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민 전도사 청소년 시절 이야기(1)

작성자김태복|작성시간19.09.22|조회수477 목록 댓글 1

(참조: 벙커원교회 담임 교역자를 교우들이 이해하는 데 다소간에 도움을 주기 위해 제가 2012년에 발간한 달란트 교육이라는 책에 쓰여진 김용민 전도사 부분만 발췌하여 몇 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합니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보면 용민이는 너무 특이했다. 한 번은 초등학교 때 방학을 맞아 교사였던 엄마가 두 형제를 앉혀 놓고 그 학기의 과학 실험을 다 시켜볼 요량으로 촛불을 켜놓고 제1단원에 나오는 불꽃 모양불꽃의 온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던 용민이가 갑자기 불이야!” 하고 소리치는 것으로 웃음보들이 터지면서 결국 공부는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아무리 생각해도 용민이는 별종이었다.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어 성적은 겨우 중상위권에서 맴돌았지만, 말솜씨 하나는 뛰어났다. 아마 말을 배울 당시 할아버지와 할머니 틈에서 자란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다른 교회와 연합운동회를 개최할 때는 중계방송을 맡아 교우들의 칭찬을 한 몸에 받기도 했고,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선생님이 가르치다가 지치면 용민이를 불러내 동화를 구술하게 할 정도였다.

 

라디오방송, 특히 <기독교방송>이나 <극동방송>을 자주 청취해 방송 내용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또 용돈이 생기면 복음송가 테이프를 구입해 방 안에 몇 박스의 테이프가 쌓이기도 했다. 이런 이력 때문에 대학생 시절 극동방송에서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할 때는 방송국 직원들보다 더 복음송가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누나처럼 어린이 명작 읽기를 강조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아 아내가 청계천 헌책방에서 만화로 된 세계사나 과학책을 사다 읽힐 정도였다.

 

대신 용민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신문읽기를 좋아했고, 중학교 때부터는 사설을 열심히 읽은 것이 오늘날 이렇게 많은 글을 쓸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문을 열심히 읽다보니 중학교 때 이미 웬만한 한문을 터득할 정도가 된 것은 여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용민이는 자신이 쓴 나는 꼼수다 뒷담화보수를 팝니다라는 책에서 자신의 어렸을 때 모습을 이렇게 회고했다.

 

또래 아이들이 다 그렇듯이, 나도 텔레비전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어렸을 때에는 다른 아이들처럼 만화영화에 푹 빠져 있었지만, 초등학교 3학년쯤부터 친구들과는 다른 길(?)을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스포츠에 관심을 가지다가 점점 다큐멘터리나 뉴스로까지 관심 분야가 넓어졌다. 중학교 1학년 때 쯤에는 뉴스를 보고 친구들에게 시사에 대한 나름대로의 어쭙잖은 비평까지 늘어놓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때 장래희망이 지금 내가 밥 벌어 먹고사는 시사평론가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른이 되어 방송사나 신문사와 같은 곳에서 일하는 내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지금보다도 훨씬 날씬한 몸매로.”


자라는 과정에서 용민이가 한 가지 더 특이했던 것은 편집에 탁월했다는 점이다. 컴퓨터가 일반화되기 전부터 나는 설교 작성을 위해 워드 프로세스를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으로 사용하는 것은 설교나 청탁받은 원고를 한글로 작성 정도였다. 그런데 용민이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내가 교회에 가 있는 동안 혹은 먼 거리 심방을 하는 동안 그 워드 프로세스를 사용해 푸른계시록이라는 제호의 학생회지를 만들었는데, 나를 너무나 놀라게 했다.

 

마음대로 글씨를 변형하고 사진이나 그림을 삽입하는 등 편집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내가 오랫동안 그 기계를 쓰면서 발견하지 못했던 기능들을 용민이는 단시간에 배워 응용했다는 점에서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사실 나는 신학대학 시절 신학춘추라는 학보를 편집한 경험이 있기에 고등학생이 그렇게 만들어냈다는 것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학생회지를 보고 아내는 화를 내면서 지금 고2면 대학 입시 준비에 전력할 때인데 왜 이런 데 시간을 낭비하느냐?”고 질책했지만, 나는 속으로 용민이의 달란트에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공부에 진력하지 않고 자기 취향대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결과 결국 수도권에 위치한 대학의 신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아내가 큰아들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회자가 되기를 원했던 까닭에서 나온 선택이었지만, 나는 큰아들이 목회자의 길보다는 방송선교의 길을 가기를 바랐다. 한국 교회는 목회자를 양산(量産)하는 데 치우칠 뿐 문화선교는 소홀히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극동방송>에서 한국 교회 갱신에 대해 대담하는 시간에 대학 1학년생인 아들을 데리고 갔다. 그때 용민이는 방송국 PD에게 아르바이트 일을 자원하며 방송과도 첫 인연을 맺었다.(계속)


                                           (초등학교 시절: 동생 김용범과 함께)


                                     (중학교 시절: 여름휴가 중 동해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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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함께가요 | 작성시간 20.01.01 하나님께 쓰임 받을 은사가 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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