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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칠정론과 인물성동이론의 논쟁

작성자손님|작성시간06.04.14|조회수99 목록 댓글 0

독서노트,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자유로운 논쟁문화"
- 사단칠정론과 인물성동이론의 논쟁


이남영, "쟁점으로 본 한국성리학의 심층", 한국사상의 심층연구, pp.203-227
Tu Wei-ming, "Yi-T'oegye's Perception of Human Nature", The Rise of Neo-Confucianism in Korea, pp.261-281
Julia Ching, "Yi Yulgok on the Four Beginnings and the Seven Emotions", ibid, pp.303-322


현대의 혼란한 사회상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욕구는 '보편성'에 대한 기대이다. 이 세계와 인간을 명료하게 이해하는 도식적 체계를 얻고 싶어하는 것은, 불확실한 삶의 자리에서 더욱 강해지는 욕구이다. 그런 맥락에서 유교에 대한 주목이 새롭게 일어나고 있다. 아직 부분적이긴 하지만 성리학의 理氣論은 현대 과학기술에 영감을 주고 있고, 우주의 본체와 생활체계를 분리하지 않는 유교의 사상체계는 동서 문화를 아우르는 새로운 시대사상으로 활발히 모색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조선시대)성리학을 21세기의 향도사상으로 부활시킨다는 의미는 아니다. 시대가 가지고 있는 다원성은 미덕이며, 보편을 향한 과도한 욕구는 인류의 창조적 자기발전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성리학의 미덕을 '보편성'에서 찾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理와 氣의 사유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四端七情論爭, 人物性同異論爭과 같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주제들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첫째,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경외감이다.

퇴계와 제자 고봉의 논쟁, 절친한 학문적 동료이기도 했던 율곡과 우계의 논쟁은 '理란 무엇이고, 氣란 무엇인가?' 라는 형이상학적 설명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논쟁의 출발점은 인간의 삶, 마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었다. 人心과 道心은 어떤 관계에 있으며,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라는 문제는 인간의 현실적 삶에서 구체적으로 해명되어야 할 윤리적 문제였다.

이러한 측면을 반증하는 한 예로 퇴계의 주리론적 사칠관을 언급할 수 있다. 스스로의 도덕적 정진을 강조하며 실천했던 퇴계, 그가 '四端을 理의 發'이라 하는 것은 맹자의 성선설을 살리려는 의도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程·朱의 견해를 따라 性卽理라 한 것도 인간에게는 선한 본성이 있다고 믿고, 그 본성의 발현에 의하여 참다운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단칠정론과 같은 심성에 관한 이론의 목적은, 욕구를 막고 理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며, 이는 퇴계 학문과 실천의 중심 주제인 敬의 태도로 제시되었다. 여기서 主理說의 휴머니즘적 배경이 드러난다.

'思想을 위한' 思想은 砂上樓閣이다. 살아있는 '인간을 위한' 사상만이 인류 정신사를 숙성시키는 자양분이 된다. 후대의 논쟁은 다소 소모적 성격이 있었지만, 퇴계와 율곡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조선조 성리학 논쟁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깊은 이해,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경외감으로 충만했다. 그러므로 그 당시 누구도 이를 '불필요한 논쟁'으로 비난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자유롭고 책임있는 논쟁문화이다.

현대 한국 사회에 바람직한 '논쟁 문화'가 있는가. 신문과 방송,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논쟁에 사용될 수 있는 매체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만, 책임있고 열정적인 논쟁 문화는 오히려 찾아보기 힘들다. 얼마전 최장집에 대한 조선일보의 파상 공세는 언론권력의 횡포라는 측면뿐만이 아니라, 건강한 논쟁문화의 부재라는 현실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전체를 고려하지 않고 해석자의 의도된 틀에 맞는 문장과 단어만을 '오려 붙여서' 한 사람의 사상을 재단하는 매도였다. 그러한 反 이성적 사태는 비단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한국 근,현대사는 책임있는 토론과 논쟁을 통한 합의보다는 힘있는 소수의 일방적 주도에 의해 왜곡되어온 역사였다. 권력이 사상을 지배하고 통제할 때, 자유롭고 창조적인 논쟁이 가져올 相生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논쟁은 얼굴을 마주보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회의를 열어 투표로 결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인편에 서신이 가고, 그 서신을 깊이 읽고 사색한 후 진지한 답신을 보내는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성리학 논쟁은 바람직한 논쟁문화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사단칠정론쟁의 경우 서로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진지한 비판', '겸허한 자기 수정'의 미덕을 고루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논쟁 기간도 우리에게 의미를 준다. 당시 퇴계와 고봉의 논쟁은 14년동안 전개되었고, 율곡과 우계의 논쟁은 6년에 걸쳐 전개되었다. 몇 달 안에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사상적 호전성의 조급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뿐만 아니라 학문적 배타성과 맹목성 양면을 벗어났던 개방성과 자주성 또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주자학의 틀 안에 있으면서도 자유롭게 넘나드는 조선적 사유를 실현했던 퇴계와 율곡의 사상풍토는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자세이다. (1999.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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