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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미술을 찾아서 - 조정육 부처님의 상징 탑塔
1. 탑은 부처님의 무덤
10여 년 전 중국에 처음 갔을 때였다. 산 전체를 깎아서 만든 낙산 대불을 보고 그 규모에 혀를 내두른 적이 있었다. 산 전체에 부처를 새기고 탑을 조성하는 것이야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라 그리 낯설지 않았지만 문제는 그것을 조성하는 방식의 차이였다. 우리는 산에 놓여 있는 바위를 최대한 살리는 선에서 불상을 새긴다. 마애불이 들어 서 있는 경주 남산이나 월출산, 서산 등의 마애불을 보더라도 바위가 있는 면을 깎거나 다듬어 그 속에 잠들어 있는 부처상을 살짝 흔들어 깨운 듯한 느낌이 든다. 산 전체를 변형시켜 전혀 새로운 형식의 불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바위에서 먼지를 털어내고 말끔하게 다듬어 부처상이라는 생명있는 예술품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집을 짓거나 정원을 만들 때 가능한 한 자연을 살리는 범위 내에서 인공적인 미를 최소화한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우리 민족이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은 항상 자연 속에 파묻힌 듯한 편안함이 배여 있다.
중국 낙산 능운사 대불(789-803년)
그런데 낙산대불은 달랐다. 70미터가 넘는 산을 깎아 부처님 한 분을 조성했다. 하나의 컨셉이 정해지면 그 컨셉을 구체화하기 위해 나머지 부분은 가차없이 쳐내버리는 중국인들의 세계관이 놀라웠다. 무모하리만치 저돌적인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낙산대불을 보고 처음 나선 해외여행에서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받고 돌아왔다. 그런데 크고 거대하고 집단적인 문화가 오로지 중국인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캄보디아에 갔을 때였다. 앙코르와트에 세워진 불가사의할 정도로 거대한 사원과 탑을 보며 이 사원이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에서 영감을 얻어 세워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거대한 규모로 조성되는 사원에는 일정한 양식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확신은 도시 전체를 탑과 사원으로 세운 태국의 아유티야를 둘러보았을 때 더욱 분명해졌다. 그러니까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문화가 동남아시아를 거치면서 중국에 이르는 동안 바다처럼 넓고 태산처럼 높은 규모로 제작되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원칙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 바탕 위에서 인도의 석굴사원과 미얀마의 바간과 태국의 아유티야와 중국의 용문석굴이 일맥상통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크고 거대하게 지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불상과 탑 등 불교의 예배대상을 크고 거대하고 많이 제작한 것은 부처님의 위대성을 반영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부처님과 보살님의 존재성을 표현하다보니 규모가 커지게 되었던 것이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사원 : 불교와 힌두교의 교리가 뒤섞인 사원이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조영물이 탑이었다. 특히 고대 도시의 불교 유적지에서는 탑이 단연 돋보였다. 미얀마의 바간은 한 장소에 4천여기의 탑이 세워져 있고, 보로부두르는 사원 자체가 탑과 같다. 석굴에 불상이 조영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고 연대가 올라갈수록 탑이 절대적으로 많고 웅장했다. 불상이 만들어지지 않던 무불상 시대에 탑이야말로 최고의 예배대상이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무불상시대에 보리수와 금강좌와 불족적이 탑과 함께 똑같이 예배대상이었으면서도 유독 탑이 인기가 많았던 것은 탑이야말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신성한 무덤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2. 가장 인기 있었던 예배대상은 탑
탑은 고대 인도어인 범어로 스투파stupa가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중국식 발음인 솔도파率堵婆, 탑파塔婆로 불려지게 되었고 이것을 줄여 탑塔이라 부르게 되었다. 스투파는 원래 인도에서 ‘쌓아 올린다’는 뜻으로 쓰였는데 죽은 사람을 화장한 뒤 유골을 묻고 그 위를 흙이나 돌로 쌓은 무덤을 의미했다. 그 유골을 담은 함이 사리함이라고 했다. 사리함을 그냥 둘 수 없어 사리함을 꾸미고 장식하는 것이 바로 탑이다. 아쇼카왕(BC273-BC232)이 전국에 8만 4천 기의 탑을 세워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후 탑은 실질적으로 불교의 중요한 예배 대상이 되었다. 중국에서 수나라의 문제文帝가 전국에 탑을 세워 사리를 안치한 것도 탑이야말로 불교를 전파시키고 확산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조형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탑은 석가모니의 몸인 사리를 모신 건축물이라는 개념에서 더 나아가 탑이 곧 부처라는 개념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 부처 대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탑을 쌓거나 탑돌이를 함으로써 불교는 더 실재적인 종교로 인식되었다. 동남아시아를 여행할 때 불교유적지에 탑이 숲속의 나무처럼 많이 심어져 있는 것도 탑이 얼마나 인기있는 신앙의 대상이었는지 말해준다. 탑의 형태는 그 탑이 세워지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매우 다양한 재료와 형태를 띠고 있다. 또 그것을 만드는 재료에 따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벽돌로 만든 전탑과, 나무로 만든 목탑, 그리고 돌로 만든 석탑이다.
1) 벽돌탑-전탑
(인도의 산치대탑)
우리나라에는 전탑이 흔하지 않지만 인도와 동남아시아, 중국에는 전탑이 의외로 많다. 인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탑인 산치대탑은 벽돌과 흙으로 만들어졌다. 처음 만들어질 때의 원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산치 대탑은 기단 위에 반원형의 돔이 세워져 있고 그 중앙에 기둥이 박혀 있다. 그리고 맨 위에는 우산같은 산개가 세워져 있다. 돔의 형태가 반원형인 것은 이것이 ‘알’과 ‘자궁’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알과 자궁은 불교 이전부터 인도문화에서 생명의 근원과 존재의 기본적인 형태로써 상징되어 왔다. 또한 우주가 원형이라는 믿음과도 그 맥락이 닿아 있다. 돔의 중앙에 박힌 기둥은 그곳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반원형인 우주의 중심에는 수미산이 솟아 있는데 수미산의 중앙에 탑의 핵심인 석가모니의 사리가 놓여 있게 된다. 정상에 올려진 우산같은 원형 산개는 고귀함을 상징한다. 기단 주변에 울타리가 쳐져 있는 것은 이곳이 성역이라는 표시다.
(태국 프라 파톰 대탑)
(중국 철탑 :1049년)
복발형의 산치탑 형식은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다양한 형태로 변형된다. 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복발형은 종의 모양처럼 변형되기도 하고(태국의 프라파콘 대탑), 중국의 예처럼 누각식으로 발전하기도 한다(중국 철탑). 그러나 어느 경우든 가장 신성한 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의 예배를 받는 대상이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안동 지역을 제외하고는 전탑의 예가 그렇게 많지 않다.
2) 나무로 만든 탑-목탑 전탑 다음으로 많이 만들어진 탑이 목탑이다. 목탑은 인도에서는 그 예가 드문 편인데 중국과 한국, 일본 등 동양 3국에서는 목탑이 매우 많이 만들어졌다. 현존하는 목탑 중에서 가장 오래된 목탑인 중국의 응현 목탑(1056년)이나 선덕여왕 때 높이가 80M나 되는 황룡사 구층목탑이 세워진 것도 당시 목탑이 유행하였음을 말해준다. 목탑은 누각식으로 세워졌는데 이는 황제나 왕의 무덤을 지을 때 무덤 위에 목조로 만든 건물을 짓는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구려의 장군총 위에 목조 건축물이 세워진 것처럼 무덤과 집의 의미가 합쳐진 능침이 목탑으로 발전한 것이다. 집의 개념이 도입된 목탑은 신도들이 탑 내부에 들어가 기도를 할 수 있으며(쌍봉사 대웅전) 단청이나 탱화로 장엄하게 꾸밀 수 있다. 그러나 재료의 특성상 불에 약하고 오래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점차 목탑 대신 전탑이나 석탑으로 대체되었다. 백제의 미륵사지탑은 목탑이 석탑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탑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불궁사탑 :요대
한국 법주사탑 : 조선시대
3) 돌로 만든 석탑 석탑은 우리나라 탑의 대명사라고 할 만큼 우리나라 탑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탑이 처음 세워지던 삼국시대에는 목탑이 주를 이루었으나 점차 석탑으로 대체되었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는 양질의 화강암이 널려 있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으로 탑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특이한 것은 한국의 석탑은 다른 나라의 탑과 달리 위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초창기에는 황룡사 구층탑처럼 크고 웅장하게 지었다. 그런데 점차 석가탑이나 다보탑처럼 아담한 형태로 자리잡았다. 그것은 높은 탑을 지을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이미 삼국시대에 황룡사9층탑을 지을 정도로 우리 민족은 뛰어난 건축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거대한 탑은 넓은 평원에서나 어울리는 조형물이다. 우리나라처럼 산이 많은 곳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지평선이 보이는 넓은 평원에서는 건물이나 탑이 크고 웅장해야 위용을 자랑할 수 있다. 작으면 묻혀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크고 웅장해봐야 산에 가려지면 그만이다. 오히려 주변 산세와 어울리지 못해 흉할 뿐이다. 그래서 건물이나 탑을 세울 때 주변 산세와 어울리도록 배려한 것이다. 현재 전해지는 천 여기의 석탑들이 짜임새있는 규모의 높이와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자연을 먼저 생각하는 한국인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석탑은 불교 신도들의 예배대상으로서의 탑이 가지는 상징성은 그대로 간직한 채 한국적인 지형의 특성에 맞게 잘 부합되어 왔다. 다음에는 아름다운 우리나라 석탑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3. 우리나라의 탑
1) 가람배치 탑을 살펴보기 전에 탑이 세워진 가람배치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탑이 어느 위치에 세워졌는가 하는 문제는 당시의 예배 대상이 무엇이었는가를 묻는 문제와도 같기 때문이다. 가람배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탑과 금당(법당)의 관계이다. 평양의 청암리사지 가람(절)배치를 보면, 중앙의 8각 목탑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 그리고 북쪽에 금당이 배치된 ‘1탑3금당식’ 구도이다. 탑 하나에 금당이 세 개로 배치된 구도라는 뜻이다. 1탑3금당식 가람배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형식인데 고구려에서 먼저 확립되어 신라로 전래되었다(아래 그림 참조). 황룡사지는 금당이 탑을 둘러싸는 형태에서 금당이 북쪽에 세 개가 나란히 놓여지고 남쪽에 9층 목탑이 배치되는 구도이다. 금당이 탑을 에워싸는 형태에서 뒤로 물러나는 식으로 변형되었지만 이것 역시 탑 하나에 금당이 세 개인 1탑3금당식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백제의 가람배치는 남북으로 탑과 금당을 하나씩 두는 1탑1금당식을 선호했다. 군수리사지, 정림사지, 미륵사지의 절터가 모두 1탑1금당식이다. 미륵사지의 가람배치는 3탑 3금당이지만, 세 구역에 각각 회랑으로 구획함으로써 1탑 1금당 형식을 고수하고 있다. 1탑 3금당이나 1탑 3금당의 가람배치는 당시의 신앙형태가 탑이 중심이었음을 보여준다. 불상을 모셔놓은 금당이 탑을 중심으로 배치될 정도로 탑이 절대적인 예배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런 신앙구도는 통일신라에 들어오면서 쌍탑일금당식으로 바뀌면서 일대 전환을 맞이한다. 금당이 탑을 바라보며 건립되는 것이 아니라 금당 앞에 두 개의 탑을 거느리는 형식으로 바뀐 것이다. 쌍탑일금당식은 사천왕사지에서 처음 발생하여 망덕사지, 보문사지, 감은사지를 거쳐 불국사에 이른다. 탑보다는 금당의 역할이 강조된 가람배치다. 고려시대가 되면 금당을 강조하는 가람배치는 더욱 발전된다. 또한 금당 앞에 탑을 고집하던 원칙에서 벗어나 절이 들어선 지형이나 산세에 맞춰 탑을 배치하는 형식으로 자유스럽게 변화한다. 장흥 보람사나 남원 실상사처럼 기존의 쌍탑일금당식 가람 형식을 계승한 곳도 있지만 탑의 규모는 현저하게 축소된다. 그렇다고 해서 탑이 예배대상에서 멀어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고려시대에는 석탑의 건립이 전국적으로 확산 분포될 정도로 탑이 많이 만들어졌다. 비록 불상을 모신 금당이 가람의 중심이 되었지만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은 여전히 신도들의 마음 속에 신앙의 대상으로 굳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2) 우리나라 초기의 탑은 목탑 우리나라에 처음 불교가 전래된 372년(소수림왕2년)부터 6세기 후반까지는 주로 목탑이 많이 세워졌다. 삼국이 모두 누각형식의 다층목탑을 건립하였는데 사각형이나 팔각형의 평면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의 목탑지로 추정되는 평양 청암리사지(498년)와 대동 상오리사지가 각각 8각탑의 기단부를 하고 있다. 청암리사지의 목탑지의 너비는 24.5m로 탑의 높이는 약 61m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중국에 남아 있는 요나라 시기(1056년)의 가장 오래된 목탑 불궁사 응현 목탑과 비슷한 규모이다. 우리나라의 초창기 탑이 목탑이면서 그 규모가 매우 거대하고 웅장하였음을 의미한다. 백제는 부여 군수리사지와 익산 제석사지에서 사각형의 목탑 기단부가 확인되었고 신라에서 경주 황룡사지, 사천왕사지, 망덕사지, 보문사지, 기림사의 목탑지가 현재 남아 있다. 신라시대 목탑 중에서 황룡사9층목탑은 규모면에서나 예술적인 조형성에서 신라를 대표하는 탑이다. 신라 삼보 중의 하나로 신라의 자랑이 된 황룡사9층목탑은 그 높이가 80여미터에 이르렀는데 백제의 장인 아비지와 200여명의 장인이 세웠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탑 중에서 가장 높고 큰 목탑인 황룡사9층목탑은 고려시대까지 모두 여섯 차례의 보수를 거치면서 건재하다가 1238년 몽고군의 침입 때 불에 타 없어지고 말았다.
황룡사 9층 목탑 추정도
목탑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건축적인 기술과 함께 질 좋은 목재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있어 기온차가 심하기 때문에 나무가 반듯하게 자라지 못한다. 당연히 건축 자재로 쓸 만한 나무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나무는 온도와 습도에 민감할 뿐만 아니라 병충해에도 약하다. 또한 불에 약해 벼락이 치거나 사소한 부주의에도 쉽게 타 버릴 수가 있다. 아무리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이라 해도 성냥불 하나면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버리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세워진 탑이 돌로 만든 석탑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에는 질 좋은 화강암이 아주 풍부하다. 이런 상황에서 탑을 만드는 장인들은 목탑 대신 석탑을 생각해봤을 것이다. 예술가들이 예술작품을 만들 때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선택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탑을 세우는데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쓰지 않았던 돌이라는 재료를 선택했다는 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독창성이라 말할 수 있다. 인도에서 한반도까지 불교가 전래되어 오는 동안 벽돌이나 나무로 만든 탑은 쉽게 조영되었지만 석탑은 전혀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 삼국시대의 장인이 나무 대신 돌이라는 매체를 선택한 것은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 외에도 돌이라는 재료의 특성이 가지는 영원성과 항구성에 매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불에 의해 허망하게 사라져버리는 목탑에 비해 세월이 지나도 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돌이라는 매체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불법의 가르침을 구현해낼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3) 목탑에서 석탑으로 초기의 석탑은 목탑을 본뜨는 것에서 출발했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과정을 보여주는 탑이 익산 미륵사지석탑이다. 미륵사지탑은 기단부를 목탑처럼 단층기단으로 만들고 1층 탑신의 동서남북 네 곳에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문처럼 십자형 공간을 만들었다. 탑신의 기둥은 위쪽이 좁고 아래쪽은 넓게 한 민흘림기둥을 세워 시각적 안정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기둥 위에는 목조 건축의 창방같은 가로 부재를 올려놓았다. 그 위에 3단의 층급을 두어 마치 공포에서 서까래와 부연으로 이루어진 목조 건축의 지붕을 연상케한다. 석탑의 정면은 네 개의 큰 기둥이 받치고 있어 목조건축의 3칸 건물을 염두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지붕 모서리의 살짝 올라간 곡선은 목조 건축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흉내낸 것으로 이후 우리나라 석탑의 특징으로 자리잡는다. 지붕돌이 매우 얇아 우아한 곡선미가 느껴지고 탑신부가 웅장한 미륵사지탑의 조형미는 충청도와 호남 지역의 백제계탑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익산 왕궁리석탑, 부여 장하리삼층석탑, 서천 비인오층석탑, 무량사 오층석탑 등에서 백제 멸망 이후에 세워진 탑 등에서 미륵사지탑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미륵사지가람 배치도>: 중앙에 목탑이 세워져 있고 좌우에는 석탑이다. 금당과 탑이 세 개가 배치된 3탑3금당식이지만 각각의 탑과 금당은 회랑으로 구획되어 있어 1탑1금당식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미륵사지석탑>, 백제, 7세기, 14국보 11호, 전북 익산
4) 정림사지탑과 분황사지 모전석탑 백제의 장인은 적국인 신라에 초청을 받아 황룡사탑을 세울 정도로 건축기술과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삼국 중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술과 공예술을 가진 백제의 역사를 확인할만한 문화유산은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부여의 정림사지오층석탑이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빼어난 백제 예술을 느껴볼 수 있어 다행이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은 기단을 낮게 하고 1층 탑신을 높게 하면서 2층부터는 다시 탑신의 높이와 너비를 급격히 줄여 시선을 1층 탑신에 붙잡는 것이 특징이다. 지붕돌의 전각이 살짝 올라가서 날렵하면서도 경쾌한 느낌이 드는 이 탑은 미륵사지석탑과 마찬가지로 우주석, 면석, 기단석 등에 쓰이는 석조 부재가 목조건축처럼 장대석과 판석으로 구성되어 있어 역시 목탑에서 석탑으로의 변화과정을 읽을 수 있다. 이런 석조 부재의 결구는 통일신라 이후의 석탑 조영방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백제탑만의 고유한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정림사지오층석탑>, 백제, 7세기, 국보 제9호, 충남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과 비슷한 시기에 건립되었으면서도 백제의 미감과는 전혀 다른 삼국시대 탑으로 분황사모전석탑을 들 수 있다. 언뜻 보기에는 벽돌로 쌓은 전탑 같지만 자세히 보면 돌 하나하나를 벽돌처럼 깎아서 만든 석탑이다. 그래서 ‘전탑을 모방한 석탑’이란 뜻에서 ‘모전석탑’이라 부른다. 인도와 중국에서 유행하던 전탑형식의 탑이 신라에서 세워지게 된 것은 신라가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를 했던 사실을 입증한다. 선덕여왕대에 세워진 분황사모전석탑은 현재 미륵사지탑처럼 1층 탑신의 4면에 문이 만들어져 있고 그 곁에는 불국토를 지키는 금강역사상이 새겨져 있다. 현재 3층으로 복원되어 있는 분황사모전석탑은 원래의 모습이 어떠했는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여러 차례 개축과 보수가 이루어진 상태이다. 경내에 남아 있는 모전석의 양을 가지고 학자마다 원래의 탑의 높이를 7층에서 9층으로 각각 다르게 예측하고 있다. 7층이었을 경우 높이는 41.6M이고 9층이었을 경우에는 48.5M에 달하는 매우 높은 탑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분황사모전석탑>, 신라, 634년, 국보 제30호, 경북 경주시 구황동
4. 통일신라 탑
1) 신라 석탑의 원형- 의성 탑리 5층 석탑 삼국시대 탑이 목탑에서 석탑으로의 전이 과정을 보여준다면 통일신라 탑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한국 석탑의 전형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최초의 예가 의성 탑리 5층 석탑이다. 미륵사지탑은 석탑이지만 목탑의 형식을 돌로 바꾸어놓은 듯한 탑이다. 분황사탑 역시 돌로 만들었지만 전탑의 형식이다. 그런데 의성 탑리 5층 석탑은 분황사탑처럼 화강암을 다듬어 쌓은 탑이지만 전탑 형식과는 전혀 다른 조형미로 전환되었다. 1층 탑신 기둥에 목탑형식의 기둥과 기둥머리(주두)를 표현한 것은 목탑의 잔영이 남아 있지만 그 흔적은 미미하다. 무엇보다도 의성 탑리 5층 석탑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기단부 형식이 성립이다. 석탑의 특징이라 말할 수 있는 기단부는 8세기 이후 석탑에서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되는데 의성 탑리 5층 석탑에서 확실히 갖추어져 있다. 그러니까 의성 탑리 5층 석탑은 석탑식 기단과 목탑식 기둥, 그리고 옥개석의 낙수면이 층으로 이루어진 전탑식을 혼용한 과도기적인 탑이다. 이전까지 내려오던 목탑과 전탑의 유산을 물려받았으면서 새로운 신라탑의 원형이 담긴 탑이라 말할 수 있다.
1.<의성 탑리 5층 석탑>, 신라, 7세기 말, 높이 9.6m, 국보제77호, 경북 의성 탑리동
2) 신라탑의 시원 양식- 감은사지 쌍탑 의성 탑리 5층 석탑이 석탑의 시원양식을 갖추었다면, 금당 앞에 탑이 두 개가 배치되는 쌍탑식 가람은 통일직후 세워진 사천왕사지(679년) 목탑에서 시작되었다. 석탑이 본격적으로 세워지는 통일신라 때도 여전히 목탑은 지속적으로 세워지고 있었다. 사천왕사지의 외에도 망덕사지, 보문사지 등에 쌍탑의 목탑터가 남아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유구가 없어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 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목탑이 아닌 석탑으로 된 쌍탑식 가람의 시원은 682년에 세워진 감은사지탑에서 찾을 수 있다. 통일신라 탑으로는 가장 높고 장중한 쌍 탑이 세워진 감은사는, 죽어서 동해의 용왕이 되어 왜구를 물리치고 불법을 지키겠다는 문무대왕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절이다.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감은사탑은 동서로 쌍탑이 배치되었는데 사리장엄구가 봉안된 3층 탑신까지 연결된 찰주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탑의 형식은 의성 탑리 5층 석탑을 따르고 있지만 목탑과 전탑의 개념을 과감하게 벗어나 진정한 석탑의 전형을 갖추었다. 전탑에서 볼 수 있던 옥개석의 낙수면은 계단식이 아니라 한 면으로 처리되었고, 목탑의 흔적인 네 귀퉁이의 귀기둥 위에도 더 이상 기둥머리를 표현하지 않았다. 의성 탑리 5층 석탑에서 시작된 기단부는 더욱 발전하여 2층이 되었다. 이후 2층 기단은 한국 석탑의 기본으로 자리매김한다. 기단을 2층으로 결구함으로써 탑신부는 더욱 높아지고 그 결과 탑이 매우 안정감이 느껴진다. 의성 탑리 5층 석탑과 감은사지탑의 가장 큰 차이점은 중량감과 더불어 안정감일 것이다. 탑의 규모가 큰 만큼 기단부가 넓어져 1층 기단부는 귀기둥과 함께 3개의 가운뎃기둥이, 2층 기단은 귀기둥과 함께 2개의 가운뎃기둥이 세워졌다. 탑신의 네 귀퉁이의 귀기둥은 별도의 돌로 세우고 그 사이에는 돌 한 장으로 면을 막았다. 탑신이 워낙 넓다보니 한 장의 돌로 만들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여러 개의 돌을 쓴 것이다. 지붕돌 아래 받침은 5단이고 낙수면은 완만하며 지붕의 네 모서리 끝이 경사를 이루며 살짝 올라가서 무거운 지붕돌이 날렵하고 경쾌한 느낌이 든다. 중후한 무게감과 완벽한 균형미가 돋보이는 통일신라초기의 탑으로는 감은사지탑 외에도 고선사지 삼층석탑과 나원리 오층석탑을 들 수 있다. 감은사탑이 규모가 커서 우람함과 장중함이 느껴진다면 8세기 중엽에 세워진 불국사의 석가탑은 규모가 작아지는 대신 세련됨과 날렵함이 느껴진다.
2. <감은사지 3층석탑>, 통일신라, 682년, 높이 13.4m, 국보 제112호,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3)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경전-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
통일신라 미술의 정점을 이룬 석굴암과 불국사는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만들어졌다. 김대성는 751년(경덕왕 10년)에 전생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현생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지었다고 한다. 여기서 전생부모는 김대성 자신의 부모도 되겠지만 삼국 통일의 과정에서 죽어간 고구려, 신라, 백제의 모든 죽은 사람들을 의미할 것이다. 반면 불국사는 살아있는 김대성의 현생부모의 의미와 김대성이 살고 있는 신라를 의미한다. 석가탑과 다보탑은 불교의 경전인 『법화경』의「견보탑품」을 바탕으로 세워진 탑이다. 석가탑의 정식 명칭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이고 다보탑은 <다보여래상주증명탑>이다. 석가여래 이전의 부처였던 다보여래는,『법화경』을 설법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탑 모양으로 솟아나 그 설법이 거룩하고 진실하다는 것을 찬탄하고 증명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그런데 석가여래가 『법화경』을 설하자 다보여래가 탑의 형상으로 땅에서 솟아올랐다. 이 경전을 근거로 석가여래와 다보여래가 함께 앉아 있는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은 조각작품과 벽화로 수없이 많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탑의 형상으로 조성된 것은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이 유일무이하다. 그 이전에 세워진 탑이 석가여래의 사리를 봉안한 예배대상이었다면, 불국사에서는『법화경』을 설하고 있는 석가여래(석가탑)와, 탑의 형상으로 솟아올라 증명하는 다보여래(다보탑) 두 분의 부처님을 형상화하였다. 경전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르침이 돌이라는 구체적인 물상을 통해 육화된 것이다. 이제 『법화경』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더 이상 생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현실속에서 실재하고 있는 것이다. 석가탑의 위대함은 비단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석가탑의 사리장엄구와 함께 발견된『무구정광대다라니』는 8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밝혀졌다.
3.<석가탑과 다보탑>, 통일신라, 751년, 경북 경주시 진현동 (삽도)<신구 원년(518)명 금동이불병좌상>, 중국 육조시대, 프랑스 기메 국립동양미술관
4.(왼쪽)<석가탑>, 통일신라, 8세기 중엽, 높이 8.2m, 국보 제21호 5.(오른쪽)<다보탑>, 통일신라, 8세기 중엽, 높이 10.4m, 국보 제20호
이런 의미가 담긴 석가탑의 구조는 감은사지탑의 형식을 그대로 이어받아 상·하 이중 기단부를 조성하였다. 다만 귀기둥 사이에 세워진 가운뎃기둥이 상·하 기단 모두 두 개씩인 것이 차이점이다. 석탑의 규모가 작아진 만큼 기단부도 작아졌음을 알 수 있다. 탑신부의 지붕돌과 몸돌도 귀기둥을 따로 만들지 않고 각각 한 장의 돌로 만들었다. 지붕돌받침이 5단인 것이나 낙수면의 완만함, 지붕 끝의 반전은 감은사지탑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이렇게 몸집을 줄이고 살이 빠진 석가탑은 감은사지탑의 웅장함 대신 날씬함과 함께 절묘한 세련미를 얻었다. 석가탑이 신라탑의 전통 위에 서 있다면 다보탑은 전통보다는 경전의 내용에 충실하게 만들어졌다. 「견보탑품」의 1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때, 부처님 앞에는 칠보탑이 있었는데 그 높이가 오백 유순이요 가로와 세로는 이백 오십 유순이라. 땅으로부터 솟아 올라와서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가지가지 보물로 장식되어 있으며 오천의 난간과 천만이나 되는 방이 있고 무수한 당번으로 장엄하게 꾸미었으며, 보배로 된 영락을 드리우고 탑 위에는 만억의 보배풍경을 달았으며, 동서남북 사면에는 다마라발전단의 향기가 나서 세계에 두루 가득차과 모든 번개와 일산들은 금, 은, 유리, 자거, 마노, 진주, 매괴 등의 일곱 가지 보배로 이루어져 그 높이가 하늘나라 사천왕 군전까지 이르렀다.’
직선이 강조된 석가탑이 단정하면서도 절제의 미가 돋보인다면 곡선이 강조된 다보탑은 우아하면서도 여성적인 미가 두드러진다. 전혀 다른 개념으로 세워진 두 탑은 다름으로 해서 더욱 아름답다. 다보탑과 석가탑의 조형성은, 형이상학적인 경전의 문구를 돌로 치환하여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경전이 되게 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석가탑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석탑으로는 황복사지 삼층석탑, 갈항사지 삼층석탑, 장항리오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4) 화엄사 사사자석탑과 서오층석탑, 다보탑의 계단 위쪽에는 사자 한 마리가 놓여져 있다. 불법을 수호하는 성스러운 동물인 사자는 원래는 네 마리였으나 현재는 한 마리만 남아 있을 뿐이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셔 놓은 탑의 기단부에 사자를 배치하는 형식의 다보탑은 여러 조각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는 듯 화엄사 사사자석탑을 비롯하여 금강산 금장암지 사사자석탑, 사자빈신사지 사사자석탑, 홍천 괘석리 사사자석탑 등 전국 각지에서 세워진다. 이래서 좋은 작품은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촉매제가 된다. 그 중에서도 화엄사 사사자석탑은 사자탑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다보여래의 출현을 다보탑으로 만든 상상력도 대단하지만, 기단부의 2층을 네 마리 사자로 전환시킨 사사자석탑의 조형감각도 그에 못지 않다. 탑이라는 기본 틀은 유지하면서 거기에 작가의 천재적인 발상이 더해진 사사자석탑의 출현은 당시 작가들이 탑에 대해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천착했는 지를 여실히 증명해준다. 일정한 양식 속에서 작가의 개성도 표현해야하는 종교작품을 만든 작가로써 어찌 고민 없이 사사자석탑같은 탁월한 작품이 나올 수 있겠는가. 1층 기단에는 한 면에 각각 세 명의 천인상이 조각되어 있고 1층 기단에는 연꽃대좌위에 앉아 있는 네 마리 사자와 중앙의 인물상이 세워져 있다. 1층 탑신에는 네 면 모두 중앙에 문이 조각되어 있고 그 문을 좌우에 서 있는 신장들이 지키고 서 있다. 네 면에 새겨진 신장들은 금강역사와 사천왕, 제석과 범천으로 모두 불법을 수호하는 신들이다. 다보탑에서 보던 4마리 사자가 화엄사 사사자석탑에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신장상과 천인들까지 총출동하여 사리함을 지킨다. 이 탑의 남쪽에는 탑을 바라보는 공양석등이 있는데 탑을 향하여 화사석 아래에는 무릎을 꿇어 앉은 인물이 조각되어 있다. 화엄사 창건 연기스님은 효성이 지극했는데 탑 상층기단의 4마리 사자에 둘러 쌓여 있는 어머니에게 차를 공양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이렇게 독창적이고 기발한 탑의 모습은 그 자체로 경이롭고 감동을 주었는 듯 이와 비슷한 탑들이 여러 곳에 세워지는 데 특히 사자를 배치한 2층 기단 중앙에 인물상을 조각해 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6.<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통일신라, 8세기 말, 높이 5.5m 국보 제35호.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7.<사사자석탑 2층 기단부>와 <공양석등>
5) 특별한 개성을 지닌 파격적인 탑 800년대가 되면 다보탑이나 사사자석탑이 아니라도 독특한 개성을 지닌 파격적인 탑들이 많이 등장한다. 정혜사터 13층 석탑처럼 1층 탑신을 제외한 나머지 탑신이 급격히 작아지는 탑이 등장하는가 하면, 해인사 원당암 삼층석탑처럼 화강암이 아닌 청석암으로 조성된 탑도 나타난다. 경북 지역에는 봉감 모전석탑, 현이동 모전석탑, 삼지동 모전석탑 등 분황사지의 전통을 잇는 모전석탑이 집중적으로 조성되고, 안동 신세동 칠층 전탑처럼 모전석탑이 아니라 직접 벽돌을 구워 만든 전탑도 나타난다.
8.(왼쪽)<정혜사지13층석탑>, 높이 5.9m, 통일신라, 경북 월성, 국보 40호 9.(중앙)<해인사 원당암다층석탑>, 높이 2.38m, 통인신라, 경남 합천, 보물 518호 10.(오른쪽)<안동 신세동칠층전탑>, 높이 14.6m, 통인신라, 경북 안동, 국보 16호
수많은 세월동안 탑을 조성하면서 얻은 자신감 속으로 탑을 세우거나 쌓는 작가들은 틀에 박힌 형식의 탑만을 고집하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개성적인 탑을 창조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창의적이면서도 자유스런 사고방식은,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탑을 세워야한다는 전통파들에게도 일정하게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신라탑의 전통을 계승한 문경의 봉암사삼층석탑처럼 기단부가 하나인 경우도 있고, 남원 실상사 3층 석탑처럼 지붕돌받침이 5단에서 4단으로 줄어든 경우, 실상사 백장암 3층 석탑처럼 쌍탑이 아니라 하나만 조성되는 경우도 있다. 파격적인 탑이 워낙 많이 세워지다보니 그 자유스런 공기를 함께 호흡한 고지식한 전통파들도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유스런 사고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11.(왼쪽)<봉암사삼층석탑>, 높이 6.3m, 통일신라, 경북 문경, 보물 169호 12.(가운데><실상사삼층석탑>, 높이 8.4m, 통일신라, 전북 남원, 보물 37호 13.(오른쪽)<실상사 백장암삼층석탑>, 높이 5m, 통일신라, 전북 남원, 국보 10호
전통을 계승한 탑이나 개성적인 탑이나 모두 나름대로의 미감을 지니지만 신라 장인이 세운 탑 중에서 탑의 이념과 신라인의 특색이 가장 잘 구현된 탑을 꼽으라면 필자는 단연 용장사지 삼층석탑을 들겠다. 경주 남산 서남쪽 용장골 암반 위에 세워진 삼층석탑은 높이가 4.5m로 그다지 크지 않은 아담한 탑이다. 그러나 보기에는 다른 탑과 별 차이가 없는 이 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탑이다. 그것은 1층 기단부가 산 꼭대기 바위이기 때문이다. 바위 윗부분을 다듬어 1층 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2층 기단과 탑신을 올렸다. 그 결과 경주 남산은 산 전체가 탑의 기단부가 되어 그야말로 산 그대로 탑이 되었다. 자연 그대로의 바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탑의 형식은 형식대로 갖춘 셈이다. 산 꼭대기에 돌 조각 몇 개 올려놓음으로써 평범한 산이 불국토가 되었다. 이 탑이 있음으로 해서 신라 사람들은 굳이 산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고 산자락 곁을 걷기만 해도 탑돌이를 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할 수 있었는 지 용장사탑을 볼 때마다 그 절묘한 작가의 발상에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게 된다.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놔 둔 상태에 인간의 간절한 마음 하나를 슬쩍 올려 놓는 행위. 그런 민족이 바로 우리 민족이다. 인간의 욕심보다 자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전통은 우리 민족의 독특한 유전인자임이 틀림없다. 그 유전인자는 안성 청룡사 대웅전, 담양 소쇄원, 삼척 죽서루, 개심사 종루 뿐만 아니라 휘어진 시골집의 서까래와 대들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인간과 환경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 해답은 경주 남산 용장사탑을 보면 찾을 수 있다. 다음 회에는 탑의 마지막으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탑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14.<용장사지 삼층석탑과 기단부>, 높이 4.42m, 통일신라, 보물 제186호, 경북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5.고려시대
통일신라 탑이 왕도인 경주 일대에 몰려 있다면, 고려시대 탑은 전국적으로 건립되었다. 물론 숫적으로는 왕도인 개경 부근에 많이 만들어졌다. 고려시대 탑은 국가적인 건립이 특징이다. 호국불교적인 성격이 강하고 국가적 사원이 많이 건립된 만큼 탑도 마찬가지였다. 법왕사, 법륜사, 자운사, 내재석사, 천선사, 신흥사, 문수사, 원통사, 지장사, 금나사 등 10대 사찰이 개경에 세워졌고, 도성 안에만도 70군데나 불사가 있었다. 더불어 개경을 벗어나 전국적으로 국가적인 조영이 이루어졌다. 개경의 칠층 석탑의 건립, 고구려의 옛수도인 서경에 구층탑 건립, 신라의 고도 경주의 황룡사 구층 목탑의 중수, 백제 구도 부근인 익산 왕궁리 오층 석탑의 건립, 후백제군을 격파한 천호산 개태사 건립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불상이나 탑의 조성에 순수 지방 토착 세력이나 백성들이 대거 참여하여 양식상의 다양한 변화 초래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 탑은 지역에 상관없이 신라탑의 전통을 계승한 신라계 탑과, 한강 이북에 분포된 다각다층구조의 고구려계 탑 그리고 충청남도와 전라도 일대의 백제계 탑으로 나눌 수 있다.
1) 신라계 석탑 고려시대에는 5층 이상의 다층탑이 유행하였다.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신라계탑은 날렵하고 경쾌한 통일신라탑에 비해 둔중하면서도 완만한 느낌이 드는 것이 특징이다. 그것은 2층 이상의 탑신과 지붕의 비례 때문이다.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감은사지탑과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의 탑신부를 비교해보면 두 탑의 차이점을 금새 알 수 있다. 감은사지석탑은 2층 이상이 탑신에 비해 지붕이 높게 설정되어 있다. 즉 지붕 아래의 층급받침이 지붕의 낙수면과 거의 높이가 같다는 뜻이다. 그래서 탑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은 각층의 지붕에 가 닿아 탑신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반면 남계원지 탑은, 2층 이상의 탑신과 지붕의 높이가 같거나 탑신이 강조되어 있다. 탑신받침이 거의 느껴지지 않도록 3단이나 그 이하로 약화시키고 지붕의 곡선만을 강조하여 탑신이 높은 모습이 느껴진다. 통일신라탑이 지붕이 강조되었다면, 고려시대탑은 탑신이 강조되었다.(똑같은 높이에서 올려다 본 감은사지탑은 2층 이상이 지붕만 보이는 반면, 남계원지탑은 지붕과 탑신이 모두 보인다). 그 결과 5층 이상의 다층탑이면서 체감률이 완만하여 둔중한 느낌을 갖게 한다.
1)(왼쪽) 감은사지 3층석탑의 탑신부 2)(오른쪽)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의 탑신부
역시 신라계 석탑인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은 신라양식을 충실히 계승하였으면서 탑신 괴임대에 연화문이 조각된 판석 1매를 끼워 넣어 약간의 변화를 시도하였다. 정도사지 5층석탑은 하층기단 면석의 각 면에 3구씩의 안상이 조각되어 있고 안상 안에 귀꽃문이 조식되어 있다. 이런 변화 외에도 기단 덮개돌에 층급이 없다는(있어도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 고려시대 탑의 특징이다. 통일신라 탑이 기단덮개돌에 부연이라는 층급을 두어 2단으로 설정해 날렵한 것에 반해 고려시대 탑은 층급이 느껴지지 않아 둔중하면서도 화강암의 괴량감이 느껴진다. 이 계통에 속하는 탑으로는 청양 정산의 서정리9층석탑, 현화사칠층석탑을 비롯하여 경기도 광주의 춘궁리3층석탑, 안성죽산리5층석탑, 김제 금산사5층석탑, 충남 천흥사지5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3)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도판90) 4)정도사지 5층석탑(도판91)
2) 백제계탑:정림사지탑과 미륵사지탑의 형식을 따르는 탑. 백제계 석탑은 정림사지탑과 미륵사지탑의 형식을 계승한 탑으로 백제의 옛 영토인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지역에서 주로 만들어졌다. 충청도지역의 탑은 무량사5층석탑, 부여장하리삼층석탑, 계룡산남매탑, 사천군 비인5층석탑을 들 수 있고, 전라도 지역의 탑은 익산 왕궁리5층석탑, 정읍 은선리3층석탑, 김제 귀신사3층석탑, 옥구 군산리 3층석탑, 강진 월남사지3층석탑 등이 포함된다.
5)<부여 장하리 3층석탑> 6)<계룡산남매탑>
7)<익산 왕궁리 5층석탑> 8)<강진 월남사지 3층석탑>
백제계 석탑의 특징은 먼저 기단부가 좁고 낮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림사지 5층석탑에서부터 내려오는 전통으로 1층 탑신부 지붕돌의 처마 넓이보다 기단부의 넓이가 더 좁다. 기단부가 높고 넓은 신라탑 계통과는 전혀 다른 전통이다. 또 다른 특징은, 각 부재들이 따로 따로 결구되었다는 것이다. 신라계 석탑은 대부분 지붕돌과 지붕받침이 하나의 부재로 만들어진다. 백제계 석탑에서는 그다지 크지 않는 탑에서도 굳이 지붕돌과 층급 받침을 다른 부재로 만들었다. 이것은 목조를 석조로 변형하는 과정에서 목조 구조의 특징을 보이는 정림사지탑과 미륵사지탑의 전통이 계승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다보니 기단부와 탑신의 면석이 편평한 신라계 탑에서는 각 면에 팔부신중이나 가릉빈가 등이 조각되는 것에 반해 백제계 탑에서는 조각이 생략된다. 서로 다른 부재들의 결구만으로도 충분히 시각적인 볼거리를 제공한 셈이다. 시각적으로 백제계 석탑의 개성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특징은 지붕돌에 있다. 지붕돌의 추녀가 얇고 경사도가 높지 않아 마치 얇은 돌판 한 장을 올려놓은 것처럼 편평하게 느껴진다. 장하리 3층 석탑처럼 지붕돌과 지붕돌의 받침 부분의 넓이가 크게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지만 월남사지 3층석탑처럼 아주 완만하게 경사진 경우도 있다. 그러다보니 월남사지탑에서는 지붕돌의 내림마루 부분과 탑신의 괴임 부분이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신라계 석탑과 백제계 석탑의 차이점은, 같은 전라도 지역에 있는 고려시대 탑이면서 신라계 양식을 이어받은 화엄사 각황전 앞 마당의 5층 석탑과 정읍 은선리3층석탑을 비교해봐도 금새 알 수 있을 것이다.
9)<화엄사 5층석탑> 10)<정읍 은선리 3층석탑>
3) 고구려계탑과 운주사탑 고구려계탑은 현재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청암리사지와 상오리사지의 목탑지 발굴에서 본 바와 같이 고구려탑의 특징은 8각 평면에 5층 이상의 다층 구조였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탑으로는 평북 영변 보현사8각13층석탑, 평남 대동 원광사지6각7층석탑과 율리사지 8각5층석탑, 광법사8각5층석탑, 평양 경상 영명사8각5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백제계나 신라계 석탑의 특징이 모두 4각인데 반해 고구려계 석탑은 모두 6각이나 8각의 다각이라는 점과 층수가 5층에서 13층까지 매우 높은 것이 특징이다. 기단부를 연꽃으로 장식하여 마치 활짝 핀 연꽃 속에 탑을 모셔 놓는 것같은 형상이다. 기단부에 연꽃을 조각하는 방식은 고구려계 석탑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석탑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러나 4각 기단의 연꽃이 단지 밋밋한 평면을 장식하는 수준의 느낌이라면, 꽃잎의 형상을 닮은 8각 기단의 연꽃은 그야말로 돌로 피어난 연꽃을 보는 것 같다.
11)<월정사8각9층탑> 12)<신복사지 석탑과 보살상>
그 예를 월정사8각9층석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월정사탑은 현재 남한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고구려 계통의 다층탑이다. 연꽃이 조각된 2중 기단 위에 8각 탑신부가 완만한 상승감을 느낄 수 있도록 올려져 있고 맨 위에는 화려한 장식의 상륜부가 장식되어 있다. 탑신의 지붕돌은 1층부터 3층까지는 두 개의 돌로 결구되었고 나머지 층은 한 개의 돌이다. 마지막으로 규모가 작은 8층 지붕돌과 9층 탑신은 한 개의 돌로 조각되었다. 연꽃 봉우리가 벌어진 듯한 각 층의 지붕돌 처마아래에는 각이 지는 모서리마다 8개의 풍경을 달아 놓아 바람이 불 때마다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듯하다. 고려시대 탑이나 석조보살상의 광배 끝에는 풍경을 달아 놓은 예가 많다. 월정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신복사지의 탑과 보살상이 그 예에 해당될 것이다. 탑 앞에 향로를 든 약왕보살이 한 쪽 무릎을 세우고 탑을 향해 예배하는 신복사지탑의 구도는 월정사탑과 공통된 현상이다. 그런데 고깔모자를 쓴 것 같은 신복사지의 보살상의 두광 끝에는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충청도 지역의 대조사의 보살상 두광도 마찬가지다)
13)<신복사지 보살상> 14)<대조사 보살상>
고려시대 탑을 마무리하면서 꼭 언급하고 싶은 탑이 화순 운주사에 있는 천불 천탑이다. 운주사는 통일신라말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경내에 있는 불상이나 탑의 양식을 보면 통일신라보다는 고려시대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운주사에 천불과 천탑이 있었다고 적혀 있으나 현재는 21기의 탑과 93구의 불상이 남아 있다. 처음에 천 개의 불상과 천 개의 탑이 조성되었으나 모두 없어지고 현재의 유구만 남아 있는 지 아니면 ‘천불 천탑’이 많다는 의미로 쓰였는 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한 장소에 탑과 불상이 운집해 있다는 것이 운주사의 가장 큰 특징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탑과 불상을 조각하는 수법이 투박하면서도 시골스런 미감이 배여 있는 것이 더 큰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운주사탑은 그 어느 곳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파격의 미가 담겨 있다. 기단부와 탑신부와 상륜부의 꼴은 갖추었으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특히 도너츠를 쌓아 올리듯 큰 돌덩어리를 적당히 다듬어 지붕돌과 몸돌을 구분한 탑은 아방가르드의 전형이다. 그러나 그 아방가르드 속에는 의식적으로 파격미를 돌출해내기 위한 현대미술가의 억지스러움이 없다. 도저히 세련된 도시양식에 물들 수 없이 그저 그러한 형상으로밖에 빚을 수 없었던 순박한 그 지역민의 정서가 고스란히 배여 있다. 아름다운 탑이라면 이 정도는 갖추어야 한다는 조건들이 운주사탑 앞에 서면 얼마나 부질없고 허망한 미망이었는 지 새삼 깨닫게 된다. 일정한 표준을 정해놓고 그 형상을 닮게 뜯어 고치고 성형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형미인만이 미인이 아니라 현재 이 모습 이대로 아름다운 생명체를 가진 미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자기 가진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곳. 그곳이 운주사다. 그래서 운주사탑은 마음 속 고향처럼 아름답다.
15)<운주사탑>
6. 조선시대 탑
지금까지 인도 산치 대탑에서 운주사탑까지 대략적인 탑의 흐름과 특징을 살펴보았다. 불상보다 먼저 예배의 대상이 되었던 탑은, 삼국시대 때 처음 조성된 이래 고려시대까지 줄기차게 이 땅의 곳곳에 세워졌다. 불교가 국교였던만큼 불교의 중심 예배 대상인 탑의 조성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러나 불교 대신 유교가 국교였던 조선시대가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임금의 스승이었던 스님들은 사대문 안에조차 들어갈 수 없는 천민같은 신분으로 전락한다. 당연히 불사도 줄어들었고 뛰어난 불교 예술품의 제작도 현저하게 감소한다. 세종이나 세조처럼 불교를 옹호한 군왕이 정치를 펼칠 때는 일시적으로 불교가 부흥할 때도 있었지만 감히 고려시대와 비교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살펴보게 될 탑이 경천사지 10층석탑(1348년)과 원각사지 10층석탑(1467년)이다. 경천사지탑은 고려 충목왕 때 세워진 탑이고, 원각사지탑은 그로부터 100여년 뒤인 조선 세조 때 세워진 탑이다. 그런데 탑의 층수나 대리석이라는 재질, 조각 수법 등이 두 탑이 쌍둥이처럼 똑같다. 어떤 이유로 똑같은 형식의 탑이 조성되었는 지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16.<경천사지10층석탑> 17.<원각사지10층석탑>
과거에는 탑의 재료로 쓰지 않던 대리석을 사용한 것도 이례적이지만 亞(아)자형 평면 구조에 낮은 3중 기단, 기단과 동일한 형태의 높은 3층 탑신, 그 위에 사각형 탑신과 상륜부가 결합된 독특한 구조의 탑이다. 이런 구조는 원나라 라마탑의 영향이 반영된 것으로 특히 상륜부의 형식은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의 상륜부와 함께 전형적인 라마탑 형식이다. 경천사지탑의 아름다움은 독특한 구조뿐만 아니라 탑 전체를 가득 채워 넣은 조각상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단단한 화강암이 아니라 부드러운 대리석 재질인만큼 경천사지탑의 각 면은 조각가의 기량이 마음껏 펼쳐져 있다. 원래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경천사지에 세워졌던 경천사지탑은 1909년 일본인이 불법으로일본으로 반출하였다가 큰 물의를 빚자 1919년경에 다시 반환한 탑이다. 40여 덩어리로 분해되는 과정에서 부셔지고 허물어진 채 반출된 탑은 반환된 후에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1960년 경 복원되어 경복궁에 공개되었다. 1995년에 다시 한 번 해체 복원된 탑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1층에 전시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천사지탑을 본 뜬 원각사지탑 이외에도 여러 구의 탑들이 조성되었다.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을 비롯하여 지리산 벽송사 삼층석탑, 수종사 8각5층석탑 등 전대의 형식을 계승한 탑들이 꾸준히 조성되었다. 그러나 탑의 조형감각이 무뎌지고 퇴조되어 이전 시기에 느낄 수 있었던 한국 석탑의 긴장감과 비례의 아름다움은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이 글은 『붓다의 나들이』2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다음에는 부처님의 상징 두 번째인 ‘불족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조정육)
무진당 조정육 선생 약력 전남대 불어불문학.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한국회화사 전공.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박사학원 수료. 고려대 명지대에서 한국미술사 강의. 목원대 미술사학과 겸임교수 겸 미술평론가.
[조선의 글씨를 천하에 세운 추사 김정희] [조선시대 회화사 1- 꿈에 본 복숭아 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시대 회화사 2 - 가을 풀잎에서 메뚜기가 떨고 있구나] [신선이 되고 싶은 화가 장승업] [붓으로 조선산천을 품은 정선] [한 폭 종이에 낙원을 불러온 안견] 외 십여 책이 있다.
무진당 조정육 - 미술평론가 교수
원불사한국불교개혁源佛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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