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유 궁전(프랑스어: Château de Versailles)은 프랑스의 베르사유에 있는 왕궁이다.
베르사유는 원래 파리의 시골 마을 중 하나였으나 이 궁전이 세워진 이후부터는 자치권을 가지는 파리 외곽의 도시가 되었다.
또한 베르사유 궁전은 원래 왕이 사냥할 때 머무는 여름 별장이었으나 1682년 루이 14세가 파리에서 이 궁전으로 거처를 옮겨, 1789년 왕가가 수도로 돌아갈 것을 강제될 때까지 프랑스 앙시앵 레짐 시기, 권력의 중심지였다.
바로크 건축의 대표작품으로, 호화로운 건물과 광대하고 아름다운 정원과 분수 그리고 로페라와 거울의 방으로 유명하다. 거울의 방은 벽과 천장이 거울로 된 길이73m의 방인데 1차 세계대전을 형식적으로 마무리지었던 베르사유 조약이 1919년 6월 28일에 이 방에서 이루어졌다.
베르사유 궁전은 한번에 2만 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안뜰을 둘러싸고 있는데 안뜰에는 대트리아농과 소트리아농을 포함하여 작은 궁전들이 있다. 또한 1783년 이 안뜰에서 세계 최초의 열기구가 떠올랐다.
베르사유 궁전이 실제로 궁전으로서 사용된 기간은 매우 짧고, 1715년 루이 14세 사후, 뒤를 이은 루이 15세는 곧바로 파리로 다시 궁전을 옮겼다.
나중에는 빌헬름 1세의 즉위식이 열리기도하였다.
2층에서 내려다본 정원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에 호화스런 궁전을 짓고 이를 바탕으로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 사실은 너무도 유명하다. 베르사이유 궁전이 완성되고 루이 14세가 이 궁전으로 옮겨 살게된 것은 1682년의 일이다.
루이 14세는 각 지방의영주들을 불러 이 궁전 안에서 살게 하였으므로 당시 이 궁전에는 약 5천 명이 살았다. 게란트 쓴 〈화장실 문화사〉를 보면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궁전을 출입했던 수 많은 귀족들이 그들의 배설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상상하면 그저 아찔해질 뿐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건물의 구석 벽이나 바닥 또는 정원의 풀숲이나 나무 밑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일이 비단 베르사이유 궁전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파리의 유명한 샤르르 가르니에의 오페라 하우스도 마찬가지이다. 관람객들은 몇 시간이건 변욕을 스스로 참아내거나 그렇지 않으면 각자가 용기를 지참하는 수 밖에 없었다.
루이 14세가 그때까지 살던 파리의 루블 궁전을 버리고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옮긴 이유도 루블 궁전이 오물로 뒤덮여 더 이상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왕이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화장실 이외에는 베르사이유 궁전 안에 화장실이라고 부릴만한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그 와중에서도 베르사이유 궁전에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밤마다 화려한 무도회가 열렸으니 이들은 부득이 정원의 꽃이나 잔디를 밟고 용무를 해결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궁중 무도회에 초대된 귀족들은 휴대용 변기를 지참하여 생리적인 응급 대비를 하기도 했으나 오물을 비우는 일은 하인들의 몫이다. 이들이 오물을 버리는 곳 역시 으슥한 정원 구석이었고 궁에서 생활하는 궁신들의 배설 또한 이러했다고 하니 오물로 덮힌 궁전의 실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무도회에 참석할 때 여성들은 커다란 모피 주머니에 휴대용 그릇을 넣고 다녔다. 그것은 지름 25센티미터 정도의 길쭉한 도기로서 손잡이가 달린 것이었는데 하이리이스 소스를 담는 그릇같이 생긴 것이다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역사적 중요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다.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후 프로이센 왕이 독일 황제로서의 즉위식을 거행하였으며, 제3공화정 초기의 의회가 열렸고, 1919년 6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 후
강화조약의 조인이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정원은 전형적인 프랑스 정원으로, 기하학적으로 구성된 데다가 수로와 샘물이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자연을 인간의 예술에 복종시키려는 서구사상을 엿볼 수 있다. 주변에는 루이 14세의 별궁이었던 그랑트리아농(Grand Trianon)과 마리앙투아네트가 거주했던 프티트리아농(Petit Trianon)이 있다.
프랑스 비운의 왕비 '마리앙뚜아네트(Marie-Antoinette),,,!!!'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Franz I)와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사이의 11번째 딸이었던 마리 앙투와네트(Marie-Antoinette)는 선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프랑스와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프랑스 루이 15세의 손자 루이 왕세자(후일 루이 16세)와 16세의 어린나이에 정략적으로 결혼을 하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자유분방하게 성장한 '마리 앙투와네트(Marie Antoinette)' 달리 왕세자 '루이'는 작업실에 틀여박혀 열쇠따위를 연구하는 등 내성적이며 따분한 성격의 무뚝뚝한 남편이었다고 하니 미루워 짐작해보건데 부부로써의 뜻이 맞지 않아 갈등이 심했을 것 같기도 하다. 결혼후 7년동안이나 아이를 가질수 없었던 것으로 보아 루이가 성불구자였다는 설도 꽤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인 것 같다. 물론 후일 완치가 되어 2남1녀의 자식을낳기도 했지만 첫째딸과 두번째 아들은 병으로 죽고 후일 루이17세가 된 막내아들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 처한 '마리앙뚜아네트(Marie Antoinette)'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베르사유 정원' 한 구석에 있었던 '프티 프리아농'이란 곳에서 호화 파티나 가면무도회를 자주 열었으며, 그런 파티를 통하여 그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한다.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선 당연히 자신의 몸을 치장하는 의사, 장신구, 보석 같은 곳에 엄청난 비용을 쓰게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무튼 1,774년 남편 '루이'가 왕위에 오를 무렵에도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왕비라는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자신이 좋아하던 경박한 궁정 신하들의 작은 모임에 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사교에만 열심이였다고 한다. 그렇듯 그녀의 사치스런 치장과 방탕한 소비로 인해 궁정비 지출은 늘어나고 1770, 1780년대에 프랑스가 막대한 부채를 안게 되는 데 그녀의 과소비가 한몫을 했다고 한다.
더더욱 방탕한 궁정 귀족들과 가까이 지냄으로써 그녀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그녀가 혼외정사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며 대주교까지 개입되었던 사기꾼 '라 모트' 부인의 다이아몬드목걸이 사건에 개입되는 등 쓸데없는 구설수에 휘말리게 됨으로써 가득이나 방탕한 사치에 빠진 왕비를 미워하고 있던 시민들의 미움을 더 많이 받게 되었다고 한다.
1,789년 7월14일 왕정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역사적인 프랑스혁명이 발발하고 말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로 부터 비호를 받던 측근의 귀족들은 그녀를 버리고 다른 나라로 망명을 하고 만다. 또한 국왕일가는 혁명군에 의해 '마르사이유궁전'에서 파리의 '퀼르리궁전'으로 옮겨져 혁명군의 감시를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
1,792년 드디어 역사적인 프랑스혁명전쟁이 발발하고 만다. '적군에게 프랑스군의 작전을 몰래 알려주고 있다' 라는 소문이 파리시민과 의용군들 사이에 퍼지고 이에 격분한 시민들과 의용군은 퀼르리 궁전을 습격하여 국왕 일가를 체포 탕플탑에 투옥시키고 만다. 1793년 1월 21일, 혁명 재판은 루이 16세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고 단두대로 참수형에 처하고 만다. 그해 8월 1일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탕불탑에서 콩세르쥬리 감옥으로 이감된 뒤, 10월 초에 공개 재판을 받고 1,793년 10월 15일 그녀는 혁명 재판으로부터 사형 판결을 받았으며, 다음날인 10월 16일, 콩코드 광장에서 남편의 뒤를 따라 단두대에 의해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참고로 단두대로 참수형을 할때는 사형수의 얼굴을 아래로 향하게 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녀에 대한 시민들의 증오심이 얼마나 격렬했던지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위에서 칼날이 떨어져 내려오는 것을 볼 수 있게 일부러 얼굴을 위로 향하게 하고 처형을 했다고 한다.
궁전 뒤에 자리한 공원은 성남시 만한 크기로 배도 들어오고 사냥도 즐겼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