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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된 장미꽃 도둑

작성자서태수|작성시간26.06.13|조회수49 목록 댓글 0

수필선생이 된 장미꽃 도둑

서낙동강추천 0조회 3520.01.22 11:06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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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된 장미꽃 도둑
                                        서태수   <출전 : [부모는 대장장이] 2008>


교정의 동쪽 수목원에 아름드리 우거진 잣나무 꼭대기로 해맑은 태양이 솟아오르는 유월의 맑은 아침. 전교생 조례 시간에 교장선생님은 장미꽃 도난 사건을 또 말씀하셨다. 분명히 외부 사람의 소행일 테니까 우리 모든 학생들이 애교심을 발휘해서 그 꽃을 잘 가꾸고 지켜야 한다고. 벌써 2주째의 말씀이셨다. 키가 작아 맨 앞줄에 서서 모자챙 아래로 새까만 눈알만 깜빡이고 섰던 나는 마음 속으로 ‘내가 꺾어 갔는데.’ 하는 생각만 무심히 하고 있었을 뿐 별 죄의식도 없이 듣고만 있었다. 회장의 ‘차렷!’하는 구령소리가 확성기에서 울려퍼지자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 처마 끝에 쉴 곳을 찾아 금방 내려앉았던 비둘기들이 은빛의 날개를 퍼득이면서 후르르 날아 올랐다. 새파란 하늘에는 몇 조각 하얀 구름뭉치가 소리 없이 동동 흐르고 있었다.

우리학교 정문 안쪽의 교무실 앞 동그란 화단에는 연전에 옮겨 심은 작은 장미가 한 그루 있었는데 초여름이 되자 꽃망울이 벙글기 시작했다. 한 점의 티끌도 없는 맑고 고운 분홍빛이었다. 정말 가슴 설레는 빛깔이었다. 꽃 많은 시골 중학교의 원예반 출신이기에 장미꽃 접붙이기쯤은 예사로 하였던 나도 처음 보는 고운 꽃이었다. 꽃송이래야 나무가 어려서 며칠에 한두 송이씩 피는 것이 전부였다. 당시로서는 꽤 귀한 꽃이었다. 나는 밤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나오는 길에 그 꽃을 싹둑 잘라와서는 내 자취방에 꽂아두기 시작한 것이다. 선생님이나 학생들은 꽃봉오리는 보았어도 정작 만개한 꽃 구경은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이 며칠마다 되풀이되고 있었다. 나의 자취방 가장자리에는 시든 꽃에서부터 싱싱한 것에 이르기까지 각종 병이나 찌그러진 깡통에 담긴 채 줄을 지어 놓여 있었다.

교장선생님의 훈화를 들었던 그날도 나는 도서관 문을 닫는 밤늦은 시각에 눈여겨보아 두었던 그 꽃을 꺾으러 화단으로 올라갔다. 호주머니칼로 꽃대를 자르는 순간 누군가가 내 손목을 잡았다. 수위아저씨였다. 우리학교 수위아저씨는 6.25 때 한쪽 팔목을 잃어 갈고리를 다신 분이셨다. 그분은 나를 잘 알고 계셨다. 수위아저씨는 몹시 놀라셨다. 아저씨는 큰일이라고 하면서 이 사건은 너가 아무리 모범생이라도 어렵게 되었다며 오히려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리고는 나는 모른 척 할 테니 내일 너가 직접 담임선생님께 자수를 하라고 하셨다. 몇 번이나 당부하셨다.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은 하면서도 ‘이까짓 장미 몇 송이가 무슨 큰일이라고.’ 하는 마음으로 여전히 별 생각 없이 꺾은 꽃을 들고는 자취방으로 왔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아침 조례 직후 복도를 걸어가시는 담임선생님 뒤를 슬슬 따라 붙었다. 담임선생님은 시인이셨고 키가 꽤 크신 분이셨다. 선생님께서 무슨 할 말이 있느냐는 듯 옆눈으로 내려다 보셨다.

“선생님, 제가 꽃을 꺾어 갔습니더.”

내가 고백을 하는 순간, 선생님은 얼마나 놀랐던지 들고 계시던 출석부를 떨어뜨리셨다. 대도시의 공립 상업고등학교인 우리학교의 교칙은 매우 엄했다. 시골 출신들도 많았고 말썽꾼도 많은 학교라 3학년 진급 때는 퇴학, 제적, 전학 등으로 애초의 한 학급이 줄어든 정도였다. 학교의 기물을 파괴하거나 나무를 꺾으면 최소한 유기정학이었다. 나도 이것은 잘 알고 있었거니와 평소 나의 준법정신도 매우 철저한 편이었다. 중국집 출입마저 금지된 교칙이라 대학 입학 후에야 짜장면과 우동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시골 출신인 나는 꽃에 대한 인식은 예외였나 보다. 중학교에서나 동네에서나 꽃은 서로 예사로 주기도 하고 그냥 갖고 가기도 하는 그런 것으로만 여겼던 모양이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의 표정을 보고서야 나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항상 싱글벙글 마음씨 좋으시던 평소와는 딴 판으로 담임선생님의 말없이 굳은 표정에서 ‘이게 예삿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목조건물의 긴 복도를 따라가는데 선생님의 슬리퍼 소리만 탈삭탈삭 들렸다. 선생님께서는 교장실 앞에 나를 세워놓고는 안으로 들어가셨다.
교장실이라니! 그때 나는 3학년이었다. 곧 취업을 위한 실습 추천을 받아야 할 시기였다. 그때서야 가만히 따져보니 교칙상 퇴학이 될 수도 있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까짓 장미꽃 몇 송이에 퇴학이라니 하는 생각은 여전했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교장실 앞이 아닌가. 문득 ‘이제 학교도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꽤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담임선생님께서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교장선생님께 인계하셨다. 난생 처음 들어가 본 교장실은 어마어마했다. 천장에 닿도록 좌우에 빼곡이 쌓여 있는 각종 우승기와 컵 그리고 상장들. 개교기념일 등 큰 행사 때에만 키큰 간부학생들이 엄숙하게 받들고 걷던 교기, 그 중앙의 큼지막한 책상 너머 의자에 앉아 계시는 백발의 노인. 교장선생님을 혼자 이렇게 가까이서 바라보기도 처음이다. 교장선생님은 퍼런 색의 큼지막한 책(지금 생각하니 생활기록부였다.)을 펼쳐들고 계셨다. 키가 작아 책상 앞에 목만 겨우 내밀고 섰는 나를 유심히 살펴보시더니 또 책을 뒤적이셨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후 교장선생님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꽃을 꺾어갔지?”
“그냥, 좋아서예.”
노인은 잠시 말이 없으셨다.
“꺾어서 어떻게 했니?”
“자취방에 꽂아두었습니더.”
“그래? 지금 한 송이 가져올 수 있니?”

의외였다. 자취방은 달리면 10분 거리의 산비탈이었다. 몇 토막 판자로 대충 얽어놓은 대문을 박차고 넘어질 듯 뛰어들었다. 앉은뱅이 책상, 그 옆에 가지런히 개켜놓은 이불, 밥상을 겸했던 장기판 위의 빈 그릇들, 그리고 반찬통과 양식 자루. 그 나머지의 가장자리에는 벽을 따라 장미꽃이 한 줄로 놓여 있다. 꺾어온 시차에 따라 각기 싱싱한 빛이 달라 이미 시든 놈도 있다. 우그러진 통조림깡통에 담가 놓았던 어제의 그 꽃을 깡통째 들고 뛰었다. 하얀 하복 상의가 더럽혀졌다. 거무튀튀한 기름얼룩이다. 그 와중에서도 빨래 걱정이 되었다.
쌕쌕거리며 교장실 문을 들어섰다. 교장선생님은 장미를 뽑아들고는 한참 동안 향내를 맡고 계셨다. 그러고는 도서관에 가서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적어오라고 하셨다. 어디서부터 찾을지 몰라 그 많은 시집들 앞에서 반 시간 이상을 뒤적거리던 나에게 사서선생님은 간단히 외어서 적어주셨다. 그때 나도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외우기로 한 것이다.

“적어 왔느냐?”
“예.”
“한 번 읽어 보아라.”
“외어 왔습니더.”
“그래? 외어 봐.”

나는 두 손을 모았다. 눈을 지긋이 감았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
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
던 먼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엉엉엉엉.

나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그때 내가 왜 그렇게 울게 되었는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냥 나도 모르게 울어버린 것이다. 마냥 눈물이 범벅이 되도록 울었다. 정말 실컷 운 것 같다. 한참 후에야 노인께서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달래셨다. 그리고는 가서 공부를 하라고 하셨다. 세수를 하고 앉았다가 다음 시간에 들어가라고 하셨다.
나는 잣나무 수목원에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울컥울컥 울음기가 쉽게 그쳐지지 않는다. 둘째 시간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세수를 했다. 심호흡을 하고는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혼자 있어 보니 참으로 조용한 낮이다. 학교 뒷산에서 뻐꾸기가 운다. 뻐꾸기 소리는 언제 들어도 아늑하다. 솔바람 소리가 일었다. 바람에 가만히 흔들리는 침엽수 사이로 햇살이 잔물결 치듯 쏟아진다. 고향 벌판을 가로지르는 강물이 눈에 선하다. 마음이 제대로 진정된 것 같다. 그런데 다시 뺨으로 눈물이 또 주르르 흘러내린다.

친구들 몰래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면서 매시간마다 학교 게시판을 훔쳐보는 열흘이 지났다. 통보가 없다. 일각이 여삼추였다. 보름쯤 지난 후 아침, 담임선생님 뒤를 졸졸 따라 붙으며 처벌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그 큰 키로 복도의 창문 너머 먼 산을 바라보시면서 교장선생님께 직접 물어보라고 하셨다. 또 교장실? 담임선생님도 이젠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나의 일이다. 용기를 내었다. 심호흡을 하고는 교장실 문을 두드렸다.

“어찌해서 왔느냐?”
“저, 처벌이 어찌 되었는지….”
노인께서는 빙그레 웃으셨다.
“녀석, 가서 공부나 해.”

교장실 문을 어떻게 나왔는지 모른다. 운동장으로 달려나갔다. 그냥 단숨에 한바퀴 돌았다. 아니 훨훨 날았다. 그 후 선생님과 학생들은 몇 송이의 장미꽃 구경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어린 나무는 장미꽃의 계절을 더 이상 오래 끌어 주지는 못했다. 뒷산에 꽃처럼 물든 단풍이 지고 수위아저씨가 짚으로 장미나무를 동여매던 그해 겨울, 방학식을 하던 날 나는 다시 교장실로 갔다. 이제 졸업하게 되었다고. 그리고 당돌하게도 사진 한 장 같이 찍고 싶다고 했다. 교장선생님은 축하한다고 하시면서 슬리퍼를 신은 채로 내가 꽃을 꺾은 그 화단 앞에 서 주셨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 선생이 되었다. 절대로 [내 손]으로 학생을 퇴학시키지 않는 선생이 되고자 했다. 제적이나 퇴학이 일상적이던 그때, 교칙의 강경한 결정을 이기지 못하던 병아리 담임 시절, 학교 철조망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일도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는 손바닥보다 작은 그 흑백사진을 꺼내 보곤했다. 덕분에 나는 애초의 약속 하나는 지키면서 30여년을 보냈다. 비록 우리 수위아저씨나 심양섭 교장선생님 같은 훌륭한 스승은 못 되었지만….


   <필자와 심양섭 교장선생님> 종업식 마치고 교장실로 가서 졸업한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당돌하게도  사진 한 장 찍고 싶다고 했더니 "그래? 녀석" 하시면서 슬리퍼 차림으로 나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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