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사 (83)
2026.06.10
<우남(雩南) 이승만 李承晩, 1875~1965>
대한민국의 건국을 주도한 '건국대통령'이며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인 통치자였다. 이 대통령은 1948년 기독교 신앙에 기초하여 대한민국을 세운 다음 1960년까지 12년간 남한을 다스리면서 기독교 보급에 힘을 기울인 결과 대한민국을 아시아 최초의 개신교 국가로 발전시켰다.
-우남은 이승만 대통령의 호이다. 대개 당시의 사람들은 이름 대신에 부르는 호를 지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호 우남(雩南)은 서울 남산의 '우수현'이라는 곳에서 보낸 어린시절을 생각해 우수현의 우(雩)와 남산의 남(南)자를 따 우남(雩南)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황해도 봉천군 성가리 능내동(陵內洞)에서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1912)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말란(金海金氏, 1833~1896) 사이에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이윤인의 손자이자 이승만의 11대조 이원약(李元約)이 병자호란 때에 무공을 세워 전풍군(全豊君)에 추증되었고, 그 후광을 입은 몇몇 자손들이 무관직에 등용되기도 했으나, 이승만의 6대조 이징하(李徵夏)가 음직(陰職)으로 현령(縣令)을 지낸 것을 끝으로 벼슬길이 끊기고 가세가 기울어 어렵게 살아갔다.
-이승만 대통령에겐 두 명의 형들이 있었으나, 이승만이 태어나기 전에 모두 홍역으로 사망했다. 사실상 6대 독자로 자라며 장남 역할을 대신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나는 6대 독자였다. 내가 자손이 없이 죽으면 우리 집안의 긴 핏줄은 끊어지게 된다. 내가 나기 전 우리 집안에는 딸이 둘이 있고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아들은 얼마 후에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집안에 후손이 없는데다가 어머니는 자꾸 나이를 잡수시니 모두들 퍽 근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어머니는 큰 용이 하늘에서 날아와 자기 가슴에 뛰어드는 꿈을 꾸고 깨어나서 가족에게 그 얘기를 하였는데, 그것이 나를 갖게 된 태몽이었다. 내가 태어날 때 우리 집안이 얼마나 기뻐했었는지 나는 그 얘기를 어머니한테서 여러 번 되풀이하여 들었던 기억이 난다"고 회고하였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증조부 이황(李璜)의 대는 한성부에서 황해도로 이주해 있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2세 때인 1877년 아버지 이경선의 대에 다시 한성부로 이주하였다. 한성부에서 숭례문 밖 염동, 낙동을 거쳐 도동의 우수현(雩守峴)으로 이사 다녔고, 우수현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 이경선은 어렵게 얻은 아들에 대한 교육을 잊지 않았다.이승만 전 대통령이 4세 때인 1879년 퇴직 대신 이건하가 운영하는 낙동서당에 입학하였고, 1885년부터 1894년까지 사간원 대사간을 지낸 양녕대군의 봉사손 이근수가 운영하는 도동서당(한성부 용산)에 다니면서 수학하였다. 1887년 13세 때에 아명인 승룡(承龍)에서 승만(承晩)으로 이름을 고쳤다.
-1890년 이승만은 동갑내기인 박춘겸(朴春兼)의 딸 음죽 박씨(박승선)와 결혼하여 1898년 6월 9일 외아들 이봉수를 가졌다. 그러나 1906년 이봉수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나자 이경선은 격노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결국 1912년 박씨 부인과 이혼했다. 박씨 부인은 6.25 전쟁 때 인민군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
1.이승만의 개종과 기독교 교육-전도 활동
-이승만은 만 20세가 되는 1895년에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가 설립한 서울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매일 아침 학당에서 의무화한 예배에 참석하여 아펜젤러 설교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어머니에게 배재학당에 입학하더라도 '기독교'는 절대로 믿지 않겠다고 약속한 일이 있기 때문에 재학 중에는 기독교에 개종할 엄두를 내지 않았다.
-배재학당 졸업 후 그는 서재필(徐載弼)이 조직한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개혁활동을 펼치던 끝에 고종(高宗)황제를 폐위시키고 그 대신 급진개혁가 박영효(朴泳孝) 중심의 입헌군주제 정부를 세우려는 쿠데타 음모에 가담하였다가 그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었기 때문에 체포되어 1899년 1월에 경무청 감방에 투옥되었다.
-그 때 그는 자신에게 사형선고가 내릴 것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한계상황에서 캐나다 선교사가 차입해 준 성경을 홀로 읽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을 믿게 되어 목에 드리운 칼에 머리를 얹은 채
"오, 하나님! 저의 영혼과 우리나라를 구원해 주옵소서(Oh God, save my soul and save my country)"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이 기도를 계기로 그는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이승만은 1905년 4월 23일 부활절에 미국 워싱턴D.C.의 커버넌트 장로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이승만은 고등재판소 재판에서 종신형에 처해졌지만 특별사면을 받아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서(漢城監獄署)'에서 영어(囹圄)생활을 하였다. 하나님을 믿게 된 이승만은 감옥안에 옥중도서실을 개설하고 《영한사전》을 편찬하며 《독립정신》을 저술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벌였는데 그 와중에서 그는 성경반을 조직하여 동료 정치범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옥중의 죄수들과 간수들에게 전도를 하였다.
-그 결과, 그는 한성감옥서에서 풀려날 때까지 40여 명의 죄수와 옥리(獄吏)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놀라운 전도의 성과를 올렸다. 요컨대, 이승만은 국내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최초의 왕족 출신 기독교인으로서 그 당시까지 한국에 와 있던 어느 외국인 선교사보다 더 많은 수의 동포를 기독교로 인도하는 데 성공한 전도자였다.
-이승만은 1904년 여름 한성감옥 안에서 저술한 그의 명저 《독립정신》의 결론에서, "지금 우리나라가 쓰러진 데서 일어나려 하며 썩은 데서 싹이 나고자 할진데, 이 기독교로써 근본을 삼지 않고는 세계와 상통하여도 참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오... 마땅히 이 기독교로써 만사에 근원을 삼아 나의 몸을 잊어버리고 남을 위하여 일하는 자 되어야 나라를 일심으로 받들어 영·미 각국과 동등이 되리라"고 갈파하였다.
-그는 비록 대한제국은 명망지경에 도달하였지만 우리 민족이 기독교를 받아드려 이를 국기(國基)로 삼는다면 우리나라가 미국이나 영국 같은 1등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승만은 한성감옥서에 갇혀 있는 동안 하나님이 자기에게 부과한 사명이 한국 백성들에게 기독교 교육을 베풀어 장차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것이라고 자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1904년 8월 한성감옥서에서 석방되자 곧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동부의 조지 워싱턴대(George Washington University), 하버드대(Harvard University) 및 프린스턴대(Princeton University) 등 명문대학에 입학하여 수학하면서 주로 국제법, 정치학, 서양사, 철학사 등을 전공하되 기독교 신학을 곁들여 공부하면서 장차 귀국하여 기독교 교육에 투신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는 감옥에서 한영사전을 저술할 정도로 영어에 능통하였다.
-그는 놀랍게도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미국의 일류 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모두 취득하였다. 이것은 동·서양의 교육사(敎育史)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쾌거였다. 여하튼 그는 1910년에 프린스턴대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 분야의 박사학위(Ph.D.)를 취득하였다.
-이승만은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자마자 일제(日帝)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에 돌아와 서울YMCA의 '학감'직을 맡아 청소년들에게 성경, 서양역사(특히 미국역사) 및 국제법 등을 가르치고 또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지방의 사립학교에 YMCA를 조직하는 작업을 펼쳤다.
-그러자 일제 총독부는 이승만이 은밀히 독립운동을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를 '105인 사건'에 연루시켜 체포·구금하려 하였다. 이 때 이승만은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동아시아 총책 해리스(Merriman C. Harris) 감독의 도움으로 체포를 면하고 서울을 탈출, 1913년 2월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이승만은 태평양의 하와이를 망명지로 택하고 호놀룰루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약 5,000명의 한인 교포를 상대로 기독교 전도 및 교육 사업을 벌였다. 그는 우선 《태평양잡지》라는 월간지를 창간하여 이를 통해 한인 교포들에게 애국심과 기독교 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한인기독학원(The Korean Christian Institute)'이라는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여 2세 교포들을 교육하고, 또 '한인기독교회(The Korean Christian Church)'라는 교회를 창립하여 그 교회의 이사장 내지 선교부장직을 맡아 사실상 목회자 역할을 담당했다. 말하자면, 그는 하와이에 칩거하면서 그곳에 이민으로 정착한 한인들을 애국적인 기독교 교인 집단으로 육성하는 데 초점을 맞춘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1919년에 본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와 서울에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그는 국무총리 내지 집정관총재-얼마 후에는 '임시 대통령'-라는 임시정부의 최고위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그 결과 그는 하와이에서 펼치고 있던 교육과 전도사업을 접고 미국 동부로 건너가 워싱턴D.C.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가 이렇게 한국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던 시점인 4월 8일경에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어느 미국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하였는데 이 인터뷰에서 그는 "이번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의 주의(主意)는 한국에서 동양의 처음 되는 기독교국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3·1운동의 주도세력은 기독교 교인이라고 믿고 자기는 새로 태어난 '대한공화국'(The Republic of Korea)을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그 후 1919년 8월에 이승만은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Chief Executive)의 직권으로 워싱턴D.C.에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The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를 설치하고 이 기구를 통하여 외교와 선전 위주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구미위원부의 위원장과 위원(Commissioner) 등 핵심 간부들을 모두 독실한 기독교 목사 내지 장로들 가운데서 선임하였다. 동시에 그는 필라델피아에 거주하는 서재필과 협력하여 다수의 미국인 기독교 목회자들을 포섭, 그들로 하여금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여 이를 통해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지원토록 하였다.
-1941년 말 진주만 사건(Pearl Harbor)을 계기로 미·일 간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미국 정부를 상대로 중국 중경(重慶)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어내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에도 그는 워싱턴D.C.의 파운드리 감리교회(The Foundry Methodist Church)의 목사이며 미 연방상원의 원목(chaplain)인 해리스(Frederick B. Harris) 목사를 이사장으로 받들고 '한미협의회'(The Korean-American Council)를 조직하고 또 일제시대에 연희전문학교 교장이었던 애비슨(O. R. Avison) 박사를 주축으로 '기독교인 친한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여 이들 두 단체의 적극적 지원을 얻어 미국 정부에 승인 획득에 필요한 로비활동을 펼쳤다.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체스카 여사와 1934년에 그들은 제네바에서 처음 만났고, 그해 10월에 뉴욕에서 결혼을 했다. 그녀의 나이 35세, 이승만의 나이 60세였다.
2.대한민국 건국
독립운동가의 상당수가 공산주의자였고, 김구, 김규식 등 민족주의 계열도 공산주의에 대해 큰 적개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던 상황에서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 노선을 고집했다. 이러한 반공 노선은 미국에서도 그렇게 환영받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동맹국인 소련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미국이 이승만이 미국에서 펼치는 반공 활동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미운 털이 박힌 이승만은 해방을 맞이하고서도 미 국무부의 끈질긴 방해로 조기에 귀국할 수 없었다. 결국 그와 친분이 있는 맥아더 장군이 주선해준 수송기를 타고 1945년 10월 16일에야 서울에 올 수 있었다. 이때 이승만의 나이는 71세였다. 참고로 맥아더가 인천상륙 작전을 지휘했을 때, 맥아더의 나이는 71세, 이승만의 나이는 76세였다.
-해방 후 33년 만에 귀국한 이승만은 1945년 11월 28일 정동예배당에서 김구(金九) 선생과 함께 예배를 드린 다음 아래와 같이 의미심장한 연설을 하였다.
"나는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40년 동안 사람이 당하지 못할 갖은 고난을 받으며 감옥의 불같은 악형을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불러온 여러분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새로이 건설하는데 있어서 아까 김구 주석의 말씀대로 튼튼한 반석 위에 세우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예물로 주신 이 성경 말씀을 토대로 해서 새 나라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께서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반석 삼아 의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매진합시다."
-그 후 이승만은 1946년 2월에 반탁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대중조직으로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하고, 1946년 6월에는 남한에 자율정부-이른바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추진기구로서 '민족통일총본부'(민통)를 발족시켰다.
-그런데 이승만은 이들 여러 단체의 지도부에 기독교 목사와 장로 그리고 권사들(예컨대, 이윤영, 배은희 등 목사와 김활란 등 여성 지도자)을 발탁·기용하였다. 말하자면, 이승만은 해방 후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남한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긴밀히 협조하면서 국가 건설 작업을 진행시켰던 것이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에서 동대문 갑구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승만은 1948년 5월 31일에 열린 제헌국회 개원식(제1차 회의)에서 임시의장으로 추대되었다. 제헌국회 임시의장 이승만은 이 역사적 회의를 개시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말로써 이윤영(李允榮) 목사(의원)에게 식순에 없는 기도를 부탁하였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 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 부탁에 응하여 단상에 오른 이윤영 목사는 아래와 같은 기도를 드렸다.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을... 저희들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밖에 없을 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컨대 우리 조선 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우리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 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야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가지고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들의 책임이 중차대한 것을 저희들은 느끼고 우리 자신이 진실로 무력한 것을 생각할 때 지(智)와 인(仁)과 용(勇)과 모든 덕(德)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요소를 간구하나이다. 이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이 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모든 세계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서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업을 완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이 회의를 사회하시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의원 일동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또한 여기서 양심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 역사의 첫걸음을 걷는 오늘의 우리의 환희와 우리의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
-이 기도 후 계속된 회의에서 이승만은 재석 의원 198명 중 188표로 의장에 당선되었는데 오후에 속개된 회의에서 이승만 의장은 다시 한 번 아래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된다고 발언하였다.
"우리는 오늘 우리 대한민국 제1차 국회를 열기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이 있게 된 데 대하여 첫째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둘째 애국선열들의 희생적 공적과 셋째로는 우리 우방들 특히 미국의 원조를 깊이 감사치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후 약 두 달이 지난 7월 24일 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180표의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7월 24일에 거행된 정부통령 취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서를 했다. 그리고 8월 15일에 개최된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에서는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무를 다하기로 일층 더 결심하며 맹세한다"라는 취임사를 낭독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더러웠지만 그들은 언제나 정의와 아름다운 말과 깨끗함으로 위장하여 군중들을 선동했고, 선동된 군중들을 움직여 신생 정부를 공격했다. 당시의 사회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었다.
-특히 이런 불안은 제주도에서 먼저 발생했는데 제주도에서는 5.10 총선거에 반대하는 반란이 발생하였다. 이를 제주 4.3사태라 한다.
그런데 이때 제주도로 가서 여수와 순천에 주둔했던 14연대는 제주도로 가서 남로당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10월 19일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여순사건이라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충격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12월 1일부터 국가보안법을 시행하여 6.25일 직전까지 4회에 걸쳐 숙군 작업을 실시했다. 1948년 9월부터 육군 정보국 내에 특별 수사과를 설치하여 1949년 7월말까지 4,749 명에 대하여 총살, 유기형, 파면 등을 단행하면서 군내의 좌익들을 청소했지만, 6.25가 발발했을 때에도 국군 내에 간첩의 흔적들이 매우 많이 나타났다.
-폭동에 가담했던 좌익 반란군들이 산 속으로 도망쳤고,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1949년 5월, 2개 대대 규모를 만들어 월북까지 했다. 반란군을 토벌할 임무를 받았던 토벌 사령관 송호성은 6.25가 발생하자 서울에서 인민군으로 변신하여 인민군 소장이 되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우군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이었다.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세상이었다. 그래서 오해가 있었고, 억울한 희생도 많이 생겼다. 이러한 희생을 놓고 소련과 북조선은 남한 정부를 야만 집단인 것으로 선전했고, 지금도 좌익들은 이승만을 독재자로 매도한다. 좌익들은 또 미국과 맥아더를 증오한다. 이승만, 미국, 맥아더 이 세 존재가 없었다면 한반도는 김일성, 박헌영이 공산주의 체제를 수립했을 텐데, 이 3개의 존재가 민족의 원수라는 것이다.
3. 이승만 대통령의 기독교 장려정책
-이상과 같이 1948년 8월에 대한민국 정부를 출범시킨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5월에 하야할 때까지 12년간 대한민국을 통치하였다. 이 기간에 그는 영부인 프란체스카(Francesca Donner Rhee) 여사와 함께 조석(朝夕)으로 기도와 성경 읽기를 실천하였으며, 서울 정동감리교회의 등록교인-1956년 이후에는 '명예장로'-로서 주일 예배를 거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독실한 신자로서의 모범을 보인 그는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을 사실상 형해화(形骸化)시키면서 기독교의 교세신장을 위해 일련의 특혜조치를 취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기독교를 장려하기 위해 실시한 주요 조치는 다음과 같다.
1)국가의 주요 의식을 기독교 의식에 따라 집행하였다.
2)크리스마스를 국경일로 정하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주목례(注目禮)로 바꾸었다.
3)군대에 군종제도(軍宗制度)를 도입함으로써 군에 복무하는 병사들에게 기독교 전도를 할 수 있는 길을 열고, 또 감옥에 형목제도(刑牧 制度)를 도입하여 옥중의 죄수들에게 기독교 전도의 문을 열었다.
4)정부 요직에 기독교 교인들을 많이 기용하고 기독교 교인들로 하여금 국회에 많이 진출하도록 권장하였다.
5)기독교 신문과 방송사의 설립, 기독교계 학교와 신학교의 설립, 그리고 YMCA 및 YWCA의 활동을 장려 내지 지원했다.
6)기독교 선교사들을 우대하고, 6·25전쟁 기간과 그 후에 외국(특히 미국)에서 들어오는 구호금과 구호물자를 '한국기독교연합회'를 통해 개별 교회와 교역자들 그리고 신학교 등에 배분토록 하였다.
-해방 전 (현재의 남북한을 합친) 한국 전체의 기독교 교인 수는 37만 명에 불과했다. 해방 후 38선 이남에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남한에는 기독교 교인의 숫자가 조금씩 불어나 1950년에 이르러 그 수가 60만 명에 도달하였다. 그런데 이 대통령의 통치 기간에 교인수가 부쩍 늘어 1960년에 남한의 기독교인 수는 무려 160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 후 우리나라의 기독교 교세는 이승만 대통령 재임 시에 다져진 기초를 바탕으로 날로 팽창하여 2005년 말 기독교인 총수가 1,376만 명(개신교 861만 명; 가톨릭교 514만 명)에 도달하였다. 달리 말하자면, 대한민국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인 통치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의 기독교 장려정책에 힘입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기독교 정권의 탄생을 경험하였고 나아가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하는 자리에서 그는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무를 다하기로 일층 더 결심하며 맹세한다"라고 서약했다.
-그 후 12년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남한을 통치하면서 그는 음·양으로 기독교 보급에 힘을 기울인 결과-원래 '모범적인' 유교 및 불교 국가였던-우리나라를 역사상 처음으로 기독교 국가로 변모시키고 있었다. 이 대통령 집권기에 다져진 기독교 교회의 기반은 1960년대 이후 '폭발적인' 교세 신장의 도약대가 되었다.
<백범 김구1876 ~ 1949 >
백범(白凡) 김구(金九)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와 스승의 격려 속에 성장하였다. 하지만 과거 낙방, 동학에서의 패배 등 실패의 연속이었다. 김구는 이러한 과정에서 동학, 유교, 불교, 기독교 등 다양한 사상을 섭렵하였다. 새로운 사상을 접해도 이전의 사상을 버리지 않았다. 이것은 김구가 나라와 민족의 독립과 통일에 저해가 되는 요소들을 척결하는데, 생을 바치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백범 김구는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아버지 김순영(金淳永)과 어머니 곽낙원(郭樂園)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한양에서 글과 벼슬로 가업을 삼았던 김구의 집안은 1651년 ‘김자점(金自點)의 반란’으로 멸문지화를 만나자, 황해도 해주로 피신하여 상민으로 행세하였다.
-12살에 집안의 내력을 알게 된 김구는 양반이 되기로 하였다. 1892년에 응시한 과거장은 급제를 놓고 부정행위가 극심하였다. 김구는 낙방하였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였다, 기약 없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관상공부를 시작하였다.
-하루는 관상서에서 익힌대로 자신의 상을 보니, 평생 천하고 가난하고 흉하게 살 팔자였다. 과거장에서 얻은 비관 이상의 비관에 빠졌다. 그런데 관상서에서 마음 좋은 사람은 자신의 관상을 극복할 수있다는 글귀를 읽고,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하였다.
-마음 좋은 사람이 무엇인가 궁리하고 있을 때 동학을 알게 되었다. ‘하늘님을 모시고 도를 행한다. 존비귀천을 없앤다. 조선왕국을 끝내고 새 국가를 건설한다’는 교리에 감동하여 1893년 동학에 입도하였다.
-1894년 김구는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접주첩지(接主帖紙)를 받고, 11월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후퇴하여 동학군을 정비하고 있을 때, 안태훈(安泰勳)으로부터 밀사가 왔다. 동학을 토벌하던 안태훈과 ‘어느 한쪽이 불행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고 밀약하였다. 그 후 김구는 동학군 이동엽(李東燁)의 기습으로 근거지를 잃고, 안태훈을 찾아갔다.
-1895년 김구는 유학자이며 안태훈의 모사(謀師)인 고능선(高能善)을 만나 위정척사(衛正斥邪)론을 배웠다. 고능선은 ‘일반 백성들이 의(義)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는 것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요, 일반 백성과 신하가 적에게 아부하다 꾐에 빠져 항복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 가르침은 김구의 삶에서 중요시기마다 판단과 실천의 근본이 되었다.
-1896년 3월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鴟河浦)에서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며 변장한 일본인을 처단하였다. 현장에 ‘국모보수(國母報讐)의 목적으로 이 왜인을 죽이노라.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金昌洙)’라고 방을 붙이고, 집으로 돌아와 기다려서 체포되었다.
-김구는 해주에서 조사를 받다가 일본영사관의 요구로 인천감리서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형 집행 직전 고종의 집행 정지령이 내려졌다. 김구는 감옥에서 신서적을 읽으며 서양문물을 배우고,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일 년이 지나도록 후속조치가 없었고, 일본은 사형집행을 요구하였다. 김구는 감옥에서 죽는 것은 일본에게만 좋은 일이라고 판단하여 1898년 3월 탈옥하였다. 탈옥 중 마곡사(麻谷寺)에서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스님이 되었다가 1년여 만에 환속하였다.
-김구는 아버지 임종시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割股] 드렸다. 삼년상을 마친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면서 교육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장련(長連)의 광진학교(光進學校)·봉양학교(鳳陽學校), 문화(文化)의 서명의숙(西明義塾), 안악(安岳)의 양산학교(楊山學校)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재령(載寧)의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을 겸하였다.
-1908년에는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 학무총감이 되어 환등기(幻燈機)를 들고 각 군을 순회하며,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외치며, 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격려하였다.
-1905년 11월 김구는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을사조약(乙巳條約) 파기 상소운동에 참여하면서, 일본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1907년 안창호(安昌浩) 등이 비밀리에 조직한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09년에는 안중근(安重根) 의거와 관련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1911년 1월 안명근(安明根) 사건으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5년형을 받았다. 9월 항소심이 기각된 뒤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1912년 메이지(明治) 천황과 1914년 그 부인이 사망하여 5년으로 감형되었다.
-김구는 출옥을 앞두고 걱정이 앞섰다. 먼저 출옥한 동지 중에 변절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구는 감옥을 나가더라도 변치 않겠다는 표시로 이름은 구(九)로 바꾸고, 호는 백범(白凡)으로 새로 지었다. 이름을 고친 것은 왜의 민적(民籍)에서 벗어나고자 함이고, 백범은 ‘우리나라의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1915년 8월 가출옥 후 김구는 안악 안신학교(安新學校) 교사인 아내 최준례(崔遵禮)를 도왔다. 1917년에는 안악 김씨 소유의 신천(信川) 동산평(東山坪) 농장의 농감을 맡아,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면서, 학교를 세워 소작인의 아이들을 교육하였다.
-김구는 중국으로 망명할 기회를 엿보다, 1919년 3월 29일 황해도 안악을 출발하여 4월 13일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였다. 4월 22일 제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여, 의장 이동녕(李東寧)의 추천으로 내무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8월에는 내무총장 안창호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청하였으나 경무국장에 임명되었다.
-경무국의 임무는 일제의 정탐활동을 막고, 독립운동자의 투항 여부를 정찰하며, 일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침입하는가를 살피는 것이었다. 5년간의 경무국장 재임기간에 신문관, 검사, 판사의 역할 뿐만 아니라 밀정을 처형하기도 하였다.
-1920년 초부터 임시정부의 비밀조직인 연통제(聯通制)와 교통국 등이 일제에 발각되기 시작하였고, 독립군은 봉오동·청산리전투 승리 후에 무자비한 일제의 추적으로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다양한 세력들이 갈등하면서 임시정부는 혼란에 빠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었다.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옹호파와 개혁하자는 개조파, 해체한 뒤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가 서로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6월 7일 결렬되었다. 내무총장 김구는 6월 6일 국민대표회의의 해산을 명령하는 ‘내무부령 제1호’를 발표하였다.
-국민대표회의 결렬 후 각지 대표들과 독립군 세력이 이탈하면서 임시정부는 유명무실해졌다. 임시 의정원은 분열에 대한 책임을 물어 1925년 3월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을 탄핵하였다.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박은식(朴殷植)은 대통령제의 폐단을 막기 위해 지도체제를 국무령제로 개편하였다.
-하지만 국무령으로 선임된 사람들은 내각을 구성하지 못하거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다 1926년 12월 이동녕의 추천으로 김구가 국무령에 선출되었다.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는 1927년 3월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하였다.
-1931년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과 만주사변으로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면서, 한인과 중국인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격화되었다.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은 더욱 어려워졌다. 임시정부는 타개책으로 의열투쟁을 결정하였다. 전권을 위임받은 김구는 1931년 10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은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의거로 임시정부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렸을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과의 갈등을 잠재우고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끌어냈다.
-하지만 윤봉길 의거로 안창호가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고,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도 체포를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 임시정부는 13년간 활동했던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杭州), 자싱(嘉興), 하이옌(海鹽), 전장(鎭江), 난징(南京)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33년 5월 김구는 난징에서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뤄양(洛陽)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학교의 운영을 위해 만주에서 이청천(李靑天), 이범석(李範奭) 등이 합류하였다. 하지만 한인특별반이 일제에게 탐지되면서 1935년 4월, 1기생 62명을 배출시킨 뒤 폐교되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구는 임시정부와 대가족 100여명을 이끌고,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치장(綦江)을 거쳐 중국의 전시수도인 충칭(重慶)에 정착하였다.
-1940년 충칭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27년간의 활동 중 가장 강력한 조직과 체제를 갖추었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창설하고, 10월에는 집단지도체제였던 국무위원제를 일인 지도체제인 주석제로 개편하면서, 김구가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11월에는 ‘대한민국 건국강령(建國綱領)’을 발표하여 광복 후의 자주독립국가 재건 계획을 밝혔다. 12월 8일 일제가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자, 12월 10일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승리해 승전국으로서 독립을 획득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1942년 7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광복군에 편입되고, 10월에는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등 좌파 세력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좌우합작 정부를 구성하였다. 그 뒤 중국 옌안(延安)의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과 국내의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 그리고 만주·연해주의 무장독립운동 세력과도 연계하여 통일전선을 추진하던 중 일제가 항복하였다.
-1943년 3월 임시정부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가 영국 외무장관 이든(Anthony Eden)과 전후 문제를 논의하면서, 한국을 국제공동관리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1943년 7월 김구는 카이로회담에 참석하게 될 장개석을 조소앙(趙素昻), 김규식(金奎植), 이청천(李靑天), 김원봉(金元鳳)과 함께 면담하고, 한국의 독립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11월 카이로회담에 참석한 장개석은 루스벨트, 처칠(Winston S. Churchill)과 협의하여 ‘조선 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 조선이 자유 독립할 것을 결의한다’는 합의를 끌어내, 한국이 유일하게 연합국으로부터 독립을 보장받았다.
-1945년 4월, 한국광복군은 미국전략첩보국(OSS)과 합작으로 ‘독수리작전(Eagle Project)’을 추진하였고, 시안(西安)과 리황(立煌)에서 훈련을 받았다. 김구는 8월 7일 훈련을 마친 광복군을 점검하기 위해 시안을 방문하였다가, 8월 10일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이 모두 허사가 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광복을 맞이하였지만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곧바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미군정이 개인자격으로의 입국을 강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김구는 일부 임시정부 요인들과 1945년 11월 23일 개인자격으로 환국하였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열린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반도에 통일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통일 임시정부와 협의 후 5년 이내를 기한으로 미·영·중·소 4개국이 신탁통치를 한다고 결의하였다.
-12월 28일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정국은 반탁과 찬탁으로 나뉘어 소용돌이쳤다. 임시정부는 즉각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신탁통치 반대를 결의하였다. 이어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설치하고 반탁투쟁을 주도하였다.
-1946년 3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실행하기 위해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지만,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협의할 대상의 범위를 놓고, 미·소는 자신들을 추종하는 세력을 협의 대상으로 하기 위해 대립하다가 5월 휴회하였다.
-1946년 6월 이승만은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이에 7월 여운형(呂運亨)과 김규식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하였다.
-1947년 5월 재개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도 협의대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10월 결렬되었다. 이에 한반도 문제는 11월 UN에 상정되었고, UN 감시하 남북한 총선거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소련은 UN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경을 거절하였다.
-한반도 문제가 분단으로 치닫자, 김구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며 행동에 나섰다. 1948년 2월 16일 김구는 김규식과 공동명의로 남북지도자회의를 제안하는 서신을 김일성(金日成)과 김두봉(金枓奉)에게 보냈다.
-2월 27일 UN 소총회는 한반도에서 가능한 지역의 선거를 채택하였다. 이에 김구는 김규식·김창숙(金昌淑)·홍명희(洪命熹) 등과 ‘7거두 성명’을 통해, 한반도의 분단은 ‘미·소전쟁의 전초전’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4월 19일 김구는 북행하였다. 평양에 도착한 김구는 21일 성명에서 ‘38선 때문에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 어찌 그뿐이랴. 대중의 기아가 있고, 가정의 이산이 있고, 동족의 상잔까지 있게 되는 것이다’라며 분단이 가져올 비극을 예견하였다.
-5월 5일 귀경한 김구·김규식은 ‘첫술에 배부를 수 없는 것이고, 최후의 성공은 단결에 있다’고 남북통일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우리나라는 분단되었다. 1948년 9월 대한민국 국회는 반민족행위자 처벌법을 제정하였지만, 1949년 6월 6일 친일 경찰에 의해 반민특위가 습격당하였다. 그리고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서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