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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 속에서 / 박태일

작성자조인혜(홍보국장)|작성시간26.06.23|조회수102 목록 댓글 0

군중 속에서
박태일

여름비가 쏟아지는 날 수영장으로 가는 길이다. 아시아드경기장 앞을 지나니 광장으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다. 도로변에는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서 있다. 경기장에서 무언가 큰 행사가 있는 모양이다. 울긋불긋한 천막 아래서는 햄버거, 핫도그, 어묵, 국수를 파는 노점상들이 빗소리와 어우러진 활기를 내뿜는다. 대체 무슨 일로 이토록 많은 이들이 모여드는 걸까.

길가에 나부끼는 플래카드가 답을 준다. ‘S 흠뻑쇼’. 그렇구나, 오늘 S 가수의 공연이 있는 날이구나. 코로나가 세상을 멈춰 세운 동안 여름마다 찾아오던 그의 공연도 사라졌다. 그가 다시 돌아온 여름의 축제였다.

광장을 메우는 군중은 대부분 십 대와 이십 대다. 남자들은 짙은 파란색 야구모자에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통일된 듯하고, 여자들은 좀 더 자유롭게 각자의 스타일을 뽐낸다. 뽀얀 피부, 쭉쭉 뻗은 몸매, 환한 얼굴의 이들은 세상을 즐거움으로만 읽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밝은 표정에 비 내리는 음산한 하늘이 무색하다. 문득 생각했다. 내가 언제부터 이런 무리에서 분리되었는지. 세월이란 참으로 교묘한 방식으로 사람을 변화시킨다. 세상 풍상을 제법 겪었다고 자부하는 나는 괜스레 모자를 눌러 쓰며 얼굴을 가렸다. 가리는 일과 숨는 일이 다르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광장에서 가수 관련 굿즈를 파는 상점 앞에는 사람들이 북적인다. 옷, 선글라스, 신발, 샌달, 장신구를 사려는 이들이다.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긴 줄을 서 있어 눈길을 끈다. 사람들은 이 많은 비를 맞으며 우산을 받쳐 들고 대체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 가까이 다가가 보니 가수를 형상화한 거대한 인물상들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다. 세 개의 대형 인물상이 바람을 머금고 우뚝 서 있다. 가장 큰 것은 수영복 차림에 잠수용 수경을 썼다. 장대한 몸집 겨드랑이의 까만 털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다른 하나는 잠수복을 입고 삼지창을 든 해신 포세이돈 같은 모습이다. 세 번째는 수경을 쓴 얼굴과 상반신만 있는 조형물이다. 인물상들은 모두 여름과 물을 상징한다. 사람들은 그 인물상들 앞에서 북적이고 있다.

걸음을 멈추고 사람들이 사진 찍는 광경을 지켜본다. 비를 맞으며 사진 찍는 군중을 구경하는 일은 흔치 않다. 사진 찍는 이들은 비에 젖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광고 글귀가 있는 인물상 앞에 가장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인물상 앞에는 미니 무대가 있어 촬영하기 제격이다. 사람들은 촬영대에 올라서 우산을 옆에 내려놓고 비를 맞으며 사진을 찍는다. 포즈의 향연이 펼쳐진다. 검지와 중지로 만드는 V자는 기본이고, 양손을 모아 혹은 머리 위에서 팔을 모아 하트를 만든다. 남녀가 서로를 향해 몸을 옆으로 기울이고 팔로는 머리 위에서 원을 그린다. 손바닥을 앞으로 향한 채 솜털을 불 듯 입으로 ‘후-’ 한다. 내 마음을 상대에게 보내는 증표이리라. 한쪽 다리를 옆으로 올리고 팔을 하늘로 번쩍 치켜들거나, 허리를 숙이고 얼굴은 정면을 향한 채 팔을 쭉 뻗어 '까꿍' 하는 폼도 등장한다. 한쪽 다리를 옆으로 들고 팔은 만세를 부르듯 하늘을 향해 번쩍 치켜들기도 한다.

드물게 한 중년 여성이 촬영대에 오른다. 놀랍게도 그녀는 젊은이들보다 더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동작을 쏟아낸다. 젊은 날 제대로 놀 줄 알았던 사람의 잔영이 느껴진다. 그녀도 한때는 젊은 매력으로 누군가의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바꾸지만 어떤 것들은 내면 깊숙이 그대로 남아있다.

사진 찍는 사람들은 자신을 마음껏 발산하는 인증샷 퍼포먼스를 펼친다. 그들은 좋아하는 가수와 함께한다는 상상 속에서 행복해하는 것 같다. 나는 그 모든 포즈들을 하나의 언어처럼 읽는다. 나는 말이 바뀐 그 세대의 이방인이었다. 덕분에 그들을 더 또렷이 볼 수 있었다. 그들의 티셔츠에 새겨진 문구들이 톡톡 쏘는 감성과 나의 진부한 내면을 비교해 보니 가슴이 짜릿해졌다.

한참 사람 구경에 빠져 있다가 수영장으로 갔다. 수영을 마치고 나오니 저녁이고 비는 그쳤다. 하늘이 개이면서 사람들은 오히려 더 몰려들었다. 경기장으로 가는 길은 더 심한 북새통이다. 광장에 불이 켜지고 가수의 인물상들이 어스름 속에 불빛을 받아 위용을 자랑한다. 광장은 꿈을 향해 걸어가는 군상들을 빨아들였다. 인물상들 앞에는 더 많은 사람이 서둘러 사진을 찍는다. 공연 시간이 임박한 모양이다. 경기장 앞 광장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보인다. 수많은 개인이 모여 여기저기서 집단적 열망을 형성하고 있다. 사람의 행렬이 스스로 그림을 그려나가는 듯하다.

밤이 깊어지자 쿠당탕- 쿠당탕- 폭죽 소리가 밤하늘을 뒤흔든다. 공연이 끝난 모양이다. 집 베란다 창으로 경기장 앞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도로변에 주차한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경기장에서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다. 한참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낮에 촬영대에 오르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비를 맞으며 포즈를 취하던 그들은 어쩌면 좋아하는 무언가 앞에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창 너머로 광장이 내 품 가득 안긴다. 젊음의 기운이 넘실대던 광장의 에너지를 듬뿍 받았다. 나이테가 겹겹이 제법 쌓인 내가 덩달아 참신해진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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