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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1. 이승만

작성자서 휴|작성시간24.04.03|조회수494 목록 댓글 7
독립운동 1. 이승만.
서 휴




        사람이 죽으면 염을 하고 관에 넣어지며,
        꽃상여의 애달픈 노래 따라 묘지로 가거나
        영구차를 타고 먼 장지로 옮겨지거나,
        때론 비행기나 배를 타고 멀리갈 수도 있다.


산 사람이 관속에 들어가, 시신들의 관들과 함께 어울려 배를 타고,
한 달이나 걸리는 먼 거리를 항해할 수 있을까?


        곧 상하이로 떠난다면서요?
        나도 상하이로 데려가 주시 오!
        아니, 내가 어떻게 데려갑니까?


        중국인은 죽어서라도 고국에 묻히려 하오?
        나는 죽어서라도 나라를 찾아야 하오 !
        나를 중국인의 관들 속에 묻혀 싣고 가 주시오!


        어떻게 산 사람이 관에 실려 간단 말이오?
        더구나 당신은 30만 달러의 현상금이 붙어 있소!
        일본 놈에게 잡히면 나도 살아남지 못하오!


유럽에서는 오랫동안 쌓여왔던 열강들의 갈등과 각 지역 민족주의
자들의 활동으로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세자 부부를 암살하는 사건이 터진다.


       이로인해 1914년 7월 28일,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1918년 11월 11일까지 무려 5년간이나 걸려 끝난다.


승전국들은 파리에 모여 정상회담을 열게 되며, 이때 미국 대통령
윌슨은 14개의 전후처리 원칙을 밝히면서, 그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결정해야 한다는 소위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했다.


       강대국은 더는 식민지를 지배하지 않고
       모두 독립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실제로는 발칸반도와  동유럽의 소수민족들을 독립시킴으로써,  
독일과 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강대국이 되는 걸 막겠다는 조치였다.


       그러나 이는 강대국의 지배를 받던 세계의 수많은
       약소민족에게 커다란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의 식민지를 독립시켰으나,
       일본만큼은 대한민국을 독립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 한 줄기 희망은 되었다.


1919년 2월 8일 일본 도교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비밀리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발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당시 해외에 나가 있던 저명인사 39명이 서명한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우리 대한은 우리 민족의 대한이며,
       우리 대한의 땅은 완전한 대한인의 땅이니,


       우리 독립은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라면서
       자주독립국임과 민주의 자립국임을 선포했다.


       일본은 강박과 무력과 폭행으로 점령한 것이므로
       완전 무효이며, 섬나라는 섬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또한, 동포들은 국민 된 본령이 독립인 것을 명심하여
       육탄혈전 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을 요구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민족 대표 33인은 3.1운동을
일으켰다. 이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영향과 고종의
독살설에 분노한 한민족이 전국적으로 궐기한 독립운동이었다.


3·1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전국의 유림(儒林)들은 김창숙을
중심으로 1,422자에 이르는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137인의
유림이 서명하자, 김창숙은 이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3월 29일 용산역에서 출발해 상하이로 갔다.


       유림(儒林)의 독립선언은 그동안 개화에 반대하며
       내세웠던 위정척사사상에서 벗어난 계기가 되면서, ​
       독립의 당위성을 세계에 호소하는 큰일을 한 것이다.


김창숙은 상하이에서 독립선언서를 번역하자, 각국 영사관에 모두
배포하고는 국내에 돌아와 전국 향교에도 배포했다.


       1919년 4월, 송회근이 일경에게 붙잡히면서
       유림 137인과 3·1 독립운동 민족 대표 33명이
       일경에 체포되며 혹독한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이승만은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주장하면서 자결한 민영환의 추천을
받아, 1904년  11월 대한 제국의 특사로 미국에 파견돼,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1905.2.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 입학했으며,
1910.7.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가 된다. 


       1910년 10월에 귀국한 이승만은 YMCA에서 활동하다가
       1913년 2월 하와이로 건너가게 되며, 한인감리교회의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이 되어 활동한다.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자, (미국)대한인국민회 중앙
총회의는 이승만과 정한경을 파리강화회의의 대표자로 선출했다.


       이승만과 정한경은 1919년 1월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로 건너갔으나, 미국 정부의 비자 발급이
       거부되면서, 파리강화회의 참석이 좌절되고 만다.


1917년 1차 세계대전으로 한창 싸우는 중에 러시아는 공산주의에
망하면서, 공산화된 소련 연방이라는 나라가 탄생하게 된다.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인 이승만은 우리나라가 일본에서
      해방되더라도, 그당시 공산주의 자가 많았으므로
      이들로 인해 극심한 혼란이 올 것을 예상했다.


이승만과 정한경은 대한민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국제연맹에서 한동안 위임통치를 해달라는 청원서를 작성해
1919년 2월 25일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제출했다.


       이 위임통치 청원은, 중국과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세력들로부터 극심한 비판과 공격을 받는다.


3.1 운동으로 국내가 들끓고 있는 4월 중순에, 이승만은 서재필
정한경 등과 더불어 미국에서의 3.1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제1차 한인회의(대한인총대표회)를 필라델피아에서 개최했다.


       6월 중순 워싱턴에서 대한공화국 본부를 설치한 후, 이미
       대 제국과 조약 체결한바 있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게
       공문을 보내 새로운 민주국가가 탄생했다고 알렸다.


1919년 8월 25일, 워싱턴에서 구미위원부(구미주차한국위원회)를
설립해, 임시정부 행정령 제2호를 발행하며, 임시 대통령은 미국과
유럽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사무를 대표하게 했다.


       구미위원부의 기능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미주 교민들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의 조달이며
       둘째는 미국과 유럽에서 외교 및 선전 활동이었다.


설립 초기부터 대중집회와 강연 활동을 전개하며, 각종 홍보물을
배포하고, 한국친우회의 확대를 통해, 3.1운동의 진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서방세계에 알리는 데 주력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는 6개 지역 이상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자, 제각각 준비하면서 대한의 독립을 선포했다.


       (1919. 03. 17), 대한국민 의회정부 (러시아령),
       (1919. 04. 01), 천도교 중심의 대한민간정부 (서울),
       (1919. 04. 09), 조선민국 임시정부 (서울),
       (1919. 04. 11),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1919. 04. 17), 신 한민국임시정부 (평안도),
       (1919. 04. 23), 한성임시정부 (서울·인천),
      동삼성(東三省 만주일대)의 고려 임시공화국 등이다


그때 이승만은 서울에서 선포된 세칭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와
국무총리로 추대되며,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국무총리 겸 집정관 총재로 추대된 걸 통보 받는다.


       이승만은 외국에 나갈 비자가 없었으므로, 하와이의
       중국인 장의사의 도움으로 관속에 들어가, 중국인의
       시신들과 함께 1919년 12월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중국 상하이에 도착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집정관 총재로 추대되어 약 6개월
동안 임시 집정관( 임시 대통령)으로서의 업무를 집행했다.


       이때 임시정부가 당면한 과제는 대략 세 가지였다.
       첫째는 정부 조직과 운영의 정상화이고,
       둘째는 안정적인 재정확보이며,
       셋째는 장기적인 비전의 제시였다.


이승만은 이들 과제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해야 했으나, 첫번째
국무회의에서부터 각료들간의 사상과 노선의 차이가 뚜렷이
나타나면서 의견 대립만이 빚어졌다.


       위임통치 청원서라니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나라도 찾기 전에 팔아먹었소!
       여러분! 위임통치안을 철저히 규명합시다!


1919년 7월 제5회 전원위원회에서 공산주의자 신채호는 위원장을
맡았으나, 처음부터 이승만의 외교 노선에 반대하며, 위임통치안을
철저히 규명할 것 만을 주장하다가 관철되지 않자 사퇴했다.


       이에 국무총리인 이동휘(李東輝)가 사표를 내자,
       노동국 총판 안창호(安昌浩), 학무부총장 김규식(金奎植),
       교통부 총장 남형우(南亨祐) 등도 임시정부를 떠났다.


이승만 대통령은 신규식(申圭植)을 위시한 이른바 기호파(畿湖派)
중심의 내각구성을 도운 뒤, 외교상의 긴급한 상황과 재정상의
어려움으로 상하이를 떠나, 1921년 6월 말 하와이에 도착한다.


       여러분!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승만은 관속에 들어누워 상하이로 왔으며
       다시 시신들과 함께 하와이로 돌아갔을까요?


독립운동 2. 신채호.
서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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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아폴로 작성시간 24.04.08 이런것을 여기 왜 올려요?
  • 작성자강산해~~ 작성시간 24.04.09 가라.북으로~~
  • 작성자서 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4.09 염려 하신 대로 수정해 다시 올렸습니다.
    읽어주시어 고맙습니다.
  • 작성자문이 작성시간 24.04.16 이런글을 여기에 올리는 이유가 뭘까요?
  • 작성자늑대개 작성시간 24.04.22 댓글들
    이승만 추종자들이 있다는게 더 어질어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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