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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안의 '차이'는 페미니즘의 장애물인가, 아니면 연대를 위한 전제인가

작성자손님|작성시간06.04.14|조회수120 목록 댓글 0

Sue Morgan, Feminist Approaches
                                                      

1. 여성 안의 '차이'는 페미니즘의 장애물인가, 아니면 연대를 위한 전제인가?

서구 페미니즘이 여성의 자각과 지위향상에 기여한 바가 있는 반면, 그 경험이 전 세계 모든 여성에게 동일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은 페미니즘의 딜레마중 하나이다. 그것은 19세기 말 페미니즘의 기원이 사실상 중산층 여성으로부터 시작한 한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페미니즘 역시 '보편'(남성에 대비되는 여성)과 '특수'(여성 안의 다양한 차이성)의 관계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영역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비-백인 Womanist들은 백인 여성의 종교적 페미니즘과 대비되는 독특한 경험의 '차이'를 강조한다. 즉 남성과 여성의 차이와 마찬가지로, 여성 안에도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Elizabeth Spelman은 한 여성의 인종적 정체성을 빼고 그녀의 성적 정체성을 언급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는 성의 문제가 인종, 계급, 문화를 초월한 단극적 대립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Delores S. Williams가 주장하듯, 완전한 인간해방은 모든 여성은 명백한 희생자이고 모든 남성은 박해자라는 일차원적 억압모델에 의해서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가부장제가 다양한 차원에 기반하고 있듯이, 페미니즘의 전략도 다양한 차원의 억압을 인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가난한 비 백인 여성의 경험을 페미니즘 안에 통합하며, 인종차별, 성차별, 계급차별 사이의 상호관계를 보다 명확히 인식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페미니즘은 무엇보다도 여성의 경험에 기반하는 것이므로 The Feminism이 아니라 A Feminism의 다양성은 페미니즘의 학문적, 실천적 성격인 것이다.

이러한 접근에 대해 기존 페미니스트 진영에서는 공동의 싸움을 방해하는 위험성이 있다고 하여 경계하지만, 즉 여성의 공통성을 훼손하면 누가 공동의 목표를 위해 싸우겠는가 하는 불안감을 표시하지만, 근본적으로 여성들 사이의 차이와 분리는 페미니즘의 장애물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여러 가지 차이들로 인한 여성의 현실을 보다 분명히 직시하며, 그 차이를 이해하고 비판함으로써, 그리고 수평적 연대를 통해 인간해방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2. 종교전통에서 페미니즘적 '분리주의'는 게토화를 초래하는 위험성만을 갖는가?

급진적 페미니즘은 기존의 종교 전통이 여성해방에 대해 어떠한 전망도 제공하지 않으며, 전통의 개혁 혹은 재구성은 근본적 해방에 기여할 수 없다고 진단한다. 그 결과 Mary Daly에서 보듯 남성의 개입을 배제한 대안적인 여성 중심적 세계의 창조를 지향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작업이 하나의 게토를 구상함으로써, 게토 바깥의 세계에 대해서는 포기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즉 Beverley Wildung Haeeison이 지적하듯 여전히 가부장적 현상 상태는 남으며, Carr가 지적하듯 그러한 배타성은 단기적 전략으로는 유용하나 장기적으로는 자멸의 위험성을 갖는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은 여성의 해방이라는 과제를 '통합적' 패러다임으로 전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데일리는 여성 억압의 구체적인 사회구조들에 집중하지 않음으로써 억압 자체를 '비역사화'하는 면이 있고, 또는 여성 엘리트주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내부적 개혁'과 '외부적 자극' 두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끊임없는 재해석 작업을 통한 내부적 개혁 또한 필요하지만, 그것을 보다 강하게 추동하기 위한 강도높은 외부적 자극 또한 필요한 것이다. [인형의 집]을 뛰쳐나온 노라와 같은 여성상을 통해 세계는 '충격받으며', 근본적으로 여성의 현실을 '다시 생각' 할 수 있는 것이다. 굽힌 것을 펴기 위해서는 굽힌 힘 이상의 힘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급진적 페미니즘은 외부적 자극의 전략으로, 개혁적 페미니즘 내부적 개혁의 노력으로, 그리고 양자는 보이지 않는 연대성을 실현했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3. 가부장적 구조는 모든 종교의 태생적 한계인가?

종교의 발전을 단선적 인류역사에 그대로 대입하여 가부장적 역사 과정에서 생겨난 모든 종교는 태생적으로 여성혐오적 태도를 일관되게 취했다고 할 수는 없다. 세계 종교가 모두 같은 시점에서 생겨나 똑같은 발전을 경험해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종교와 여성의 문제는 사회발전을 고려하면서, 동시에 그 종교의 독자적 발전경로를 추적함으로써 이해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각 종교의 초창기에는 여성해방적 측면이 매우 '급진적'으로 나타났다. 종교 창시자들은 기존 종교 전통에 대해 저항적 요소를 가지고 새로운 종교를 형성했으며, 그 동력은 기존 전통의 기득권층으로부터 억압당하는 민중, 여성, 소외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슬람, 그리스도교 등 유일신 종교에서는 그 성격이 명확하며, 불교나 유교의 원시단계에서는 후대처럼 여성억압과 폄하가 지배적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각 종교의 초기 단계에서 광범위하게 수용되었던 해방적 요소가 '제도화'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의 위계적 구조를 인입하여 억압적 내부구조를 형성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R.R Ruether와 같은 개혁적 페미니즘의 재해석 작업은 의미성을 갖는다. 종교 전통에 대한 재해석 작업을 통해 각 종교(특히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있어서 해방적 요소를 복원할 수 있으며, 또한 역사적 맥락의 추적을 통해 가부장제의 역사내적 기원 -남성우월성의 초월적, 형이상학적 기원이 아닌- 을 밝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데일리는 이에 대해 '아버지' 하느님, '아들' 예수 상징의 근본적 남성중심성은 극복할 수 없다고 -신이 남성이라면 남성이 신이기 때문에- 비판하지만, 그것을 역사적 제도화 과정의 산물이라고 평가한다면 하느님의 '모성성'의 재발견, 부당한 구조화의 역사적 연원 규명과 같은 작업을 통해 특정 '性'으로의 편중과 지배-피지배 관계는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4. 종교에 있어서 페미니즘의 전망 - 비판적 해석학, 통합적 인간관, 에코-페미니즘

피오렌자는 의심의 해석학, 선포의 해석학, 비판적 회상의 해석학, 창조적 실현의 해석학을 언급하며, 그 네 가지가 함께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했다. 이러한 작업은 여성억압의 전거를 허무는 지속적 재해석이라는 의미성을 간직한다. 이를 위해서는 성서의 문자적 사실보다는 역사적 사실 -페미니스트 예수, 초대교회의 여성 지도력 등- 에 권위를 부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류터나 피오렌자의 작업은 그런 맥락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페미니즘이 인간해방을 지향한다고 할 때, 이상적 인간상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것은 여성성과 남성성중 어느 하나가 우월하거나 열등하다는 대립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성이 무엇인지를 밝혀나가는 작업이다. 그런 면에서 융의 아니마, 아니무스 개념이나, 혹은 양성적 존재로서의 신, 인간에 대한 이해 등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 여자', '그 남자'가 아니라 '그 사람'이라는 인식으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종교 이해에 있어 서구 중심적 인간관을 탈피해, 동양적 인간관의 연구도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류터가 근본적 문제점으로 지적한 여성억압의 사상적 기제가 '이원론'이라 할 때, 즉 여성,자연,육체의 열등성이 페미니즘적 시야에서 폭로되었을 때, 몸과 자연과 여성은 동일한 해방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생태주의의 전망은 이 점에서 페미니즘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종교학사 세미나](2000.11.9), 지도교수 : 배국원,  제출자 : 정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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