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실학의 성격과 현대적 의미
윤사순, "실학사상의 철학적 성격". 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 아세아연구, 19권 제2호,통권56호 1976.7
천관우, "조선후기 실학의 개념 재검토". 역사학회 편, 한국사의 반성, 신구문화사, 1980
이우성, "실학연구서설", 역사학회 편, 실학연구 입문, 일조각, 1973
조 광,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연구동향과 전망"
지두환, "조선후기 실학연구의 문제점과 방향", 한림대학교 부설 태동고전연구소, 태동고전연구 3집(1987)
유교를 하나의 고정적 도그마, 특정 시대와 지역에 제한된 사상, 종교라고 이해할 때 유교의 보편성(시대적, 지역적)이 설 자리는 협소해진다. 나는 유교를 운동하는 생명체로 파악한다. 그것은 유교가 때와 장소에 맞게 적용하고 갱신하며 새로워지는 발전 원리를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실학 논쟁에 있어 우선 관심을 갖게 된 주제는 조선시대 성리학과 실학의 관계성 문제이다. 텍스트에 거론된 학자들 대부분은 실학이 성리학과 단절하여 생성된 新思想은 아니라는 것에 일반적인 합의를 하고 있다. 실학자들은 성리학의 태내에서 성장하였으며, 방법론, 현실적 적용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지언정 성리학적 소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않는 것이다. 윤사순도 주리론과 주기론의 경향성 차이로 조선시대 성리학과 실학을 구분하기는 하지만, 이 역시 단절을 주자아는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중기까지의 성리학에서도 이기의 강조점 차이가 있었고, 그것에 따라 학파가 분기했던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연속성은 이기론과 같은 형이상학 차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治人의 측면에서 볼때도, 실학 이전의 유학자들중에서도 경세론적인 측면에서 실학적 면모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연속성의 인정에도 불구하고 실학만의 독자적 정체성 또한 확인해야 한다. 실학의 정체성은사변의 토양이 아닌 시대적 삶의 자리에 있었다. 한우근이 실학 용어 개념을 유교사 전체로 넓힌 것은 의미있는 지적이다. 유교사 전체에서 실학 개념이 존재했다는 것은, 그 시대에 중심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에 대한 철저한 추구, 사회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응과 향도성을 구현하는 것을 '실학'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 실학의 정체성은 근대로 도입하는 전세계적 변동의 사회 현실에서 찾아져야 한다. 당시 조선 안팎으로 생겨났던 근대적 문제상황이 조선후기 실학의 내용을 규정했다. 이우성이 실학을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로 구분하여 설명하면서, 성호학파의 일부가 천주교로 전환한 이유를 그들이 기반한 계급이 몰락하는 농민계급이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은 실학의 성격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대목이다. 어떠한 사회계급, 어떠한 현실인식논리에 기반했는가에 따라 실학의 향방이 갈려졌던 것이다. 곧 순수한 사상의 궤적때문에 실학 유파의 명암이 엊갈린 것이 아니라 사회적 변화에 따라 그 향방이 정해졌던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면서 실학 모두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정체성은 민족주의, 근대정신의 현실적 요청에 대한 유학자들의 양심적이고 진취적인 답변이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실학의 노력은 왜 좌절되었는가? 학자들의 비판처럼 그들은 여전히 계급적으로는 봉건적 체제이데올로기를 벗어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인가, 또는 사상적으로 '유교의 황혼'일뿐이었기 때문인가? 나는 실학자들의 계급적 한계성에 대한 지적은 일반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실학 좌절의 핵심 이유는 아니다. 일본의 역사학자인 오가와 하루하시는 조선의 실학을 "동양인들을 서양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게 할 유일한 사상"이라고 말하면서, 일본의 조선 지배가 실학자들이 터놓은 위대한 학문의 길을 봉쇄해버렸다고 평가했다. 실학자들의 노력이 국제관계의 침략적 변수에 의해 방해받지만 않았다면 실학은 창조적 사회개혁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외세에 의해 사상적 발전을 저해당하지 않을 수 있는 '형식적' 자주성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 우리가 실학에서 배워야 할 것은 학문 탐구, 종교적 궁리를 하면서도 거중기를 만들고, 토지개혁법을 만들고, 농사법을 개발할 수 있었던 실학자들의 행동성이다.(1999. 5. 12)
윤사순, "실학사상의 철학적 성격". 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 아세아연구, 19권 제2호,통권56호 1976.7
천관우, "조선후기 실학의 개념 재검토". 역사학회 편, 한국사의 반성, 신구문화사, 1980
이우성, "실학연구서설", 역사학회 편, 실학연구 입문, 일조각, 1973
조 광,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연구동향과 전망"
지두환, "조선후기 실학연구의 문제점과 방향", 한림대학교 부설 태동고전연구소, 태동고전연구 3집(1987)
유교를 하나의 고정적 도그마, 특정 시대와 지역에 제한된 사상, 종교라고 이해할 때 유교의 보편성(시대적, 지역적)이 설 자리는 협소해진다. 나는 유교를 운동하는 생명체로 파악한다. 그것은 유교가 때와 장소에 맞게 적용하고 갱신하며 새로워지는 발전 원리를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실학 논쟁에 있어 우선 관심을 갖게 된 주제는 조선시대 성리학과 실학의 관계성 문제이다. 텍스트에 거론된 학자들 대부분은 실학이 성리학과 단절하여 생성된 新思想은 아니라는 것에 일반적인 합의를 하고 있다. 실학자들은 성리학의 태내에서 성장하였으며, 방법론, 현실적 적용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지언정 성리학적 소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않는 것이다. 윤사순도 주리론과 주기론의 경향성 차이로 조선시대 성리학과 실학을 구분하기는 하지만, 이 역시 단절을 주자아는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중기까지의 성리학에서도 이기의 강조점 차이가 있었고, 그것에 따라 학파가 분기했던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연속성은 이기론과 같은 형이상학 차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治人의 측면에서 볼때도, 실학 이전의 유학자들중에서도 경세론적인 측면에서 실학적 면모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연속성의 인정에도 불구하고 실학만의 독자적 정체성 또한 확인해야 한다. 실학의 정체성은사변의 토양이 아닌 시대적 삶의 자리에 있었다. 한우근이 실학 용어 개념을 유교사 전체로 넓힌 것은 의미있는 지적이다. 유교사 전체에서 실학 개념이 존재했다는 것은, 그 시대에 중심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에 대한 철저한 추구, 사회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응과 향도성을 구현하는 것을 '실학'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 실학의 정체성은 근대로 도입하는 전세계적 변동의 사회 현실에서 찾아져야 한다. 당시 조선 안팎으로 생겨났던 근대적 문제상황이 조선후기 실학의 내용을 규정했다. 이우성이 실학을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로 구분하여 설명하면서, 성호학파의 일부가 천주교로 전환한 이유를 그들이 기반한 계급이 몰락하는 농민계급이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은 실학의 성격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대목이다. 어떠한 사회계급, 어떠한 현실인식논리에 기반했는가에 따라 실학의 향방이 갈려졌던 것이다. 곧 순수한 사상의 궤적때문에 실학 유파의 명암이 엊갈린 것이 아니라 사회적 변화에 따라 그 향방이 정해졌던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면서 실학 모두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정체성은 민족주의, 근대정신의 현실적 요청에 대한 유학자들의 양심적이고 진취적인 답변이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실학의 노력은 왜 좌절되었는가? 학자들의 비판처럼 그들은 여전히 계급적으로는 봉건적 체제이데올로기를 벗어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인가, 또는 사상적으로 '유교의 황혼'일뿐이었기 때문인가? 나는 실학자들의 계급적 한계성에 대한 지적은 일반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실학 좌절의 핵심 이유는 아니다. 일본의 역사학자인 오가와 하루하시는 조선의 실학을 "동양인들을 서양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게 할 유일한 사상"이라고 말하면서, 일본의 조선 지배가 실학자들이 터놓은 위대한 학문의 길을 봉쇄해버렸다고 평가했다. 실학자들의 노력이 국제관계의 침략적 변수에 의해 방해받지만 않았다면 실학은 창조적 사회개혁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외세에 의해 사상적 발전을 저해당하지 않을 수 있는 '형식적' 자주성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 우리가 실학에서 배워야 할 것은 학문 탐구, 종교적 궁리를 하면서도 거중기를 만들고, 토지개혁법을 만들고, 농사법을 개발할 수 있었던 실학자들의 행동성이다.(1999.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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