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이 이문건의 <묵재일기>에 나온 설공찬전이다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었다. 헌부가 아뢰기를,
“채수(蔡壽)가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지었는데, 내용이 모두 화복(禍福)이 윤회(輪廻)한다는 논설로, 매우 요망(妖妄)한 것인데 중외(中外)가 현혹되어 믿고서, 문자(文字)로 옮기거나 언어(諺語)로 번역하여 전파함으로써 민중을 미혹시킵니다. 부(府)에서 마땅히 행이(行移)하여 거두어 들이겠으나, 혹 거두어들이지 않거나 뒤에 발견되면, 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중종 6년(1511년), 중종 반정을 통해서 공신들을 격분시킨 책, 뜻밖에도 같은 공신이었던 채수가 지은 <설공찬전>에 대한 논쟁이었다. 이 사건으로 <설공찬전>은 소각되었고, 채수는 파직당하고 만다.
당시 조정에서는 그를 죽여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정도로 <설공찬전>에 대한 논의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 그의 죄명은 혹세무민, 즉 백성을 현혹시켜,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는 죄목이었다. 도대체 어떤 내용의 소설이길래 채수가 이런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일까?
일단 <설공찬전>의 내용을 보도록 하자.
"순창에 살던 설충란에게 공찬이란 아들이 있었는데,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설공찬의 혼이 설충란의 형인 설충수의 아들인 설공침에게 들어갔다. 하루는 설충수와 설공침이 밥을 먹는데, 설공침이 왼손으로 밥을 먹는 것이었다. 괴이하게 여긴 설충수가 설공침에게 왜 왼손으로 먹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공침의 몸속에 들어가있던 설공찬이 저승에선 그렇게 먹는다고 대꾸했다. 이에 놀란 설충수는 설공찬의 혼을 몰아내려고 하지만, 설공찬이 자신을 쫓아내면, 공침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이에 설공침은 곧 병이 들어 죽게 되었고, 이에 공찬이 공침의 몸속에 들어가 저승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용이다.
저승의 위치는 순창 앞바다에서 약 40리정도이고, 이름은 단월국, 임금 이름은 비사문천왕이라고 한다. 거기에 사는 5영혼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공찬은 심판을 받았으나, 증조부의 덕으로 풀려나게 되었다고 한다.(증조부는 설위로써 세종조에 성균관 대사성 을 지냈다고 한다.)
제일 처음 나오는 것은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을 건국한 주전충이었다.
여기에서 나오는 내용은 "임금에게 충성하다가 비명에 가면 저승에 가서 잘살고, 임금이라도 반역자라면 지옥에 간다는 내용이다."
이 정도의 소설이라면 현세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공신들이라도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중종 반정에 참가한 사림파들에 대한 반감을 사게 되었고, 결국 <설공찬전>은 소각되었으며, 자신마저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노리게 되었다.
중종반정으로 공신이 된 사람은 총 103명, 같은 반정인 인조반정때 계사정사공신인 53명의 두배정도이다. 당시 자신과의 가족이나 심지어 약간의 친분이 있는 사람까지 벼슬을 주는 폐단을 낳게 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의 녹봉은 요즘처럼 돈이 아니라, 토지였고, 땅은 한정되어 있는데, 줄 사람은 많았다. 더구나 공신이란 이름으로 프리미엄까지 얹어주어야 했으니, 당시 백성들의 고통이 말이 아니었다.
그뿐이 아니라, 당시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삶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음에도 공신들은 백성들의 피와 땀을 갈취하는데 몰두하기만 했다. 이러다보니 백성들의 맘은 조정에서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채수의 <설공찬전>은 공신들에게 다시 반정했던 당시의 맘으로 돌아가라는 일종의 경고 메시지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설공찬전>은 어떻게 되었을까? 1997년 4월 12일 <중앙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현존하는 最古의 한글 소설이 발견되었다."의 기사였다. 다름 아닌 <설공찬전>이엇는데, 당시 승정원 승지를 지낸 이문건이라는 사람의 묵재일기를 조사하던 한 사람이 이것을 알아보고 발견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알고있던 홍길동전은 허균의 작품인지 명확히 않고, 더구나 쓰여진 연대도 정확하지 않지만, <설공찬전>은 작자와 연대가 실록에 적혀있으니 국문학계가 흥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지은이 채수에 대해 알아볼 필요성이 있다. 채수는 1469년 초시,복시, 중시에 모두 장원하여, 이석형과 더불어 조선 개국이래 세번 연속 장원한 사람이었다. 1478년 응교로써 임사홍의 비리를 규탄하여, 그를 좌천시켰고,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를 위해 간하다가, 성종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그 후, 연산군이 폐위하려는 중종 반정 세력이 그를 영입하려고 했으나, 채수가 이에 반대하자, 반정 세력들은 그가 듣지 않으면 죽이기로 결정했다. 당시 사위인 김안로가 어떻게해서든 경복궁 앞으로 모셔갈려고 했고, 강제로 술을 먹여, 군졸을 시켜 그를 억지로 끌고 갔다. 술에서 깬 그는 "이게 감히 할 짓이냐?"라고 세번이나 외쳤다고 한다. 그는 인천군에 봉해졌으나, 공신들의 행태를 보고, 염증을 느껴 함안으로 내려갔다. 그 뒤 <설공찬전>으로 인해 죽음까지 당할 뻔 했으나, 파직당하는데 그칠 수 있었다.
실록은 다음과 같이 채수를 이렇게 평가한다.
"채수(蔡壽)는 사람됨이 영리하며 글을 널리 보고 기억을 잘하여 젊어서부터 문예(文藝)로 이름을 드러냈고, 성종조(成宗朝)에서는
폐비(廢妃)의 과실을 극진히 간하여 간쟁(諫諍)하는 신하의 기풍이 있었다. 그러나 성품이 경박하고 조급하며 허망하여 하는 일이 거칠고
경솔하였으며, 늘 시주(詩酒)와 음률(音律)을 가지고 스스로 즐겼다. 일찍이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지었는데, 떳떳하지 않은 말이 많기 때문에
사림(士林)이 부족하게 여겼다. 반정(反正) 뒤에는 직사(職事)를 맡지 않고, 늙었다 하여 고향에 물러가기를 청해서, 5년 동안 한가하게
휴양하다가 졸하였는데, 뒤에 양정(襄靖)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