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범의 꼬리 / 김초성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이 꽃에 정이 들었다. 종자번식으로 쉽게 가꿀 수 있지만, 땅 밑으로 뿌리를 뻗치어가니 포기 나눔으로도 잘 번져간다. 적심摘心을 해주면 키높이를 알맞게 할 수 있어 좋다. 꺾꽂이로도 증식이 되어 여러해살이 관상용치고는 야무지다. 곧 꽃이 피겠거니 싶으면 몇 날 며칠을 더 기다리라는 듯 애를 태운다.
칠월이 가까워지면 뱀 꼬리 모양의 꽃대에서 다닥다닥 열을 지어 꽃망울을 하염없이 피워 올린다. 이 들꽃이 환하게 차례로 벙글어 한여름엔 다른 꽃들을 제치고 정원에 들어와 조연 노릇을 훌륭히 해낸다.
범의 꼬리를 닮았다는 모양새가 여느 꽃과는 다른 묘한 친근감을 안겨준다. 사실 범보다야 뱀의 꼬리라는 이름으로 불러주어야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씨앗을 맺고 있을 땐 방울뱀 소리가 곧 들릴 것만 같아 주춤하며 바라볼 때도 있다.
잎줄기는 볼품없는 야생초지만 개화기간도 길고 까탈을 부리지 않아 원하는 대로 잘 커 준다. 그래서 순종을 잘하는 식물이라고 하나 보다. 나태주 시인님의 ‘풀꽃’처럼, 자세히 보면 예쁘다. 오래 보면 사랑스럽다. 보라, 하양 입술을 벌리고 있는 꽃잎 낱송이를 보라. 꽃범의꼬리도 당연히 그렇게 예쁘다.
한창 뜨거운 태양 빛이 내리쪼일 때면 긴꼬리제비나비와 네발나비가 용케 잘도 알고 부지런히 찾아든다. 왕벌은 텃새 하는 양 이리저리 오가며 떠날 줄 모른다. 박각시 요놈도 놓칠세라 긴 대롱을 내밀고서 이 꽃 저 꽃꿀만 빨아대기 바쁘다.
꽃범의꼬리는 아낌없이 꿀을 내어주고 이 친구들은 부지런히 수분을 해주며 흐뭇한 사랑을 나누는 마당놀이로 한철을 보낸다. 때맞추어 제비나비가 검은 드레스 차림으로 우아한 비행을 하면 귀한 손님 대하듯 나는 그만 공손해진다. 점점 개체수가 줄어들어 멸종위기에 있다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어 어찌할꺼나.
꽃범의꼬리는 숲속의 피톤치드나 그린 타입도 아니고 감미롭고 신비로운 화향을 품은 것도, 사향노루가 뿜어내는 어떤 유혹을 감춘 것도 아니다. 관능적인 인동화 모양도 더더욱 아닌, 흔히 밭에서 보던 수더분한 깨꽃을 연상할 뿐이다. 유독 벌 나비들이 찾아드는 마력은 무얼까. 어떤 향기에 이끌리는 걸까. 아로마 연구가들은 이 여름 향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아서 그저 답답하다.
꽃은 그냥 꽃이 아니다. 새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아름답고 감미로운 서곡이다. 열매 맺음의 기쁨이다. 건강한 꽃범의꼬리는 한 그루에서 수백 개의 꽃송이를 피우는 내공을 가졌다. 길을 헤매던 곤충들을 기다려주는 느긋함도 지닌다. 가만히 그 자리에서 베푸는 덕자로 한여름을 지켜간다. 바람과 봉접蜂蝶을 불러들여 한해 결실을 정성스레 거두는 겸손한 농부들의 갈무리처럼 꼬리 끝까지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는다.
공생하는 생명체들의 조화는 인류를 이끌어가는 힘이다. 어디 눈앞에 얻어지는 것만 이로우랴. 종족을 번식하기 위한 생태적 본능에 앞서 작은 곤충들을 사랑할 줄 아는 포용일 것이다. 어찌 본능을 앞세울까. 이들이 있어 인간은 자연을 노래하고 여유로워진다. 꽃범의꼬리가 있어 여름 뜨락이 풍요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