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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바람이 태고(太古)를 부노라(8)..한국불교 5.20예정

작성자온누리|작성시간06.05.16|조회수34 목록 댓글 0
맑은 바람이 태고(太古)를 부노라(8)
태고선사가 백성들에게 홍건적의 침략을 대비해 피난하라고 한 것이 피해를 많이 줄였으나 정작 임금은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 선사의 나이 61세때인 공민왕 10년(1361년)에 홍건적이 물밀듯 쳐들어와 도성인 개경(開京)을 함락당했다. 왕은 부랴부랴 안동으로 몽진(피난)을 하게 되면서 선사의 깨우침을 생각하게 되었다. 왕은 선사를 불러 상주(尙州) 양산사(陽山寺:지금의 문경 봉암사)의 주지로 명하고 뒤를 보살펴 줄 것을 청하였다. 선사는 양산사가 희양산문(曦陽山門)의 본산 사찰임을 생각해서 도량을 중수하고 선객(禪客)들이 마음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했다. 홍건적이 물러가고 왕이 개경으로 돌아가고 난 뒤 63세 때인 공민왕 12년 3월에 출가본사인 가지사(迦智寺:지금의 장흥 가지산 보림사)의 주지가 되어 선풍을 드날렸다. 이 때 많은 납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어 철우종서(鐵牛宗西)스님에게 명호시(名號詩)를 지어주고 월남정사(月南精舍)에서 노닐며 당두(堂頭)인 고저찬영(古樗粲英)선사에게 일상생활을 경계하는 글을 내려 귀감이 되게 하는 등 선사의 법어집에 수록된 많은 글들이 이 때 씌어 진다. 65세 때 왕후가 돌아가자 슬픔에 잠긴 왕이 편조(遍照 ?~1371)의 말을 많이 들으며 정사를 운영하였다. 편조는 1359년(공민왕8년) 무렵 김원명의 천거로 중앙에 등장했다. 노국공주의 사망으로 인해 절망에 빠진 공민왕이 6년 동안(1366-71년) 정권을 내맡기고 조신들을 견제케 한 후 노국공주의 명복을 비는 불사에만 전념할 동안 편조의 힘이 막강해졌고, 6년 동안 권세를 부렸다. 그는 공민왕의 명으로 환속하여 이름을 신돈(辛旽)이라 하고 호를 청한거사(淸閑居士)라 하였다.
신돈은 집권 초기에 최영을 비롯한 무인세력을 축출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기존 권문세족 모두를 대상으로 한 인사개편을 대대적으로 착수했다. 이로써,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과 같은 신진사대부들이 신돈의 정권 참여를 계기로 차츰 성장했고, 일반민을 위해 개혁을 추진한 그는 당시 '성인'이라고도 불렸다. 신돈의 개혁 작업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소유주를 밝히고 사람의 신분을 바로 잡기 위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의 설치였다. 많은 세속의 정치를 출가 경력자인 신돈에게 맡김으로써 적지 않은 부작용을 예상한 태고선사가 그의 부당성을 알리는 상소를 올리자 신돈이 오히려 선사를 모함하여 어려운 지경에 빠뜨렸다. 선사는 신돈의 권세가 날로 커지자 66세 때 1366년 10월 왕사의 인장을 돌려보내 왕사를 사직하고 도솔산(兜率山)으로 들어갔다. 도솔산은 고창선운사가 있는 산으로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는 도량이다. 신돈은 선사가 물러가자 자신과 관게가 깊은 화엄종(華嚴宗) 승려인 천희(千熙:1307~1382)화상을 천거하여 국사에 책봉하게 하고,왕사에는 선현(禪顯)대사를 천거하여 책봉케 했다.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신돈이었다. 두 해를 지나고 68세 때인 공민왕 17년 봄 가까운 전주 보광사(普光寺)로 옮겨 지내다가 자신에게 오도(悟道)를 인가하고 법을 전해준 석옥청공선사의 훈향(熏香)이 서려있는 원나라 절강성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신돈의 방해로 가지 못했다. 신돈이 태고선사가 원나라로 가려는 것은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며 모함하고 선사의 측근들에게 거짓 자백을 받아내어 결국 그 해 여름에 속리산(俗離山)에 금고(禁錮)를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왕권이 제대로 서지 못함으로써 오는 결과였다. 다음해 봄에 선사에 대한 처사를 후회하여 승록사원(僧錄司員)혜기(惠琪)를 보내 금고를 풀고 소설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신돈식의 개혁의 일정 부분이 성공하던 중 공민왕은 왕권이 어느 정도 강화됨으로써, 1371년 왕권에 버금가는 신돈과 그의 추종세력을 제거해 버렸다. 왕이 신돈을 처형한 뒤 선사를 국사(國師)로 삼고 법호(法號) 더하여 영원사(瑩原寺)에 머물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선사의 모친인 동래 정씨의 고향인 익화현(益和縣: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을 승격시켜 양근군으로 하고 아울러 선사를 속리산에 금고 시켰을 때 지주사(知州事)로 강등시켰던 관향 홍주를 복위하여 홍주목(洪州牧)으로 삼았다. 선사는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소설암에 머물렀다. 하지만 왕은 원영사의 주지를 바꾸지 않고 선사를 그대로 임명함으로써 예를 다했고 선사도 멀리서나마 영원사의 대소 일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1375년 75세에 공민왕이 스러지고 우왕(禑王)이 즉위해서 역시 선사를 우대하였는데 78세 때 선대의 주지를 맡겼던 영원사 주지에 다시 임명하여 영원사로 갔다가 1년동안 머물다가 다시 소설암으로 갔다. 소설암을 떠나 양산사로 81세 때 석장(錫杖)을 옮겼는데 부임하는 날 우왕은 선사를 국사로 다시 봉하였다. 양산사는 공민왕이 홍건적을 침입을 피해 가서 태고선사를 주지로 임명했던 곳이어서 두 번째로 입원(入院)한 사찰이다.
82세 때인 1382년(우왕8년) 여름 “돌아가자,돌아가자”하고는 곧 소설산으로 돌아왔다. 12월 17에 말과 움직임이 불편해졌다. 23일에는 문인(門人)들을 불러 “내일 유시(酉時)에 내가 떠날 것이니 지군(智郡:군수)을 청하여 인장을 봉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왕에게 아뢰는 유언을 지군 편에 전하고는 대신들에게 보내는 사세장(辭世狀) 여섯 통을 써 주었다. 이튿날 새벽에 목욕한 뒤 옷을 갈아입고 유시가 되자 단정히 앉아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니
세수는 82세요, 법랍(法臘)은 69세였다.
사람 목숨 물거품처럼 비어
80여년이 봄 꿈속이여
죽음에 이르러 가죽 포대 버리니
한 바퀴 붉은 해가 서산으로 떨어지네.
(人生命若水泡空 八十餘年春夢中 臨終如今放皮帒 一輪紅日下西峰)
부고가 왕에게 전해지니 전농부정(典農副正) 전저(田沮)를 시켜 향을 보내고 부의를 예법에 맞게 하였다. 방장실(方丈室) 앞에서 다비(茶毗)하였는데 그 날 밤에 하늘에 광명이 뻗쳤고 사리가 무수히 나왔다. 정수리에서 나온 사리들은 별처럼 빛났다. 이때를 문인 유창(維昌)이 쓴 행장(行狀)에 의하면 1383년 1월 12일이라 하였으니 장례를 치르는데 장장 열여드레가 걸린 것이었다. 전저가 사리 100과를 나라에 바치니 왕은 더욱 존중하고 공경하여 시호(諡號)를 원증(圓證)이라 내리고, 중흥사 동쪽 봉우리에 탑을 세워 탑의 이름을 보월승공(寶月昇空)이라 하였다.
선사의 문도와 장로(長老)들은 “우리 스승은 떠나셨지만 사리가 세상에 있으니 어찌 근심하겠는가?”하고 대중들과 함께 돌을 다듬어 종(鐘)을 만들고 사리를 넣어 네 곳에 간직하였다. 양산사(陽山寺),사나사(舍那寺),청송사(靑松寺),태고암(太古庵)이 그 넷이다. 소설산에도 탑을 세웠다. 문도에는 환암(幻庵:1320~1392),고저(古樗:1328~1390),철봉(哲峯)화상 등 고승 1백7인,운수납자 1천3인,최 영,이 성계 등 거사 20명과 비구니 묘안(妙安)이 비문에 올라 있었다. 선사의 비문은 목은 이색, 양촌 권근, 삼봉 정도전 등 당대의 거유가 썼다는 점이 주목된다.

법현(法顯)스님:태고종 사회부장,열린선원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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