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傳統的 三敎論과 異端論"
최일범, "고운 최치원의 사상연구-삼교관을 중심으로"
조남국, "최승로의 시무관과 유불관"
최승로, "시무28조"
금장태, "조선시대 유학의 정통이념과 이단비판","삼봉의 벽불론", 유교와 한국사상, 55-136
정도전, "심리기편", 불씨잡변"
Erich Fromm은 '종교적 불관용성'을 서양 종교의 특성이라고 하였다. 그에게 이 불관용성은 신앙과 사랑의 결여이며, 말(words)로 된 우상숭배였다. 그러나 이러한 불관용성이 서구 종교들만의 특성은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이 유지, 강화하고 있는 대부분의 종교에 이러한 불관용성이 나타났고, 지금도 존재한다.
각 종교의 발전은 호랑이와 같은 맹수들의 성장과 유사하다. 아무리 사나운 맹수도 어릴때는 그저 순하고 귀여운 재롱둥이일 뿐이다. 그러나 몸이 커가고, 숱한 위기를 넘기면서 마침내 '공격적' 맹수로 변한다. 초기부터 군사적 힘과 병행해서 발전했던 이슬람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종교가 이와 같다. 그리스도교도 팔레스타인의 새로운 종교운동이었던 때에는 자신들이 이단이 아님을, 사회적으로 위험한 세력이 아님을 주장하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권력과 밀착되어 국가종교가 된 이후로 선교의 역사에는 늘 정복의 역사가 동전의 양면처럼 따라다녔다. 동양의 종교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유교의 역사에서 다른 종교에 대한 태도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를 검토해 보면 종교의 발전과 불관용성의 상관관계를 인식할 수 있다. 최치원의 사상에서 보듯 한국의 유교사 초기에는 유교적 입장에 기반해 있으면서도 삼교통합적 입장을 갖는 것이 가능했다. 그후 최승로의 시무28조에서 보듯 점차 불교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가미된 유불공존론 또는 역할분담론이 주류를 이루었고, 마침내 려말선초에 이르러 교리적 차원까지 넓혀진 본격적 척불론이 나타났고, 조선건국의 이론가인 정도전에 의해 그 정점을 이루었다. 그리고 조선조의 척불론 이후 유교의 위치는 맹수와 같은 절대성을 획득해, 타종교에 대한 철저한 불관용성을 심화시켜왔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관의 변천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다소 대립적이고 공격적이라 할지라도 그 행동의 배경에 놓여있는 것이 자신이 추구하는 도에 대한 양심적 열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유교 사상의 변화,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闢異端 정신 자체는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 종교 사상은 언제나 도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상의 진전과 성숙에 따라 자기 사상에 충실하려는 것이 불가피하게 다른 사상과 갈등을 빚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금장태는 유교의 벽이단 정신을 泥田鬪狗의 대립이 아니라 진리의 현실적,역사적 파악으로 보고 있다. 유교의 근본이념은 '道'요, 이 도는 실현되어야 할 것이기에 시비가 있게되고, 이단과 정통이 있게 되고, 벽이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벽이단 정신이 공정하지 못한 아전인수격의 해석을 통해 이루어지는 비판일 때 그 의도의 순수성 자체가 훼손될 수 있다. 최승로의 불교 비판은 사회 현실에 나타나는 도덕적 차원이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교리적 성격을 갖는 정도전의 논의에서는 문자주의적 비판, 유교독존적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일방적 비판의 성격이 나타난다. 더욱이 이러한 정신이 조선조에는 권력과의 밀착속에서 형식화되고 보수화되어, 결국 유교의 생명력을 소진시켰다고 볼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 모든 한국종교는 한국인의 전통적 조화, 융화 정신과 각 종교의 정체성을 어떻게 관계지을 것인가의 과제를 부여받고 있다. 이를 통해 타종교와의 관계 또한 정립이 되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새로운 유교'를 지향하는 현대 한국 유교는 '도의 실현'이라는 궁극적 관심이 한국인의 조화적인 종교적 심성안에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인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최치원의 조화 정신, 최승로의 현실적 종교비판, 그리고 정도전의 벽이단정신의 열정이 '수평적으로' 융합되는 것을 통해 가능하지 않을까? (1999.3.17)
최일범, "고운 최치원의 사상연구-삼교관을 중심으로"
조남국, "최승로의 시무관과 유불관"
최승로, "시무28조"
금장태, "조선시대 유학의 정통이념과 이단비판","삼봉의 벽불론", 유교와 한국사상, 55-136
정도전, "심리기편", 불씨잡변"
Erich Fromm은 '종교적 불관용성'을 서양 종교의 특성이라고 하였다. 그에게 이 불관용성은 신앙과 사랑의 결여이며, 말(words)로 된 우상숭배였다. 그러나 이러한 불관용성이 서구 종교들만의 특성은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이 유지, 강화하고 있는 대부분의 종교에 이러한 불관용성이 나타났고, 지금도 존재한다.
각 종교의 발전은 호랑이와 같은 맹수들의 성장과 유사하다. 아무리 사나운 맹수도 어릴때는 그저 순하고 귀여운 재롱둥이일 뿐이다. 그러나 몸이 커가고, 숱한 위기를 넘기면서 마침내 '공격적' 맹수로 변한다. 초기부터 군사적 힘과 병행해서 발전했던 이슬람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종교가 이와 같다. 그리스도교도 팔레스타인의 새로운 종교운동이었던 때에는 자신들이 이단이 아님을, 사회적으로 위험한 세력이 아님을 주장하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권력과 밀착되어 국가종교가 된 이후로 선교의 역사에는 늘 정복의 역사가 동전의 양면처럼 따라다녔다. 동양의 종교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유교의 역사에서 다른 종교에 대한 태도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를 검토해 보면 종교의 발전과 불관용성의 상관관계를 인식할 수 있다. 최치원의 사상에서 보듯 한국의 유교사 초기에는 유교적 입장에 기반해 있으면서도 삼교통합적 입장을 갖는 것이 가능했다. 그후 최승로의 시무28조에서 보듯 점차 불교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가미된 유불공존론 또는 역할분담론이 주류를 이루었고, 마침내 려말선초에 이르러 교리적 차원까지 넓혀진 본격적 척불론이 나타났고, 조선건국의 이론가인 정도전에 의해 그 정점을 이루었다. 그리고 조선조의 척불론 이후 유교의 위치는 맹수와 같은 절대성을 획득해, 타종교에 대한 철저한 불관용성을 심화시켜왔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관의 변천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다소 대립적이고 공격적이라 할지라도 그 행동의 배경에 놓여있는 것이 자신이 추구하는 도에 대한 양심적 열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유교 사상의 변화,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闢異端 정신 자체는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 종교 사상은 언제나 도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상의 진전과 성숙에 따라 자기 사상에 충실하려는 것이 불가피하게 다른 사상과 갈등을 빚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금장태는 유교의 벽이단 정신을 泥田鬪狗의 대립이 아니라 진리의 현실적,역사적 파악으로 보고 있다. 유교의 근본이념은 '道'요, 이 도는 실현되어야 할 것이기에 시비가 있게되고, 이단과 정통이 있게 되고, 벽이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벽이단 정신이 공정하지 못한 아전인수격의 해석을 통해 이루어지는 비판일 때 그 의도의 순수성 자체가 훼손될 수 있다. 최승로의 불교 비판은 사회 현실에 나타나는 도덕적 차원이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교리적 성격을 갖는 정도전의 논의에서는 문자주의적 비판, 유교독존적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일방적 비판의 성격이 나타난다. 더욱이 이러한 정신이 조선조에는 권력과의 밀착속에서 형식화되고 보수화되어, 결국 유교의 생명력을 소진시켰다고 볼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 모든 한국종교는 한국인의 전통적 조화, 융화 정신과 각 종교의 정체성을 어떻게 관계지을 것인가의 과제를 부여받고 있다. 이를 통해 타종교와의 관계 또한 정립이 되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새로운 유교'를 지향하는 현대 한국 유교는 '도의 실현'이라는 궁극적 관심이 한국인의 조화적인 종교적 심성안에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인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최치원의 조화 정신, 최승로의 현실적 종교비판, 그리고 정도전의 벽이단정신의 열정이 '수평적으로' 융합되는 것을 통해 가능하지 않을까? (1999.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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