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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개론] 찰나멸 찰나생

작성자조티카|작성시간12.03.23|조회수1,476 목록 댓글 1

[질문]모든 존재는 ‘찰나멸 찰나생의 흐름’으로 파악하라는 말씀은 이해합니다.

문제는 ‘찰나멸 찰나생의 흐름'이란 개념 자체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전에 <중론>(용수 저, 청목 주석, 김성철 번역, 경서원 간행)을 읽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책에서 단멸론과 상주론을 극복하는 중도의 길로 제시된 ‘상속’이란 개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책의 ‘상속’과 여기의 ‘흐름’이란 말은 번역상의 차이일 뿐 동일한 개념으로 보입니다.
이 ‘흐름’이란 개념이 잘 파악되지 않는 이유는 ‘찰나’, ‘생멸’ 같은 개념이 온전히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용수의 논법을 따라(주로 해체해서 보는 방법을 즐겨 사용하는데, 제가 아는 한 이 논법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논법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시간이나 사물’을 여실히 꿰뚫어 살펴보게 되면 ‘찰나(를 포함한 시간이)란 본디 없다. 생멸은 본디 없다.’는 결론이 너무나 명백하게 다가오게 되고, 이렇게 되면 ‘찰나멸 찰나생’이란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연속적인 시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데 찰나멸 찰나생이란 개념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찰나멸의 찰나’와 ‘찰나생의 찰나’가 서로 다른[이시의] 찰나라면 그것은 ‘단멸론’에 빠지게 되고, 그것이 같은[동시의] 찰나라면 그것은 ‘상주론’과 차이를 갖기 어렵습니다.

찰나멸 찰나생이란 개념 하나하나는 깊이 생각하면 아주 명백한 사실로 받아들여지는데, 이 둘을 ‘흐름’이니 ‘상속’란 개념과 결합시켜 이해하려 하면 ‘단멸’이거나 ‘상주’라는 개념 사이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5년 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아무튼 ‘찰나’라는 개념이 어떤 형태로든 시간 개념의 하나로 사용되는 것이라면, 이러한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시간은 있다’, ‘시간은 없다’ 이 두 주장 모두 잘못된 것은 명백해 보이는데, 그 ‘있다, 없다’는 개념을 넘어선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흐름, 상속’이란 개념 또한 그 ‘있다, 없다’는 차원에서 이해하려 해서 생기는 모순인 것 같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제가 선정 체험을 통해 여실히 사실을 보게 될 때(제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만 온전히 알게 될 개념이겠지만, 현재로서는 이해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답답함을 금할 길 없습니다.
각묵 스님. 제게도 도움을 주십시오. 우둔한 저를 위하여 ‘찰나멸 찰나생’에 대한 좀 더 쉽고 구체적인 설명 부탁드립니다.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답변글] 법우님의 글은 너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의 그래도 내로라는 불교학자들의 견해이기 때문이고 .. 저도 아비담마를 만나기 전에는 굳게 가진 견해였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려 유위법의 찰나생/찰나멸은 결코 절대로 ‘단멸론’이나 ‘상주론’이 아닙니다.

찰나와 상속을 두고 단멸이니 상주 운운하신다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찰나이기 때문에 상주를 극복하고 상속이기 때문에 단멸을 극복한다는 상식적인 이해가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찰나를 두고 실재론적이나 상주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비담마의 기본전제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찰나를 다시 일어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세 [아찰나]로 분해해서 이해하기 때문에 찰나는 결코 실재나 상주가 아닙니다.

그리고 법을 실유니 가유니하는 자체가 중관학파에서 사용한 것이지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에서는 이런 관점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스님들과 많은 불자님들과 토론도하고 논쟁도하고 하여 나름대로 다 설득?하였습니다.

 

그리고 저희 까페의 묻고 답하고 게시판을 통해서 못되어도 10개이상의 답글을 제가 올렸고 그리고 초기불전연구원 소식 게시판에 올린 불교신문에 기고한 저의 글들 등을 통해서도 잘 밝히고 있습니다.

부디 이들 글들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본 글의 아랫부분을 참조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중관적인 모든 선입견들을 떨쳐버리고 이참에 진지하게 아비담마 공부를 해보실 것을 권합니다.

물론 아비담마는 반야중관의 직관을 빙자한? 조급함으로는 절대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

<용수 스님의 논법이 부처님의 논법과는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보는 관점에 따라서 그렇게도 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용수스님이나 초기 중관학파의 논법을 우리는 쁘라상기까(Prasanggika) 즉 귀류논증이라 합니다.

이것은 좋게 말하면 귀류논증이지만 속된 말로하자면 상대의 말꼬리를 잡고 딴지걸고 물고 늘어지는 논법입니다.

상대가 뭐라 하면 그것을 모순을 드러내는 논법이기 때문입니다.

중론에는 자신의 주장이나 교학체계가 없다고 학자들은 평가합니다.

중론이 제일 크게 비난받는 부분입니다.

남의 딴지만 거는 논법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비난을 받다보니 세월이 가면서 중관학파안에서 청변(淸辨; Bhaavaviveka) 계의 스와딴뜨리까(Svaatantrika, 자립파, 자주논증?)이 생기게 될 수밖에 없고 중관학파도 교학적인 토대로 유식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중도와 용수의 중도는 엄청 다르다고 해야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용수의 중도를 법우님처럼 받아들여서 이해하면 이것은 중도를 빙자한 극단이고 과격함이고 치우침이고 옹졸한 도일뿐이라고 저는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논리를 부처님의 초기경전에 들이대면 부처님의 직설을 차원 낮은 가르침이나 외도의 가르침으로 호도하는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관심을 가지고 봤는데 세계의 불교학자들도 중론에 대해서는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고 게다가 한국의 스님들이나 학자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우리 화엄학림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스님들도 통일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중론은 직관을 강조하다보니 자의적으로 해석할 소지를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초기경전에서 중도는 예외 없이 팔정도를 말합니다.

어디에도 중론과 같은 논법을 중도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결코 인연소생법 아설즉시고 역위시가명 역명중도의라는 것은 견해의 문제일 뿐입니다.

 

이런 것을 부처님께서는 중도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양극단을 여의고 가운데에 의지해서 법을 설한다는 표현은 몇 군데 등장하지만 중도는 반드시 팔정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용수 스님은 자신의 견해와 주장을 맛지마빠띠빠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팔정도인 중도는 용수스님에 의해서 다른 개념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늘 강조합니다.

대부분의 스님들과 학자들은 대꾸하지 못합니다.

아무튼 중론에서 중도를 이렇게 변질시키고 곡해함으로 해서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이 고구정녕히 말씀하시고 강조하신 팔정도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 아닌가 저는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이런데도 용수 스님의 중도가 부처님의 중도입니까?

절대 아니지요.

 

그런데도 용수 스님의 논법이 부처님의 논법과는 다르지 않다고 할 수있을까요?

본질을 호도하는 위험이 크게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연기의 가르침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측면에서는 저는 중론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중론의 직관적인 태도도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분석적이고 해체적인 방법은 최종적으로는 무상고무아의 직관으로 귀결될 것입니다.

분석과 해체의 끝은 직관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분석과 해체가 없는 한국불교에서는 이런 직관이 소설을 쓰는 방법론이 되어버리고 직관이라는 이름으로 정말 어처구니없는 말을 불교라는 포장으로 내뱉는 여러 사람들을 보면서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잘났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다만 중론의 직관이 극단으로 가면 부처님 원음까지도 부정해버리는 모순이 생긴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러한 논법으로 해탈열반을 실현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성자가 될 수 있느냐하는 것이겠지요.

저는 회의적입니다.

귀류논법을 들이댈 때는 그럴싸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탐진치가 다시 득시글거린다는 것입니다.

팔정도나 37보리분법같은 수행을 하지 않는데 빠라상기까 논법만으로 견해만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있다는 것은 로또 복권 당첨의 논리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20여년간 나름대로 중관적인 견해를 중심에 두고 살아온 저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중관적 직관은 바르게 받아들이면 수행에 도움은 되지만 그것만으로는 자기문제가 해결이 안된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초기불교를 생명으로 삼는 자이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초기불전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아래에서 적어볼 방법론으로 가야 생사문제든 괴로움의 문제든 자기문제든 장부일대사든 그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원만한 가르침이고 팔정도로 귀결되는 멋진 중도의 가르침이라고 받아들입니다.

해탈열반과 깨달음을 지향하는 초기불교의 틀을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보면 이러합니다.

첫째, 부처님께서는 나라는 존재나 세상이라는 존재 등의 존재일반을 법(dhamma)이라는 기준으로 해체해서 설하십니다.

그것은 초기경의 도처에 나타나며 청정도론에서 정리하고 있는 온처계연 등입니다.

즉 오온, 12처, 18계, 12연기 등입니다.

 

둘째, 이렇게 존재일반을 법들로 해체해서 보면 드디어 무상이 보이고 괴로움이 보이고 무아가 보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셋째는 이렇게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봄으로 해서 존재일반에 염오하게 되고 존재일반에 대한 탐욕이 빛바래게 되고 그래서 해탈하게 되고 혹은 소멸로 정의되는 열반을 실현하게 됩니다.
이것이 초기경의 도처에서 설해지는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세 가지 교학적인 단계입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 존재일반을 해체해서 보는 기준이 법인데 이 법을 아비담마에서는 고유성질(自性, sabhaava)이라고 부릅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고유성질을 가진 개별적인 법들의 특징을 자상(自相, sabhaava-lakkhan*a)이라고 옮겨셔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습니다.

물질과 정신이 왜 다릅니까?

탐욕과 성냄이 왜 다릅니까?

느낌과 인식이 왜 다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각각의 법들 즉 물질, 정신, 탐욕, 성냄, 느낌, 인식 등등의 각각의 법들의 고유성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주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해석입니다.

아비담마에서는 이렇게 멋지게 법들의 차이를 설명해냅니다.

그래서 이 방법론은 불교 2600년사의 모든 학파에서 그대로 채용합니다.

북방 아비달마에서 그리고 반야부에서 그리고 유식에서 그리고 화엄에서도 강조하고 강조하는 법들의 분류 기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법들로 해체해서 보면 드디어 법들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가 보입니다.

개념적 존재로 뭉뚱그려두면 이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자아니 진인이니 영혼이니 중생이니하는 개념적 존재로 그대로 두고 보면 영원불변하는 자아나 진인 등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들을 색수상행식이나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안식이식 등으로 해체해서 보면 무상이나 고나 무아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어떤 법이든 모든 유위법들은 모두 모두 이 무상/고/무아라는 세 가지 공통되는 특징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비담마에서는 보편적 성질(saaman$n$a-lakkhan*a)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중국에서는 공상(共相)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북방아비달마 반야중관 유식 화엄에서도 그대로 다 채용해서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제법의 보편적 성질 즉 공상인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봄으로 해서 해탈열반을 실현하고 깨달음을 실현한다는 것이 또한 모든 불교사 흐름의 공통되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무상고무아를 봅니까?

초기경전들에서는 팔정도를 위시한 37보리분법(조도품)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수행의 전문적 방법에 따라서 사마타(止)와 위빳사나(觀)로도 나눌 수 있고 염/정/혜(念定慧, 마음챙김, 삼매, 통찰지)로도 나눌 수 있고, 계/정/혜 삼학으로도 나눌 수 있고 더 확장하면 계/정/혜/해탈/해탈지견의 5법온으로도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초기경전에서 강조하고 강조하는 구체적인 수행법들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자상-공상-해탈의 이러한 세 가지 강조점은 이미 초기불전의 중심 교학으로 튼튼히 토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빼버리면 불교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할 정도로 초기불교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수행법으로는 37보리분법으로 도처에서 정리되어 나타납니다.

이것이 불교가 불교인 이유입니다.

후대의 불교들이 강조점에는 차이가 나지만 모두 이런 교학과 수행을 받아들여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불교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특히 남북방 아비담마/아비달마는 <自相을 통한 共相의 확인>이라 정리됩니다.

고유성질의 특징(자상)에 따라서 법들을 분류하고 이들 가운데 특정 법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공상)를 통찰할 것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비담마/아비달마는 중국에서 對法이라 번역하였듯이 ‘법에 대해서’를 강조하기 때문에 제법의 자상에 따른 분류를 중시하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분류하는 것은 무상고무아의 공상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기본에 깔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교교학을 하는 이유와 목적이 없어져버리기 때문입니다.

특히 상좌부 아비담마는 여기에 투철합니다.

 

물론 북방 아비담마 체계 가운데 가장 강력하였던 설일체유부는 부파의 명칭이 보여주듯이 제법의 자상을 확인하는 것을 엄청나게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제가 존재한다는 말을 그들의 부파명으로 삼았습니다.

북방 아비달마 교학의 기본서적이 되는 구사론은 제법을 고집멸도의 사성제의 입장에서 심도깊게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제법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는 고성제와 그 원인이 되는 집성제에 구사론의 대부분을 할애할 정도로 제법의 자상 혹은 고유성질의 입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무상고무아의 보편적 성질 즉 공상을 무시했다고 한다면 이것은 천부당만부당한 말입니다.

열반과 열반을 실현하는 도닦음(각각 멸성제와 도성제)도 엄청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강조점의 차이일뿐이지 남북 아비담마/아비달마는 모두 자상을 통한 공상의 확인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 사람은 무식한 사람이거나 자기 학파의 논리만을 내세우는 옹졸한 사람일 뿐이고 상대를 형편없는 사람으로 보는 정말 상식이 없는 무뢰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비담마/아비달마 특히 구사론을 위시한 북방 아비달마가 이처럼 제법의 자상의 입장을 너무 많이 강조했기 때문에 반야부 특히 용수의 중론은 제법무아로 특징지어지는 공상을 치우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야부의 경전들에도 제법의 자상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가 CBETA로 직접 확인한 것입니다.

자상을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법들의 구분이나 차이나 분류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지 공상을 훨씬 더 강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특히 용수의 중론은 공상의 입장을 엄청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상을 이야기하면 실유를 이야기하는 것이 되어 외도의 가르침이라는 듯이 극단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비달마가 자상을 많이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비판하기 위함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자상을 실유라고는 절대로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중관학파들이 스스로 지어낸 이론일 뿐인 셈이지요.

초기불교부터 아비담마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이나 직계제자들은 법을 실유니 가유니 하는 기준으로는 절대로 살펴보지 않습니다.

법은 찰나생/찰나멸로 보았습니다.

찰나생이기 때문에 단견(단멸론)이 아니고 찰나멸이기 때문에 상견(상주론)이 아닙니다.

찰나생/찰나멸은 이렇게 두 가지를 척파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상윳따 니까야의 깟짜나곳따 경(S12:15)에서도 “깟짜야나여, 세상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한 없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한 있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생과 멸로 세상과 제법을 보지 않으면 이것은 단견이나 상견에 빠지고 맙니다.

그리고 찰나생/찰나멸의 상속을 말하지 않으면 이것은 엄청난 단견이 되고 맙니다.

한 순간에 멸하고 다시 일어나지 않는데 세상은 왜 존재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합니까?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요?

허망한 것이라고요?

이렇게 이해하는 일부 학자들 때문에 인도에서부터 외도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지요.

부처님은 세상을 법으로 해체해서 보실 것을 강조하셨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절대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일부 초기경들을 이상하게 들이댈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문맥을 무시한 인용일 뿐입니다.

오히려 부처님께서는 12처라는 법수들을 일체라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 일체인 존재나 세상은 찰나생멸의 상속(흐름)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불가입니다.

이렇게 너무도 상식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방 아비담마/아비달마와 대승의 아비달마인 유식은 찰나와 상속을 강조하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기준은 무위법(열반)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무위법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해서 가법이라는 논리를 세워서 부정해버리면 그것은 현실을 설명해내지 못하고 현실을 설명해내지 못하면 구세대비의 종교는 되지 못하며 무엇보다도 자기 이론이나 주장이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되기 마련이고 떠돌이는 곳 망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중관학파가 지금까지 존속하는 것은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와 유식이라는 교학과 수행체계를 튼튼히 갖춘 불교가 있기 때문이지 중관학 자체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운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가유니 실유니 가법이니 하는 기준은 용수나 중관학자들이 자기들이 세상과 불교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만들었을 뿐이지 초기불교나 아비담마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설일체유부를 중관에서 주장하는 실유로 이해하는 것에는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물론 아비담마에서는 개념 혹은 가설(pan$n$atti)이라는 말을 아주 많이 씁니다.

이것은 법으로 해체되지 않고 뭉쳐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니 자동차니 볼펜이니 컴퓨터니 산이니 강이니 하는 것 등등 우리가 이름지어 알고 있는 것은 모두 개념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두면 무상/고/무아가 보이지 않고 무상고무아를 보지 못하면 이욕-소멸-해탈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위에서 강조한 것처럼 세존께서는 이렇게 온-처-계-연 등의 법으로 해체하신 것입니다.

그런 것이지 법으로 해체된 상태를 두고 가법이니 실법이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관학자들은 법에다 가법 실법이라는 기준과 잣대를 들이대서 법을 바라보고 이전 불교를 비판합니다.

이것은 중관학파가 독창적으로 반들어낸 기준일 뿐입니다.

만일 이런 기준을 가지고 이전불교를 비판한다면 중론은 불교가 아닙니다.

왜? 부처님이 말씀하시지도 않은 기준을 자기들 멋대로 만들어서 부처님까지도 외도로 비판해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론은 이처럼 과격합니다.

 

자칫 중론은 중도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극단적이고 편협하고 과격하고 옹졸한 관점을 설하는 것이 아닌지 두렵습니다.

저는 자상-공상-해탈을 평등하게 강조하고 있는 초기불교의 입장이야말로 진정 중도적인 입장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초기불교에서는 팔정도를 중도라고 불렀지 그 어디에도 잘해봐야 정견밖에 안되는 공가중 삼관을 중도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팔정도로써 해탈열반의 실형을 위한 방법론을 중도로 말씀하신 부처님 직설에 대한 엄청난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편협하고 치우치고 옹졸해질수 있는 태도일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아무튼 중론을 중심한 중관학파에서 이 이처럼 중도를 빙자한 극단적인 이론을 전개하자 다시 유식이 등장하여 자상을 포용하고 있습니다.

이 입장은 아비담마의 입장과 같습니다.

물론 유식에서는 제법의 개별성과 독자성을 인정하기 보다는 시대정신의 반영이겠지만 제법을 아뢰야식이라는 마음의 현현으로 설명하고 그래서 아뢰야식의 찰나생찰나멸을 통한 전변과 흐름을 통해서 무상고무아 특히 무아를 확인하려합니다.

그 확인방법으로는 자량위 등의 다섯 단계의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상을 통한 공상의 확인이라는 아비담마의 입장은 잘 계승하고 있습니다.

법의 고유성질(자)상을 인정하지 않으면 불교는 전개되지 않습니다.

오온의 서로 다른 점 12처의 서로 다른 점 12지 연기의 서로 다른점 제법의 서로 다른 점은 고유성질이 서로다르기 때문인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법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식적인 태도를 버려버린다면 그것은 너무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누가 뭐라면 쁘라상기까(Prasanggika) 좋게는 귀류논증이지만 속된 말로하자면 상대의 말꼬리를 잡고 물고늘어지는 그런 논법으로 상대의 의견을 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생대의 의견을 부정하면 내가 해탈이 됩니까?

아니겠지요.

괴로움을 말하면 괴로움은 본래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의 분명 괴로움을 강조하셨고 고성제 안에 오온을 말씀하셨고 모든 유위법들은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런데 괴로움이 본래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면 괴로움이 없어집니까?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와 무명을 말하면 이것도 본래 없다고 합니다.

본래 없다는 말로 갈애와 무명이 해결됩니까?

아니지요.

뭐 할 말은 너무 많습니다만 이정도로 줄입니다.

물론 법우님은 저의 이런 단순한 구도의 말에 반박할 소지가 엄청 많으시리라는 것도 다압니다.

그러므로 이런 논의를 하는 자체가 희론일 뿐입니다.

 

부처님은 분명히 고집멸도를 불교의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방편설이라는 말씀은 초기겅전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방편이니 승의제니 공이나 가니 가유니 실유니 하는 희론은 중론이나 반야부 스스로가 지어낸 정말 희론에 지나지 않는 관점일 뿐입니다.

법우님이 가지신 중론적인 양도논법과 귀류논법은 버리시는 게 좋다고 감히 말씀드리고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교를 보는 법우님의 시각은 5년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평생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저도 아비담마를 이해하기 전 20년간은 철저한 중론의 논리를 가졌다고 할 수있습니다.

그런 자취가 아직도 많이 남아서 제 글은 날카롭고 남의 가슴을 찌르고 양도논법이 난무하고 귀류논법도 난무한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그렇지만 이제 제게는 초기불교와 아비담마가 교학의 토대로 튼튼히 자라한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편하고 행복합니다.

법우님께서도 이러한 양도논법과 귀류논법을 버리고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의 관점을 있는 그대로 보실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부디 가슴을 열고 초기경전과 아비담마를 있는 그대로 한 번 받아들여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찰나는 ‘상주론’이 절대로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상좌부 아비담마에 의하면 찰나는 고유성질을 드러내는 최소단위의 시간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찰나는 일어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모든 주석서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이것을 sub-moment라고 옮기고 있고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아찰나>라고 옮겼습니다.

그러나 이 아찰나라는 술어는 주석서의 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찰나는 전문술어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이것은 고유성질이 없기 때문입니다.

 

찰나를 아찰나로 쪼갤 수는 있고 아찰나를 다시 아아찰나로 아아찰나는 다시 아아아찰나로 ... 이렇게 쪼갤 수는 있지만 이렇게 아찰나로 쪼개버리면 법이 가지는 고유성질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전문술어로 표현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비담마 논사들의 얼마나 철저한 태도입니까?

그러므로 불교사의 적통이라고 자부하는 상좌부에서의 찰나는 절대로 상주론이 아닙니다.

찰나도 이미 흐름일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마 중관학파의 가유나 가법의 입장과 거의 같을 것입니다만 상좌부에서는 이런 찰나의 법을 가유니 실유니 하는 관점에서는 관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찰나는 당연히 조건발생 즉 연이생입니다.

그리고 전찰나의 법이 멸하는 바로 다음찰나의 법이 조건발생합니다.

그러므로 단멸론도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남북아비담마/아비달마와 유식에서는 등무간연(等無間緣)이라하여 아주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전찰나가 멸하면 후찰나로 이렇게 흘러갑니다.

그러니 단멸론도 상주론도 아닙니다.

이렇게 찰나와 흐름을 멋지게 설명해냅니다.

이런 것을 상주론이니 단멸론이니 하는 양도논법으로 왈가왈부하려는 것은 초기불교부터 전개되는 불교의 기본입장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오히려 극단적이고 외도들이나 좋아할 방법론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히려 찰나만을 이야기하면 그것은 단멸론이 되고 지속만을 이야기하면 그것은 상주론이 됩니다.

찰나와 상속을 말하기 때문에 오히려 단멸과 상주를 극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둘을 ‘흐름’이니 ‘상속’란 개념과 결합시켜 이해하려 하면 ‘단멸’이거나 ‘상주’라는 개념 사이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는 것>인지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법우님 스스로가 찰나를 고정불변한 것으로 확정하신 뒤에 스스로가 확정한 것을 스스로가 비판하는 것이 아닌지 싶기도 합니다.

부디 찰나나 제법이 단멸이라거나 상주라는 선입견을 버리십시오.

이러한 선입견이야말로 중론이 법우님을 얽어매어버린 극단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제가 보기에 법우님은 무위법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위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 같은데 무위법은 논리나 사량분별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무위법에다 찰나와 상속을 들이대면 곤란합니다.

물론 저는 반야중관의 직관을 좋아하고 존중합니다.

무아의 천명이 없으면 그것은 불교가 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불교교학의 기본전제를 무시한 직관은 곤란하다고 봅니다.

저는 오히려 초기불교의 맥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상좌부 아비담마의 자상을 통한 공상의 확인을 더 멋진 설명으로 봅니다.

물론 북방 설일체유부는 자칫하면 찰나를 실유론으로 오해할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도 저는 인정할 수 있습니다만 그들이 기본 전제로하는 사성제설의 입장에서 제법의 유의 입장을 강조하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들도 절대로 제법이나 찰나를 실유론적인 입장에서 해석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야합니다.

또 적다보니 말이 길어졌습니다.

이것이 저의 주특기입니다.

왜 이리도 말이 많은지 ...
사실 처음에는 간단하게 비판하고 실상사로 한 번 오시라고 그래서 차 마시면서 이야기하자고만 적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무성의한 답변인 듯하기도 하고 법우님의 견해를 통해서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의 입장도 제 스스로 한번 정리해보고 싶었고 그래서 적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길어졌습니다.
물론 이 정도로도 법우님의 의문이 해소가 안될 거라 생각합니다.

글이란 게 꼬리를 물기 시작하면 엄청나게 길어지고 할 말이 많아지니까요.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을 적는 수밖에 없겠네요.

제가 실상사있을 때 꼭 한번 찾아오십시오.

해제하면 실상사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차한잔하면서 이야기 해봅시다.

글이란 게 특히 저처럼 말 많은 사람의 글이란 게 한계가 많습니다.

그런데 법우님하고는 잘 통할 듯합니다.

왜냐고요? 법우님의 글을 읽으니 꼭 젊은 시절, 20대 때 강원도 안가고 선방만 다니면서 중관의 입장을 제식으로 이해해서 남들과 논쟁하고 저의 사상으로 사고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던 그때의 저의 논리와 비슷하기 때입니다.

이 글을 읽고 법우님이 하실 말씀이 많을 것입니다만 가급적이면 질문글은 올리지 마시고 한번 찾아오십시오.

법우님이 올리실 글에 또 제가 답글을 적으려면 제가 지금하고 있는 상윳따 니까야 해제 달고 서문 달고 주해를 통일하는 작업에 무리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아래에 내려가서 인터넷에 연결해서 글을 읽고 USB로 다운받아 가져와서 나름대로 진지하게 답글을 달아서(이런 답글이란 게 한 번에 되는 것이 아니지요. 여러 번 생각하고 해야니까요 그러면 또 시간이 엄청 흐르지요...) 그리고 다시 내려가서 올리고 여기에 대한 답글이 있으면 내일 가서 또 살펴보고 하는 일이란 게 생각보다 쉽지 않고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는 일입니다.

제가 오죽 근기가 하열했으면 번역하기에 훨씬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 할 수있는 한국을 떠나서 태국으로 나와서 방에만 스스로 갇혀서 이렇게 번역하고 주해달고 해제 달고 하면서 끙끙대겠는가를 잘 혜량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제 말만 많이 늘어 놓아서 현문우답이 된게 아닌지 염려스럽습니다.

그리고 아는 것도 아무 것도 없으면서 막 거칠게 큰소리치는 듯한 답글을 올린 점 널리 섭수하여 주십시오.

어제 오후에 적은 글인데 오늘 오전에 좀 줄여서 올릴까하다가 법우님의 문제해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싶은 심정으로 줄이지 않고 대충 글만 다듬어서 모두 다 올립니다.

늘 행복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각묵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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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샘터 | 작성시간 12.06.16 시간을 두고 곱씹어 봐야 겠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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