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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의 오솔길

<김문홍의 영화 속을 걷다>(7) 송일곤 감독의 <꽃섬>

작성자김문홍|작성시간15.12.08|조회수51 목록 댓글 1

<김문홍의 영화 속을 걷다>(7)

 

 

                                                           예정되지 않은 길 위에 서다

                                                                                                - 송일곤 감독의꽃섬

 

 

 

                                                                                             <한국 | 드라마 | 2001.11.00 | 청소년관람불가 | 126분>

 

 

 

 

 

내면을 향한 응시의 긴 여정

 

송일곤 감독은 단편소풍으로 1999년 칸 영화제 단편 경쟁부문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여 한국영화의 저력을 세계에 널리 알린 바가 있다. 그의 첫 장편 데뷔작인꽃섬(2001)은 명확한 서사로서의 내러티브와 속도감 있는 컷의 전환에 익숙한 상업영화 취향의 관객들에게는 분명 낯선 경험일 수 있지만, 인생을 관조하고 성찰하는 판타지에 목말라 하는 관객에게는 하나의 분명 아름다운 여정이 될 수 있는 영화이다.

여기 한 불쌍한 여인이 있다.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는 성악가 유진(임유진 분)의 독백으로 이어진다. 그녀는 낮고 볼품없는 목소리 대신 높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주면 상처 받은 많은 영혼들을 위해 노래하겠다고 맹세한다. 그녀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얻고부터는 무대 위에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이름을 알리기 위해 노래한다. 지금 그녀는 그 벌을 받아 혀뿌리에 종양이 생기고 이미 임파선까지 전이된 설암을 선고받는다. 여기 또 한 가련한 영혼을 지닌 소녀가 있다. 여고 1학년인 혜나(김혜나 분)는 공중 화장실 안에서 임신 사실을 감춘 복대를 풀고, 천사의 날개로 승천하는 환상으로 현실적 고통을 참으며 태아를 유산해 좌변기 속에 버린다.

여기 또 가련한 여인이 있다. 딸에게 피아노 사줄 돈을 마련하기 위해 옥남(서주희 분)은 모텔 침대에서 노인의 욕정을 받아들이지만, 노인은 그만 절정의 끝에서 복상사로 죽음을 맞는다. 경찰서 취조실로 달려온 남편은 그녀에게 밥 사먹을 돈 몇 푼만 쥐어주고 당분간 집에 들어오지 말라며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성악가 유진은 승용차로 구차한 생을 마감하기 홀로 여행길에 오르고, 옥남과 혜나는 남해 행 버스에서 우연히 조우하게 된다.

이 영화는 세 여인이 슬픔과 고통을 치유해 준다는 꽃 섬을 찾아 떠나는 일종의 로드 무비로, 세 여인의 여정은 처절한 현실적 수난으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감독은 이러한 현실에 슬픔과 고통을 극복할 객관적 상관물로 판타지를 의도적으로 배치해 놓고 있다. 옥남과 혜나가 탄 남해 행 버스가 산위에서 멈춰버린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두 여인이 왜 남해로 가지 않느냐고 따지지만, 운전기사는 사람들은 가끔 운명에 의해 예정되지 않는 길을 간다며 두 사람을 위협한다. 가까운 계곡 어딘가의 승용차 안에서 생을 마감하는 성악가 유진을 두 사람이 발견해 구해줄 수 있도록 의도된 판타지를 삽입하고 있는 장면이 바로 그러하다.

 

 

 

 

길 위에서 서로의 슬픔과 고통을 감싸 안다

 

옥남과 혜나는 유진의 목숨을 구하고 남해의 어딘가에 있다는 꽃섬을 찾아 함께 떠난다. 그들은 시체를 싣고 가는 트럭에서 운전기사를 통해 끔찍한 현실의 한 단면을 듣기도 하고, 또는 승합차를 얻어 타고 가면서 꿈과 희망을 옥죄는 현실에 가위눌림을 당하며 좌절하는 유랑 밴드의 슬픔을 함께 느끼기도 한다. 어머니의 행방을 궁금해 하는 혜나에게 생모를 화장해 바다에 뿌렸다는 중년의 선장은 힘이 들겠지만 언젠가는 용서할 날이 올 것이라며 더 이상은 묻지 말라고 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신의 배로 세 여인을 꽃섬 까지 데려다 주기도 한다.

이 영화의 제명인 꽃섬은 현실적인 지명으로서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세 여인의 슬픔과 고통이 만들어 낸 판타지의 공간일지도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선문답 같은 화두를 제시하며 옥남과 혜나를 버려둔 채 북쪽으로 떠나버린 버스 운전기사, 뜸으로 유진의 목숨을 구해내는 산 속 오두막의 노인, 그리고 꽃섬에서 천연 염색 공예 작업을 하고 있는 옥남의 친구라는 여인은 모두 그런 판타지의 공간이 만들어낸 구원과 희망의 인물들에 해당된다. 버스 운전기사는 무관심 속에 팽개쳐진 또 다른 생명(유진)을 향해 두 사람을 인도해 주고, 노인은 성스러운 치료 행위를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깨우쳐 주고, 옥남의 친구는 결국 유진을 허공의 빈 배에 태워 승천을 도와주고 있는 인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꽃섬은 슬픔과 고통의 치유 공간이다. 폐교의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몸을 내맡긴 채 환희의 표정을 짓는 유진, 천사의 날개를 달고 비상하는 행위를 보여주는 혜나, 어린 딸 앞에서 마술을 펼쳐 보이는 옥남의 평화로운 모습은 바로 그러한 슬픔과 고통의 치유에 대한 시적인 은유이다. 손마다 불꽃을 든 채 밤바다의 어둠을 가로지르며 환호하는 네 여인의 모습은 바로 그러한 상처 극복의 절정을 환유하는 장면이다. 결국 유진은 허공의 빈 배에 오르고, 그녀는 혜나가 건네준 천사의 날개를 달고 또 다른 생을 향한 부활을 꿈꾸게 된다. 엔딩 시퀀스에서 유진이 씨앗을 심어 싹을 틔운 화분을 통해 슬픔과 고통을 치유하고 희망을 보게 되었다는 옥남의 독백은, 한 생명의 죽음을 통한 부활이 희망과 환희로 다른 사람에게 전이된다는 생명의 순환성을 집약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이 영화는 길 위에서 서로의 슬픔과 고통을 껴안는 세 여인들의 여정을 통해, 삶에서 연유하는 상처와 고통은 서로의 삶에 대한 연민과 관심에서 극복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어디에도 없지만 어딘가에는 있는 꽃섬

 

이 영화는 시종일관 흔들리는 핸드 헬드 카메라를 통해 눈앞의 슬픔과 고통을 지금 이곳의 현장감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입자가 굵은 거친 화면의 질감을 통해 고통과 슬픔의 두께를 배가하여 전달하고 있다. 감독은 단편영화소풍에서 그랬던 것처럼 현실의 간난과 고통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불쑥 불쑥 끼어드는 판타지를 통해 답답한 현실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희망의 불씨를 심어놓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혜나가 지닌 천사의 날개, 허공에 매달린 빈 배, 그리고 엔딩 시퀀스에서 보여 지는 새싹은 그런 희망을 은유하는 중요한 오브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꽃섬을 떠난 여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유진은 또 다른 세상의 어느 곳에선가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한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옥남은 피아노 없이 딸에게 마음의 음악을 들려주며 단란한 일상을 꾸려가고 있을 것이며, 혜나는 어머니를 용서할 수 있을 날이 될 때까지 세월 속에 자신을 단련시키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유랑 밴드의 젊은 음악인들도 자신들의 꿈과 희망을 펼치기 위해 삶의 무게를 거뜬하게 견디어 내는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젠 다시 꽃섬을 찾아 무모하게 길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 자체가 바로 꽃섬이니까.

슬픔과 고통을 치유해 준다는 평화의 공간 꽃섬은 이 세상 어딘 가에도 없는 지명이다. 그러나 잠시 슬픔과 고통을 감내하며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다보면 거기 어딘가에 있는 꽃섬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꽃섬은 현실의 공간이 아니라 우리의 꿈과 희망이 만들어 낸 판타지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 섬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우리는 거기서 사라졌던 유진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넉넉하고 푸근한 옥남도 만날 수 있을 것이며, 반항기로 똘똘 뭉친 앳된 소녀 혜나의 손도 잡아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슬픔이 차오르고 고통이 영혼을 짓이길 때면 가만히 우리의 내면을 응시하며 거기 꽃섬으로의 긴 여정을 시작해 볼 일이다.

송일곤 감독의 삶에 대한 낙관적 시각과 희망의 불씨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으면 2004년에 발표한이란 영화와 1999년 칸 영화제 단편 경쟁부문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소풍을 반드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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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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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최미혜 | 작성시간 15.12.09 이 글을 읽으니 송일곤 감독 작품을 다 보고 싶어요.
    '우리 삶 자체가 바로 꽃섬'이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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