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宇宙와 聖人 : 유기체적 우주와 조우하기 위한 수양의 요청"
1, Phiip J. Ivanhoe, "Early Confucianism and Environmental Ethics" pp.59-76.
2, Tu Weiming, "The Continuity of Being : Chinese Visions of Nature" pp.105-121.
3, Young-chan Ro, "Ecological Implifications of Yi Yulgok pp.169-186.
Ed by, Mary Evelyn Tucker and John Berthrong, [Cinfucianism abd Ecology],Harvard CSWR, 1998
현대 생태위기의 심각성이 제기하는 것은 '세계관'의 문제이며, 그것과 연관된 '실천'의 문제이다. 서양의 이원론적, 정복주의적 세계관이 초래한 위기상황에 대한 반성적 대안으로 현대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상대적으로 자연친화적인 동양사상 전통이다. 전통적 동양사상이 생태학적 상상력에 도움을 주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동양 사상 내부의 모든 흐름이 같은 형식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한 종교 전통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유교의 경우 원시유교와 신유교가 다르고, 또한 신유교에 속하는 학파들간의 견해도 다르다. 유교 자연관에 대한 위 세 편의 논문도 총론으로 본다면 최소한의 공통분모로서 자연에 대한 우호적, 친화적 관점을 전달하고 있지만, 각론적으로는 우주, 자연, 인간을 바라보는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차이점이 생태학적 주제와 관련하여 난감함을 주거나 취사선택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생태학은 '유기체'의 이미지에 기초해 있으므로, 유교의 여러 가지 긍정적 함의들을 생태파괴적 세계관의 정정에 필요한 자원으로 다양하게, 유기체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시각에서 나는, 세편의 논문을, 자연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세계관 통찰과, 인간과 자연의 가장 바람직한 관계성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실천적 방향 제시에 주목하여 읽고, 그것을 '우주론'과 '수양론'의 차원에서 평가한다.
1. 유기체적, 상호의존적 우주
중국인들이 유기체적인 우주발생론을 갖게 된 배경은 인격적인 신의 관념을 갖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주를 연속적 창조성의 전개로 파악했기 때문이라고 뚜 웨이밍은 주장한다. 이런 연속성의 강조는 우주에 존재하는 사물들간의 유기체성과 역동성과 관계되어 있다. 즉 수많은 생명체들이 하나의 연속체로서의 우주 안에서 유기체적, 자발적으로 조화되는 것이다. 뚜 웨이밍은 이러한 유기체적 관점이 자연에 대한 겸손하고 사랑스러운 태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장제의 [西銘] 서두를 인용하면서, 하늘과 땅을 부모라 하고 만물을 동료로 삼는 관점이 우주와 일체를 이루는 중국적 세계관이라고 주장했다. 이 관점에 따르면 필요없거나 무가치한 존재는 없으며, 또한 인간이 우주의 지배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한편 신유학적 전통을 율곡을 중심으로 다룬 노영찬은 천·지·인 三才를 우주적 맥락에 놓는 우주중심적 태도로 유교 생태학을 접근한다. 이것은 인간중심적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강하게 의도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율곡의 우주론은 신유교 중에서도 매우 강하게 인간의 가치로부터 독립한 우주적 시각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중심주의로부터의 해방이며, 인간의 관심사를 넘어서서 인간과 천지를 관련시키는 확대된 '인본주의'라는 것이다. 율곡은 그런 맥락에서 인간과 우주를 '주체 대 주체'의 관계로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뚜 웨이밍이나 노영찬 모두 유교가 지니는 우주의 유기체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밝히지만, 그것이 인간과 자연의 무차별적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 같지는 않다. 뚜 웨이밍도 존재 양식에 있어서 차별의 원리를 전제한 유기체적 연결을 말하고 있고, 또한 주돈이의 글을 인용하면서 인간의 탁월성을 인정한다. 노영찬도 인간과 우주가 서로에게 예속되거나 대상화하지 않는다는 '상호주관성'을 언급한다.
2. 유기체적 우주와 합일하기 위한 성인의 길
원시유교에서 맹자나 순자가 聖人을 이야기 한 것은 초월적 존재의 외적 개입으로 무질서한 자연에 질서와 조화를 부여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교는 인격적 신의 능동적 작용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본성에 내재하는 天, 혹은 理가 바르게 발현하였을 때 성인이 되고, 그 성인이 우주적 연대성을 실현하는 주체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순자가 말한 '무질서'를 생태학적 주제로 유비하면 '생태계파괴의 통제불능' 정도가 될 것인데, 이것을 조화시켜 회복케하는 성인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가 문제이다. 그것은 비로소 '성인이 되는 길', 즉 수양론을 요청한다. 뚜 웨이밍이 "우주와 합일하는 것은 자신을 성장시키고 수련하는 지속적 노력을 요구한다"고 한 것. 그리고 "자연과의 상호 관계와 친화성의 경험은 자기 수양의 결과"라고 한 것은 그런 맥락이다. 노영찬도 율곡이 바라본 우주는 해석학적 실재라고 하면서, 우주의 상징구조를 이해하는 주체는 인간이며, 특히 우주의 소리를 듣고 우주와 상호작용하며 의사소통하는 존재는 성인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우주와 조화되는 인간의 실현이며, 이는 수양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이 수양의 의미를 환경윤리적 측면에서 본다면, '생태학적 감수성을 가진 인간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태학적으로 감수성이 무딘 자는 자연에 자신의 이기적 욕망만을 투사하여 지배하려 하지만, 생태학적 聖人은 자연과의 혈연관계를 공유함으로써 깊은 연대감정을 갖고 자연을 보살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유교적 수양의 생태학적 감수성이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현실의 작용'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당위는 그 동력을 얻고 있지 못한듯하다. 대우주와의 연대성을 깨닫고 실천하는 수양은 '窮理'만이 아니라 '居敬'을, 즉 철학적, 종교적 과정의 竝進을 요구하는데, 후자의 전통이 상대적으로 위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위축 상태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유교가 스승들의 생태학적 감수성을 현대에 성공적으로 복원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2000, 봄)
1, Phiip J. Ivanhoe, "Early Confucianism and Environmental Ethics" pp.59-76.
2, Tu Weiming, "The Continuity of Being : Chinese Visions of Nature" pp.105-121.
3, Young-chan Ro, "Ecological Implifications of Yi Yulgok pp.169-186.
Ed by, Mary Evelyn Tucker and John Berthrong, [Cinfucianism abd Ecology],Harvard CSWR, 1998
현대 생태위기의 심각성이 제기하는 것은 '세계관'의 문제이며, 그것과 연관된 '실천'의 문제이다. 서양의 이원론적, 정복주의적 세계관이 초래한 위기상황에 대한 반성적 대안으로 현대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상대적으로 자연친화적인 동양사상 전통이다. 전통적 동양사상이 생태학적 상상력에 도움을 주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동양 사상 내부의 모든 흐름이 같은 형식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한 종교 전통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유교의 경우 원시유교와 신유교가 다르고, 또한 신유교에 속하는 학파들간의 견해도 다르다. 유교 자연관에 대한 위 세 편의 논문도 총론으로 본다면 최소한의 공통분모로서 자연에 대한 우호적, 친화적 관점을 전달하고 있지만, 각론적으로는 우주, 자연, 인간을 바라보는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차이점이 생태학적 주제와 관련하여 난감함을 주거나 취사선택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생태학은 '유기체'의 이미지에 기초해 있으므로, 유교의 여러 가지 긍정적 함의들을 생태파괴적 세계관의 정정에 필요한 자원으로 다양하게, 유기체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시각에서 나는, 세편의 논문을, 자연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세계관 통찰과, 인간과 자연의 가장 바람직한 관계성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실천적 방향 제시에 주목하여 읽고, 그것을 '우주론'과 '수양론'의 차원에서 평가한다.
1. 유기체적, 상호의존적 우주
중국인들이 유기체적인 우주발생론을 갖게 된 배경은 인격적인 신의 관념을 갖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주를 연속적 창조성의 전개로 파악했기 때문이라고 뚜 웨이밍은 주장한다. 이런 연속성의 강조는 우주에 존재하는 사물들간의 유기체성과 역동성과 관계되어 있다. 즉 수많은 생명체들이 하나의 연속체로서의 우주 안에서 유기체적, 자발적으로 조화되는 것이다. 뚜 웨이밍은 이러한 유기체적 관점이 자연에 대한 겸손하고 사랑스러운 태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장제의 [西銘] 서두를 인용하면서, 하늘과 땅을 부모라 하고 만물을 동료로 삼는 관점이 우주와 일체를 이루는 중국적 세계관이라고 주장했다. 이 관점에 따르면 필요없거나 무가치한 존재는 없으며, 또한 인간이 우주의 지배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한편 신유학적 전통을 율곡을 중심으로 다룬 노영찬은 천·지·인 三才를 우주적 맥락에 놓는 우주중심적 태도로 유교 생태학을 접근한다. 이것은 인간중심적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강하게 의도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율곡의 우주론은 신유교 중에서도 매우 강하게 인간의 가치로부터 독립한 우주적 시각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중심주의로부터의 해방이며, 인간의 관심사를 넘어서서 인간과 천지를 관련시키는 확대된 '인본주의'라는 것이다. 율곡은 그런 맥락에서 인간과 우주를 '주체 대 주체'의 관계로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뚜 웨이밍이나 노영찬 모두 유교가 지니는 우주의 유기체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밝히지만, 그것이 인간과 자연의 무차별적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 같지는 않다. 뚜 웨이밍도 존재 양식에 있어서 차별의 원리를 전제한 유기체적 연결을 말하고 있고, 또한 주돈이의 글을 인용하면서 인간의 탁월성을 인정한다. 노영찬도 인간과 우주가 서로에게 예속되거나 대상화하지 않는다는 '상호주관성'을 언급한다.
2. 유기체적 우주와 합일하기 위한 성인의 길
원시유교에서 맹자나 순자가 聖人을 이야기 한 것은 초월적 존재의 외적 개입으로 무질서한 자연에 질서와 조화를 부여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교는 인격적 신의 능동적 작용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본성에 내재하는 天, 혹은 理가 바르게 발현하였을 때 성인이 되고, 그 성인이 우주적 연대성을 실현하는 주체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순자가 말한 '무질서'를 생태학적 주제로 유비하면 '생태계파괴의 통제불능' 정도가 될 것인데, 이것을 조화시켜 회복케하는 성인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가 문제이다. 그것은 비로소 '성인이 되는 길', 즉 수양론을 요청한다. 뚜 웨이밍이 "우주와 합일하는 것은 자신을 성장시키고 수련하는 지속적 노력을 요구한다"고 한 것. 그리고 "자연과의 상호 관계와 친화성의 경험은 자기 수양의 결과"라고 한 것은 그런 맥락이다. 노영찬도 율곡이 바라본 우주는 해석학적 실재라고 하면서, 우주의 상징구조를 이해하는 주체는 인간이며, 특히 우주의 소리를 듣고 우주와 상호작용하며 의사소통하는 존재는 성인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우주와 조화되는 인간의 실현이며, 이는 수양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이 수양의 의미를 환경윤리적 측면에서 본다면, '생태학적 감수성을 가진 인간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태학적으로 감수성이 무딘 자는 자연에 자신의 이기적 욕망만을 투사하여 지배하려 하지만, 생태학적 聖人은 자연과의 혈연관계를 공유함으로써 깊은 연대감정을 갖고 자연을 보살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유교적 수양의 생태학적 감수성이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현실의 작용'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당위는 그 동력을 얻고 있지 못한듯하다. 대우주와의 연대성을 깨닫고 실천하는 수양은 '窮理'만이 아니라 '居敬'을, 즉 철학적, 종교적 과정의 竝進을 요구하는데, 후자의 전통이 상대적으로 위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위축 상태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유교가 스승들의 생태학적 감수성을 현대에 성공적으로 복원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2000, 봄)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