망을 보여주는 동시에 공동체에 이로운 것이 선이라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유교는 인간존중사상을 철저히 내포하고 있지만 그 발현의 공동체성을 보다 중시하는 관계적 윤리에 착목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인권을 강조하는 서구 사회의 자기모순
반면 한국 학자들은 서구 사회의 인권 옹호를 민주주의적 덕목으로 인정하지만 결핍 또한 있음을 지적한다. 즉 서구 사회는 개인의 인권을 표방하지만 그것을 도덕적으로 지탱해주는 사상적, 정신적 토양의 결핍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세속화에 따라 그리스도교 전통의 영향력이 위축된 상황에서는 결국 법과 계약이라는 형식과 절차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법 테두리 안에서' 자행되는 사적 이익의 과도한 추구와 타자에 대한 부정을 초래했다.
미국에서는 법정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꾸준히 영화나 소설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것은 법을 악용하는 이들의 잔혹함을 폭로하는 동시에 법 형식의 비정함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런 영화와 소설에 열광하는 미국인의 심리 이면에는 도덕적 공황에 대한 반감과 인간적 삶에 대한 기대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한편, 리콴유의 지적처럼 미국은 총기, 마약, 폭력, 부랑인들, 공공에서의 무례한 행동 등 시민사회의 붕괴에 직면해 있다. 특히 총기의 경우 개인의 자위권 차원에서 소지를 합리화하고 있지만 최근 청소년들의 총기난사와 같이 오히려 익명적 타자의 생명권을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미국인의 인권을 최상의 가치로 하다보니 타국인의 인권을 상대적으로 경시하는 경향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서구 법, 인권 사상의 한계는 양심에 따른 도덕적 판단과 공동체의 안위를 끌어내지 못하는 과도한 형식주의로 변질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유교는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
유교는 변명인가 대안인가?
1) 부정적 요소들 - 유교의 내적 자기반성의 요청
서구 민주주의의 실패와 유교 사상의 긍정적 적용 가능성을 주장하는 이들의 태도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그것은 유교 문화권이 경험한 역사적 인권 억압을 은폐하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대중은 리콴유가 서구 민주주의를 거절하는 명분으로 유교를 이용한다고 비판했고, 함재봉도 유교가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변명으로 이용될 수 있는 점을 경계했다. 물론 이승환은 유교 문화권의 개인들이 비록 불평등하게나마 사회적 역할 분담의 원칙에 따라 각기 다른 항목과 범위의 권리들을 부여받았다고 하나, 이것은 지배자의 권리를 우선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인권을 경시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사회학자 한상진은 역사적으로 유교 전통이 보여준 신분제의 차별, 지배이데올로기로의 오용 등의 부정적 결과에 대한 비판을 전제해야 할 것을 명시한다. 이처럼 유교 사상이 권위주의 지배체제를 변호하는 이데올로기로 오용된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유교는 내적 자기비판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만 유교가 현대의 인권 상황에 대한 적절한 의미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2) 긍정적 요소들
첫째, 유교는 인권을 지켜나갈 정치주체들의 도덕적 책임성을 자극할 수 있다.
현대의 복잡한 사회구조는 대의민주주의를 불가피하게 요청한다. 따라서 시민의 대표자로 사회를 이끌어가는 이들의 도덕적 자질에 그 사회의 인권 상황이 좌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치 주체들의 도덕성과 위민, 민본 의식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그런 면에서 지배계층의 도덕적 책임성을 강조하는 유교 정치철학은 현대 인권 상황의 개선에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둘째, 유교는 인간존중에 기초한 법의 인간화, 도덕화를 모색하게 할 수 있다.
서구 법의 여신은 눈을 가린채 한 손엔 칼을 한 손엔 저울을 들고 있다. 이는 不偏不黨 의 객관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법 형식적 경중만으로 처벌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법 형식으로는 잘못이지만 도덕적 차원에서는 비난받을 수 없는 일들이 존재한다. 그것에 눈감지 않고, 사회적 공감대에 기초한 양심과 도덕에 호소할 수 있는 '인간적 법치주의'가 필요한 것이다. 이승환은 한 대에 '법의 유가화'가 이루어졌음을 논증하는데, 이는 덕치라고 하는 유교적 이상이 법치에 적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경험은 현대 법 형식주의의 인간화, 실질적 정의의 수립에 의미있는 도전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유교는 공동체정신에 기초한 인권 의식 함양에 기여할 수 있다.
서구의 공동체 파괴 현실은 급속하게 산업화한 아시아권 나라들도 경험하고 있는 현재적 사건이다. 서구인들은 아시아로부터 가족의 가치, 공동체의 윤리를 배우고자 하지만, 역으로 현대 아시아 국가들은 개인주의의 심화에 따른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더불어 살아가는 공존의 윤리, 상생의 윤리는 인권 문제에 있어서도 간과될 수 없는 공동생존의 필수적 요소이다. 그런 맥락에서 유교의 관계적, 공동체적 관점은 인권의 보호와 확장을 더욱 풍부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권에 있어서 유교의 '이상주의' 측면과 '주체 부재' 문제의 성격
위와 같은 대안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유교의 인간존중 사상은 현대의 복잡한 사회상 속에서 제도화되기 어려운 이상주의일뿐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 실현의 주체가 조직되어 있는가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상주의와 주체 부재의 문제는 역으로 현대적 상황에서 유효한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첫째, 현실비판의 힘으로서의 '이상주의'
우선 유교의 인간 존중 사상이 현대와 같은 복합적, 다차원적 상황에서 현실화되기는 어려운 이상주의일 수 있다. 그러나 이상주의는 현실의 결핍과 왜곡에 대한 제한없는 비판의 기능을 할 수 있다. 비록 유교의 역사, 중국과 아시아 제 국가의 역사에서 유교의 근본정신이 철저하게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비인간적 현실에 대한 유자들의 비판이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현대에도 유효한 비판기능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주체 확대의 조건으로서의 '주체 부재'
인권 문제에 있어서 유교의 자기 비판과 갱신을 요청할 때 그것을 책임적으로 수행할 주체는 누구인가? 유교는 단일한 종파로 존재하지 않으며, 유교 문화권에서 사는 사람들도 헌신적 유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유교의 제 문제에 대한 담론은 자칫 공허한 울림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점이 현대의 다차원적 상황에 유교가 더 적절하게 기여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닐까? 주체의 부재 혹은 모호함은 자유로운 해석과 적용에 개방되는 것을 용이하게 하는 조건이 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교와 사상에 근거해 살아가는 이들에게 유교의 인간존중 사상은 반감 없이 수용될 수 있게 만든다. 유교적 그리스도인, 유교적 정치인, 유교적 생활인 등이 실존할 수 있는 것이며, 이 결과 인간존중의 유교 사상은 종교와 민족의 차이를 넘어 현대에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2000,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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