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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고린도전서 14:1~19/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

작성자별벗|작성시간26.06.22|조회수32 목록 댓글 0

현대 기독교에서 방언(方言, Tongue)에 대해서는 논란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교단에서는 방언을 금지하기도 하고, 어떤 교단에서는 방언을 매우 장려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방언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은사중지론(恩賜中止論, Cessationism)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은사중지론이란 방언이나 예언, 치유 등의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사도 시대가 끝나면서 더 이상 지속되지 않고 중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론입니다. 그렇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役事)는 시대와 상관없이 여전히 일어날 수 있는 하나님의 주권(主權)이기에, 은사가 중지되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성경에서도 성령의 은사가 중지될 것이라거나, 중지되었다고 말씀하는 부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 은사 중에 방언에 관하여는 많은 관심이 집중되기도 합니다. 가장 눈에 띄게 금세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방언으로 기도하는 분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오순절주의(Pentecostalism)를 따르는 교단이나 교회들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을 받았기에 반드시 방언을 해야한다며 방언을 하도록 권유하고, 심지어 방언을 하는 훈련을 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바울도 특히 방언에 관해서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요점 중 하나는 방언도 좋지만,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하려고 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씀합니다(1절). 그리고 이러한 은사를 위한 기본은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절). 굳이 은사를 사모하며 간구하려면 예언하기를 사모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언은 그저 앞일을 내다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1절에 나오는 “예언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문에서 “프로페튜에테”(προφητεύητε)라는 단어가 사용되는데, 이 단어의 원형은 “프로페튜오”(προφητεύω)로, 선지자, 예언자들이 했던 예언하는 것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가르치는 은사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영적인 비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은사입니다.

방언은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방언하는 자도 자기가 말하는 방언의 의미를 알 수 없고, 그 방언을 듣는 자들도 그 방언의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2절). 기도하면서 방언으로 기도하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상황과 진정한 필요를 아시고 기도를 도우셔서 기도하게 하시기에 방언하는 자에게 영적인 유익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하기에 방언으로 기도한 자도 그 기도의 내용대로 살아감에 있어서 어려움이 있기에 그 기도의 열매를 맺기 어려울 때가 있다고 바울은 이야기합니다(14절). 그렇기에 방언으로 말하려면 통역하는 자가 함께 있거나, 방언하는 자가 통역까지 할 수 있을 때 교회공동체에도 유익이 된다고 말씀합니다(5절, 13절).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 모두가 방언 말하기는 원하지만, 특별히 예언하기를 더욱 원한다고 말씀합니다(5절). 그러니 방언을 금지하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함과 동시에, 예언을 더욱 귀하게 여겨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사랑을 추구하며”라고 말씀을 시작했는데, 은사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공동체를 유익하게 하고, 다른 지체들을 유익하게 하여, 교회공동체를 아름답게 세워가기 위해 사용되어야 하기에, 나 자신의 유익만을 구할 것이 아니라 교회공동체와 다른 지체들을 향한 사랑과 배려의 마음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교회공동체와 지체들에게 전하여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여 성숙해지도록 하는 유익이 있으니 예언의 은사를 더욱 귀하게 여기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6절에서는 예언의 은사와 더불어 계시, 지식, 가르치는 것 등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네 가지는 예언의 여러 측면을 강조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피리나 거문고와 같은 악기가 명확한 음을 내지 않고 분별되지 않는 애매모호한 소리를 내거나, 나팔이 제대로 된 소리를 내지 못하면 그 나팔의 신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해 혼란스러운 것처럼 방언도 통역이 없으면 때로는 혼란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7절~11절). 그렇기에 교회공동체를 잘 세워가기 위해서는 영적 혼란을 일으키게 하기보다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행하게 하는 은사들을 더욱 사모하라고 강조합니다(12절).

더불어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할 때 자신의 영이 기도하지만,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 몰라 그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될 수 있기에, 통역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라고 말씀하면서(13절, 14절), 영으로 기도하지만 마음으로도 기도하고, 영으로도 찬송하지만 마음으로도 찬송하길 원한다고 말씀합니다(15절). 14절과 15절에 나오는 “영”(靈)은 헬라어 원어에서 “프뉴마티”(πνεύματι)라는 단어가 사용되었고, 그 원형은 “프뉴마”(πνεῦμα)로 “영”(Spirit), “숨”(Breath)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마음”은 헬라어 원문에서 “노이”(νοΐ)라는 단어가 사용되었고, 이 단어의 원형은 “누스”(νοῦς)인데, “마음”(Mind)으로도 번역되지만, “지성”(知性, Intellect), “이성”(理性, Reason) 등의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면서 인간에게는 영을 주셨는데, 이와 더불어 지성과 이성, 감정 등도 주셨습니다. 지성이나 이성을 비영적인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지성과 이성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영적인 은사를 사용한다고 하면서 신비스러운 것에만 빠져있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지성이나 이성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역사(役事)하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인간의 지성이나 이성으로 인지하여 인간의 의지를 동원하여 순종하며 따르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16절과 17절에서 누군가를 위해 방언으로 기도하였다면, 기도하는 자는 아주 잘 한 것이지만, 그 기도를 받는 자는 덕 세움을 받지 못할 수도 있기에, 통역할 수 있다면 통역하여 그 사람을 잘 세우는 것이 필요하고, 그렇기에 방언으로 일만 마디를 말하는 것보다 주님께서 깨닫게 하신 말씀으로 다섯 마디를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하다고 강조합니다(19절). 그러면서 혹시 바울 자신이 방언을 하지 못하기에 방언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 여길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바울은 자신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보다 방언을 더 말할 수 있는 자라는 것도 덧붙입니다(18절). 바울 자신도 방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지만,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가 공동체를 세워감에 있어서 더욱 유익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기에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기도하는 자에게 매우 유익합니다(2절).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에, 혹은 모두 함께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을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칠 수 있다면 그것이 교회공동체를 세워감에 있어서 더욱 유익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아름답게 사용하여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안창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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