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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데의 출발점은 환원주의에 대한 반대와 현상학적 이해 두 가지 원리에 입각해 있다.

작성자손님|작성시간06.04.14|조회수280 목록 댓글 0

Mircea Eliade, "The Reality of the Sacred"
Daniel L. Pals, Seven Theories of Religion, pp.158-197.

1. 요약

엘리아데의 출발점은 환원주의에 대한 반대와 현상학적 이해 두 가지 원리에 입각해 있다. 우선 엘리아데는 종교에 대한 환원주의적 태도를 반대하고, 대신 인간주의적 접근을 수행했다. 종교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언어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환원주의에 대한 반대는 종교의 '자율성'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엘리아데는 한 종교 형태를 이해하는 방법은 다른 것과 비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사가들은 시간의 변화와 공간의 차이라는 조건을 들어 이에 반대하지만, 엘리아데는 종교에는 일반적 형태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종교 현상의 형태론적 보편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의 제우스 숭배는 'sky god'의 보편적 형태이며, 이는 여러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 엘리아데는 자신의 종교 개념을 [성과 속](1957)에서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고대인들은 명확히 다른 두 가지 차원(성과 속)에서 살았는데, '속'이란 가변적인 일상생활의 영역이고, '성'이란 초자연적, 비일상적, 항구적인 초자연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에게 종교는 성과 속의 분리(구분)에서 출발한 것이며, 이것은 모든 종교의 기본적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이 성의 감각은 특정 사회에서만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현대인들에게도 존재하며, 성에 대한 직관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속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고대인들에게 성은 보다 절대적이고 결정적이었으며, 그들은 성의 틀 안에서 생활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고대 그리스와 스칸디나비아 등 세계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신적 모델을 따라 살았던 사례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히에로파니의 장소와 관련된 사람들의 거주형식이다. 고대인들은 세계의 중심이라 여기는 곳에 기둥이나 기타 수직적 대상물을 세워 표시하고(axis mundi), 그것을 중심으로 구획을 나누어 조화로운 형태의 마을을 만들었다. 이는 창조주가 만든 태초의 세계를 모방하는 것이다. 한편 집을 짓거나, 마을을 세우거나, 혹은 출산하거나 하는 삶의 새로운 국면은 늘 창조의 재현으로 인식되었다. 성 안에서 살았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의도적 지향은 전락의 감정과 연결된다. 고대인들은 성으로부터의 분리라는 상태를 경험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낙원에 대한 향수'(nostalgia for paradise), 다시 말에 신에게 가까워지고, 초자연의 영역으로 돌아가려는 욕구를 갖게 된 것이다.

엘리아데는 이러한 기본 개념에 따라 성에 대한 상징과 신화의 분석으로 나아간다. 상징이란 유사성, 유비의 원리에 기초한 것으로, 종교경험의 영역에서 성과 유사한 것, 혹은 지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징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한편 신화도 역시 상징적인 것이지만, 상징보다는 더 복합적이고 이야기 형식을 취한다는 점이 다르다. 엘리아데는 [종교형태론](1949)에서 상징에 대한 광범위한 설명을 했다. 상징이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어떤 계기를 통해 성스러운 것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징에는 그 자체로서의 사물의 성격과 성스러움의 성격 두 가지가 병존하는 것이다. 엘리아데는 이처럼 '속'의 대상이 '성'의 대상으로 바뀌는 것을 '성의 변증법'이라고 개념화한다.

팔즈는 이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우선 하늘 상징이다. 천공신(sky god)에 대한 믿음은 고대인들에게 보편적이며, 세계 도처에서 발견된다. 하늘은 초월,무한,영원,주권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천공신은 사라진 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늘의 신은 너무 멀어서 다른 신 개념으로의 대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는 농경문화의 시작과 맞물려 진행되었는데, 고대인들은 농경의 풍요나 다산과 같은 맥락에서 중요한 비나 폭풍의 신을 섬기게 되었다. 이들은 구체적, 인격적 존재라는 점에서 천공신과 구별된다.

해와 달의 상징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뮐러가 신화의 중심이라 여겼던 태양숭배는 사실상 매우 드물었다. 오히려 달에 대한 신화와 상징을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달은 영원한 재생과 팽창의 상징이다. 달-비-다산-여성-뱀-죽음-주기적 재생의 모티프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달은 우주적으로 고갈되지 않는 생명과 실재를 드러내며, 인간 조건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이 외에도, 물과 돌, 대지와 나무, 식물 등의 상징을 광범위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이 모두는 생명의 순환, 무한에 대한 인간희망, 영원한 재생의 기대라는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엘리아데는 이러한 상징들이 역사 속에서 변천한다는 점, 다시 말해 인간은 역사 안에서 당대의 방식으로 성을 인식하고 상징화한다는 점을 제시했다. 그러므로 종교사학(history of religions)의 임무는 상징,신화,의례 및 체계를 발견하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변천한 것을 분석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엘리아데를 진화론자로 볼 수 는 없다. 그는 새로운 상징이 이전보다 발전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점을 들어 상징은 폭풍신이 천공신을 대체했듯이 퇴보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밝혔다.

엘리아데는 [영원회귀의 신화](1049)에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욕구는 '낙원에 대한 향수'를 의미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고대인들은 역사를 폐지(abolish)하고 태초의 시간으로 돌아가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고대의 의례는 창조의 재현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는 순수하고, 신화적이고, 근본적인 시간을 회복하려는 동기를 가지며, 진정한 의미는 역사 안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인식과 관련된다. 그러나 이런 고대 종교의 성격에 맞서는 두 차례의 반란이 있었는데, 그 첫 번째는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이다. 이 전통은 역사 '안에서' 성을 발견하였고, 따라서 역사는 성스러운 사건의 의미있는 연속이고, 신은 역사 속의 인격적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전통이 고대적 태도를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다. 유대교도 늘 바알종교의 다산성과 같은 유혹을 받았으며, 그리스도교도 주기적 재생의 의례적 맥락과 같은 농경문화적 유형을 완전히 불식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즉 유럽의 농민들이 견지해 낸 '우주적 그리스도교'의 고대적 성격이 지속된 것이다.

두 번째 반란은 모든 종교에 대한 부정이라 할 수 있는 현대 역사주의의 도전이었다. 성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인식에 바탕한 이 흐름은 사실상 첫 번째 반란인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의 원치 않는 의붓아들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유대-그리스도교적 전통이 먼저 자연의 '비성화'를 추진했고, 역사주의는 그 연장선상에서 더욱 나아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아데는 역사주의의 이런 도전이 과연 의미있는 발전인가에 대해 회의한다. 또한 현대에도 예술, 연극, 대중문화 등 여러 영역에서 고대적 사유가 남아있으며, 일상으로부터의 탈출과 낙원에 대한 향수가 현대인의 삶에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엘리아데 종교이론에 대한 비판은 그의 이론체계가 광범위한 만큼 여러 방면에서 제시되고 있다. 지구적 차원의 비교가 결국 피상성에 머물렀다는 지적, 중국종교와 이슬람을 제외시켰다는 것, 과학적이기보다는 직관적이고 사색적인 방법론이었다는 비판, '그리스도교 신학자'의 태도를 가진 종교적 인물이었으므로 그의 연구는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지적, 종교에 대한 일반이론의 수립을 위해 역사적 정황을 간과했다는 것, 그리고 이론체계 내에 개념적 혼란이 존재한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기능론적 환원주의를 반대하였다는 점, 그리고 다양한 세계종교에 대한 단일한 이해 체계를 구축했다는 점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그의 업적이다.

2. 논평 및 문제제기

1) 방법론적 의심, 그러나 의미의 공감(Nostalgia for Religion?)

종교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을 때, 논자 곁에는 늘 엘리아데의 저작들이 있었다. 엘리아데가 가르쳐 준 영원, 성, 신화적 시간에 대한 동경은 상처투성이 역사 속에 던져진 존재로서의 논자의 불안에 위안과 새로운 의욕을 불러일으켰던 힘이었기 때문이다. "영적인 삶으로 들어가려는 자는 항상 세속적인 조건에서는 죽고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성과 속]의 한 문장을 수 없이 되새겼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學'의 세계에 들어섰을 때 만난 것은 엘리아데에 대한 비판의 파노라마였고, 시니컬한 무시와 폄하가 대부분이라는 점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물론 학문적 엄밀성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유형적 연구가 갖는 '일관된 체계의 과도한 자기주장'이라는 위험성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었다. 종교 연구는 조각보 짜기와 흡사하다.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작은 천 조각을 연결하여 하나의 식탁보, 혹은 베개천을 만들 듯이, 특정한 종교 연구-지역과 역사적 정황에 근거한-의 토대에서 인간의 종교현상은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란 무엇이며, 인간은 왜 종교를 늘 가져왔는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은 다시 엘리아데의 자리로 돌아가게 한다. 聖에 대한 거부와 무시가 가장 강력했던 20세기를 관통하면서 엘리아데가 찾으려 했던 성스러움의 차원은 결코 제거되거나 말살될 수 없는 인간의 존재 상황이었다. 그것은' 인간다움'의 표식이며, 인간적 학문으로 종교학을 정초시키고자 했던 엘리아데의 '성'이기도 하다.

2) 종교에 대한 '종교적' 연구의 유의미성 - 비종교성의 판단중지

종교에 대한 엘리아데의 이해가, 그리고 '종교적 인간'에 대한 그의 확신이 모든 현대인에게 공통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는 고립될 수도 있다. 엘리아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의 차원은 남아있다고 강변하지만, 그것이 고대인이 경험한 성스러움과 같은 것이라고 하기에는 성은 너무 멀리 숨어버렸다. 결국 엘리아데의 이론은 그의 개인적 동기와 관련해서만 의미있는 것에 불과한가?

이 문제는 종교학의 종교 연구의 근본적 질문이기도 하다. 종교에 대한 연구는 종교학자가 아니더라도, 즉 사회학자나 역사학자, 그리고 문화이론가들도 할 수 있는 분야이다. 그렇다면 종교에 대한 종교학적 연구의 고유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다른 학제의 연구자들이 취하지 않는 종교학의 독특한 방법론과 태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엘리아데가 "신앙인의 입장에서 볼 때만 종교는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과 같은 것은 아닐까?

엘리아데의 비판자들은 그가 특정한 종교적 태도-우주적 종교이던, 그리스도교이던-에 근거해 있었던 것을 문제삼지만, 종교는 종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은 간과될 수 없다.  기어츠도 문화는 '원주민의 눈으로' 이해할 때 문화적 사실에 가장 '가깝다'고 했듯이, 설령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최소한 종교학자라면 자신의 '비종교성'을 판단중지하고 종교적 태도로 종교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종교학사 세미나](2000년 10월 12일), 지도교수 : 배국원,  제출자 : 정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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