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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맹사성고택(孟思誠古宅)-아산 맹씨 행단(牙山 孟氏 杏壇) 탐방

작성자이장희|작성시간14.05.09|조회수414 목록 댓글 0








 

맹사성고택(孟思誠古宅)-아산 맹씨 행단(牙山 孟氏 杏壇) 탐방

(2013/09/09 현재)


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 300 에 있는 조선 전기 청백리로 유명한 고불 맹사성
(1360∼1438) 가족이 살던 집으로, 원래 고려 후기에 최영 장군이 지은 집이라고
전하기도 하는 맹사성고택(孟思誠古宅)인 아산 맹씨 행단(牙山 孟氏 杏壇) 전경 입니다.
온양(溫陽)읍에서 보면 동남쪽으로 차령산맥이 뻗어 있는데 이 산맥의 한 줄기가
내려오다 큰 산봉우리를 이루는데 이산을 설화산(雪華山) 또는 배방산(排方山)이라
부릅니다. 또한 촛불같이 뾰족한 산봉우리가 다섯이 솟아있어 오봉산(五峯山)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산의 맥이 북쪽으로 굽이쳐 내려오다가 평평한 지형을 이루는데
단정한 좌청룡(左靑龍)의 지세와 웅장한 우백호(右白虎)의 지세가 명당(明堂)을
호위하고 있는 풍수상 길지(吉地)에 맹씨행단이 터를 잡고 있습니다.
맹사성은 고려말 · 조선초의 문신으로, 최영 장군의 손주사위입니다. 고려 우왕
12년(1386)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검열, 전의시승 등을 지내고 조선 태조 때에는
예조의랑, 이조참의, 예문관대제학, 우의정의 벼슬을 했다.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효성이 지극하였으나, 조정의 중요한 일을 의논할 때는 과감하게 일을 처리하였으며,
황희(黃喜), 허주(許周)와 더불어 이 집 후원에 괴목(槐木) 9주를 심어 구괴정(九槐亭)
이라 하고 그 터를 삼상평(三相坪)이라 하였습니다.‘행단(杏壇)’이란 선비가 학문을
닦는 곳이라는 뜻인데, ㄷ자형 맞배집으로 이곳은 우리나라 일반 백성이 살던 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집의 마당에는 600년이 된 은행나무
2그루가 서 있고, 뒷동산에는 느티나무 ·전나무·감나무 들이 넓은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집 앞의 개울가에도 느티나무·버드나무 등이 많이 자라고
있으며, 담장 안 마당에는 채소밭도 만들어져 있다.  


 

 

 

 

 

 

 

 

 

 

 

 

 

 

 

 

 

 

 

 

 

 

 

 

 

 

 

 

 

 

 

 

 

 

 

 

 

 

 

 

 

 

 

 

 

 

 

 

 

 

 

 

 

 

 

 

 

 

 

 

 

 

 

 


■아산 맹씨 행단 (牙山 孟氏 杏壇)

 

-종 목 사적  제109호 
-지정(등록)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 300 
-소유자(소유단체) 사유
-관리자(관리단체) 아산시


조선 전기 청백리로 유명한 고불 맹사성(1360∼1438) 가족이 살던 집으로, 원래 고려 후기에 최영 장군이 지은 집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맹사성은 고려말 · 조선초의 문신으로, 최영 장군의 손주사위이다. 고려 우왕 12년(1386)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검열, 전의시승 등을 지내고 조선 태조 때에는 예조의랑, 이조참의, 예문관대제학, 우의정의 벼슬을 했다.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효성이 지극하였으나, 조정의 중요한 일을 의논할 때는 과감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행단(杏壇)’이란 선비가 학문을 닦는 곳이라는 뜻인데, ㄷ자형 맞배집으로 이곳은 우리나라 일반 백성이 살던 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집의 마당에는 600년이 된 은행나무 2그루가 서 있고, 뒷동산에는 느티나무 ·전나무·감나무 들이 넓은 숲을 이루고 있다. 또한 집 앞의 개울가에도 느티나무·버드나무 등이 많이 자라고 있으며, 담장 안 마당에는 채소밭도 만들어져 있다. 이 집을 통해 조선 전기 민가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다.


온양(溫陽)읍에서 보면 동남쪽으로 차령산맥이 뻗어 있다. 이 산맥의 한 줄기가 내려오다 큰 산봉우리를 이루는데 이산을 설화산(雪華山) 또는 배방산(排方山)이라 부른다. 또한 촛불같이 뾰족한 산봉우리가 다섯이 솟아있어 오봉산(五峯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산의 맥이 북쪽으로 굽이쳐 내려오다가 평평한 지형을 이루는데 단정한 좌청룡(左靑龍)의 지세와 웅장한 우백호(右白虎)의 지세가 명당(明堂)을 호위하고 있는 풍수상 길지(吉地)에 맹씨행단이 터를 잡고 있다.

 

이 집은 조선초기 청백리로 유명한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의 가족이 살던 집이다. 원래 고려말 최영(崔瑩)장군이 지은 집으로 전하기도 한다. 맹사성은 그의 벼슬이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는데 황희(黃喜), 허주(許周)와 더불어 이 집 후원에 괴목(槐木) 9주를 심어 구괴정(九槐亭)이라 하고 그 터를 삼상평(三相坪)이라 하였다. 집 마당가에는 단(壇)을 만들어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었는데 현재 마당가에는 은행나무가 서 있다.

 

이 맹씨행단은 우리나라 민가(民家)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의 하나로 이 집을 통해 조선초기 민가조원의 모습을 잘 알 수 있으며 행단(杏壇)이란 선비가 학문을 닦는 곳이란 뜻이다. 좁은 개울이 집 앞을 흐르고 이를 지나 돌계단을 올라 정면 7칸의 문간채가 있는데 문간채의 대문칸은 솟을 지붕이다. 문간채 좌우로 길게 돌담이 둘러쳐 있으며 문간채 안에는 안채가 있다. 안채 우측에는 높이 5자의 석축단이 있는데 계단을 올라가면 그 단에 수백년 된 두 그루 은행나무가 마당가에 서 있다. 이단에 H형의 본채 건물이 서 있는데 본채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건물로 중앙 2칸이 대청이고 양측칸이 온돌방이다. 건물기단은 자연석으로 조성되었으며 본채에서 안으로 높은 곳에 단을 지우고 가묘(家廟)의 사당을 배치하고 있다. 집 경역은 2,300여평으로 자연석 담을 둘렀으며 후원은 느티나무, 전나무, 감나무 등이 넓은 원림(園林)을 이루고 있다. 또한 집 앞 개울가에도 느티나무, 버드나무 등의 원림이 조성되어 있다. 담장내 마당가에는 채소밭도 조성되어 있다.

 

■맹사성(孟思誠)-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맹사성(孟思誠, 1360년 8월 28일/음력 7월 17일 ~ 1438년 10월 22일/음력 10월 4일)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정치인, 유학자이다. 본관은 신창이다.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동포(東浦)이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고려 수문전제학 맹희도(孟希道)의 아들이며 고려말의 명장인 최영의 손녀 사위이다. 황희, 윤회, 권진과 함께 세종 대에 재상을 지냈으며 세종의 측근 중의 한 사람이었다.


▶생애 초반

 

맹사성은 충청남도 아산 온양 출신으로 모친을 여읜 뒤 어린 나이에 3년간 시묘를 하여 훗날 그의 이야기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수록됐다. 1386년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춘추관검열이 되었고,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자 관직을 사퇴하였으나, 조정에 출사하여 후배들을 지도하라는 동료들의 권고로 조선에 출사했다. 맹사성은 최영의 손녀 사위였는데 처조부인 최영을 본받아 인생의 사표로 삼았다. 또한 그의 재능을 특별히 눈여겨 본 이성계는 그가 자신의 정적 최영의 손녀 사위임에도 연좌시키지 않고 중용하였다.

 

▶정치 활동

 

1392년 조선 개국 직후 태조로부터 예의좌랑직을 제수받았다. 1408년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역모 사건을 취조하는 중에 태종에게는 보고도 하지 않고 태종의 부마이자 조준의 아들인 조대림을 고문했다. 이 사건으로 맹사성은 왕과 왕족을 능멸하였다는 죄목으로 처형 직전까지 가게 되었으나 당시 영의정이던 성석린과 황희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을 면하였다.

 

1417년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고 1418년 세종 즉위 후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 이조판서를 거쳐 의정부찬성사를 지냈다. 세종 13년에 좌의정이 되어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청백한 선비로도 유명한 일화를 많이 남겼다. 황희와 함께 조선 초기 문화를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을 정리하기도 했다. 《태종실록》 편찬을 감독했고, 《팔도지리지》를 편찬하였다. 또한 맹사성은 검소한 관리, 효자로 표창받아 정문이 세워졌으며 직접 쓴 작품에 유명한 〈강호사시가〉가 있다 .

 

세종이 가족을 잃고 불교에 귀의하자 성리학자이기도 한 그는 조선이 유교국가임을 주장하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세종이 궐내에 내불당을 설치하고 태종 때 억울한 사람들의 명복을 빌어준다고 하자, 그는 세종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설득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번에는 집현전 학사들 일일이 찾아다니며 불교 귀의를 반대하였다.

 

그는 평소 하인이나 노비에는 관대했으나 중요 직책의 사람들에게는 엄하게 대하였으며 자식에 절하기로 술버릇 가르쳤다. 또한 김종서의 장수로서의 재질을 알아본 그는 김종서의 사소한 잘못도 엄격하게 혼냈다. 그 뒤 김종서를 병조판서로 천거한 뒤 자신의 후임자로 추천하기도 했다.

 

▶예악의 정비

 

조선시대 유교정치에 있어서 예악, 즉 예의와 음악은 가장 중심적인 부분이었다. 공자는 자신의 삶을 도덕에 근거하고 인애에 의지하며 예술 경계에서 노니는 것이라고 했다. 예악은 유교적 삶이 추구하는 최고의 경계였다. 그러기에 법치보다는 예치를 추구했는데, 이것은 아름다운 정치를 지향한 것이었다.

 

세종 때 예악의 정비가 우의정 맹사성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박연을 중심으로 한 젊은 관리들은 선조들로부터 이어져 온 고유의 전통 음악을 버리고 중국 음악 중심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맹사성은 전통 음악과 중국 음악을 조화하고 융합하는 방향에서 음악을 정비했다.

 

▶여진 정벌

 

세종 시대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북방 영토가 확정됐다. 당시 관료들은 북방의 여진족에 대해 정벌보다는 현상 유지를 주장했다. 그러나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필요에 따라 여진족에 대한 회유와 정복을 병행하면서 주도면밀한 전략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옛 땅을 회복했다.

 

세종은 1433년 1만 5천명의 병력으로 파저강 유역의 여진족에 대한 정벌에 나섰다. 적 사망 170명, 포로 36명, 우마 170마리를 얻었으며, 아군의 피해는 전사자 4명, 부상자 20명에 불과한 대승리였다.

 

이 때 좌의정이었던 맹사성은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권진과는 달리 세종의 여진 정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이 작전을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실천했다. 정벌 시기, 군사 규모, 최윤덕을 중심으로 한 정벌군 조직, 7개 부대에 의한 동시다발적 기습 작전 등은 모두 맹사성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정벌 후 맹사성은 모든 공을 최윤덕에게로 돌려 그를 좌의정에 승진시켜 줄 것을 건의했다. 그는 좌의정 직을 사임할 각오까지 했지만, 세종은 최윤덕을 우의정으로 승진시켰다. 세종이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이겨내고 여진족 정벌을 통해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맹사성의 역할이 지대했던 것이다.

 

▶온양 온천

 

세종은 격무로 인해 잦은 질병으로 고통을 겪어 온양으로 내려와 온천욕으로 질병을 치료했다. 이 기념으로 '온양'이라는 지명을 하사했다. 그런데 세종은 온천 치료의 혜택이 백성에게도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백성을 위한 온천탕을 만들고 백성들이 장기간 머물면서 치료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러한 세종의 뜻에 대해 맹사성은 즉시 찬성하여 시행되도록 했다. 온양에 살았던 맹사성은 온천치료의 효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맹사성은 세종이 조선의 온천 복지 정책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데 일조했던 것이다.

 

▶최후

 

만년에 가서 벼슬을 사양하던 맹사성은 1438년 칩거하고 있던 온양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평소에 소를 타고 다니기를 좋아했고,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기기도 하였다. 사람 됨됨이가 소탈하고 조용하며 사심이 없고, 엄하지 않아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나 한미한 사람이 방문해도 무시하지 않고, 반드시 공복을 갖추고 대문 밖에까지 나가서 맞이했으며, 손님에게 반드시 상석을 내 주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몇 번이나 노부의 병 간호를 위해 벼슬을 내놓았지만 세종은 한번도 그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다.

 

▶가족 관계

 

부 : 맹희도
모 : 홍씨
처 : 철원 최씨
아들 : 맹귀미
처조부 : 최영


▶일화

 

1435년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으나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자문하였다 한다.맹사성의 사람됨이 소탈하고 엄하지 않아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을 갖추고 대문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역시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공무가 아닌 일에는 결코 역마를 이용하지 않고, 소를 타고 다니거나 걸어다녔다 한다.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 조정에서 봉급으로 주는 쌀)로 하였고, 바깥 출입을 할 때에는 소타기를 좋아해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처럼 지혜로우면서도 청렴 결백한 맹사성의 성품은 요즘 사람들에게 더욱 귀감이 되고 있다.


▶황희, 윤회와의 비교

 

세종은 문치주의 정책을 펼치면서도 건강이 나빠서 세 명의 정승에게 조정의 대소사를 맡아보게 하였다. 황희는 주로 인사, 행정, 군사 권한을 맡겼고 맹사성에게는 교육과 제도 정비, 윤회에게는 상왕 태종과의 중개자 역할과 외교 활동을 맡겼고, 과거 시험은 맹사성과 윤회에게 분담하여 맡겼다. 나중에 김종서가 재상의 반열에 오를 때쯤에는 국방 업무는 김종서에게 맡겨서 보좌하게 하였다.

 

맹사성과 황희는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도 서로 다른 성품을 가졌다. 황희가 분명하고 강직했다면,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했다. 또한 황희가 학자적 인물이었다면 맹사성은 예술가적 인물이었다. 윤회 역시 예술가적인 특성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황희는 주로 이조, 병조 등 과단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고, 맹사성은 예조, 공조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으며 윤회는 외교와 집현전 쪽을 주로 맡아보았다.

 

세종은 부드러움이 필요한 부분은 맹사성에게 맡기고, 정확성이 요구되는 부분은 황희에게 맡겼다. 따라서 황희는 변방의 안정을 위해 육진을 개척하고 사군을 설치하는 데 관여, 지원하기도 했고, 외교와 문물 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이에 반해서 맹사성은 음률에 정통해서 악공을 가르치거나, 시험 감독관이 되어 과거 응시자들의 문학적, 학문적 소양을 점검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 맹사성과 비슷한 윤회에게는 주로 외교 업무와 상왕 태종과의 매개자 역할, 외교 문서의 작성과 시험 감독관 등의 업무가 부여되었다. 세종대왕은 이들 재상들의 능력을 알면서도 권력남용의 가능성을 우려하여 한 사람에게 대권을 모두 넘겨주지는 않았다. 이들 재상들은 맡은 분야와 업무를 서로 분장하거나 서로 공유하기도 했다. 맡은 역할과 성격을 떠나 이들은 모두 공정하고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맹사성 [孟思誠]- 브리태니커  1360(공민왕 9)~ 1438(세종 20).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 고려말에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을 지낸 희도(希道)의 아들이며, 최영(崔瑩)의 손녀사위이다.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해 춘추관검열·전의시승·기거랑·사인·우헌납·수원판관·내사사인 등을 역임했다. 조선에 들어와 예조의랑·간의우산기상시·간의좌산기상시·공주목사를 지냈다. 태종초에 좌사간의대부·대언·이조참의를 거쳐, 1407년(태종 7) 예문관제학으로 진표사(進表使)의 시종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다음해 한성부윤이 되고 이어서 사헌부대사헌·판충주목사·풍해도도관찰사·이조참판·예조판서를 역임했으며, 1417년 생원시의 시관(試官), 왕이 친림한 문과 복시의 독권관(讀卷官)이 되었다. 이조판서·예문관대제학·의정부찬성사를 거쳐 1427년 우의정, 1432년 좌의정을 지내고 1435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음률에 밝아 관습도감제조(慣習都監提調)인 그가 1411년 판충주목사로 임명되어 외직으로 나가게 되자 예조는 선왕(先王)의 음악을 복구하기 위해 서울에 머물도록 건의했으며, 풍해도도관찰사로 임명되었을 때도 영의정이던 하륜(河崙)이 서울에 머물면서 악공(樂工)을 가르치게 해달라고 건의했다. 우의정으로 있을 때 〈태종실록〉 편찬에 감관사(監館事)로 참여했다. 청백했으며 관직이 낮은 사람이라도 예로 잘 접대해 이름이 높았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인물&역사] ‘변절자 콤플렉스’ 맹사성… 원칙과 소신으로 극복 
 

 맹사성(1360~1438)

고려 멸망 6년 전인 27살에 과거에 급제해 관료의 길
이성계의 조선 거부한 가문의 뜻 저버리고 고려 등져
비정치적 행보·청렴결백한 삶으로 역사에 칭송받아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 정신은 왕조시대의 핵심적 가치였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의 <전단 열전>에 따르면, 이 말은 중국 전국시대 제나라 신하인 왕촉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왔다. 제나라를 격파한 연나라 장군이 자신에게 사람을 보내 협력을 요청하자, 왕촉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남편을 바꾸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리 조상들은 《명심보감》이나 《소학》 등을 통해 왕촉의 명언을 어려서부터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그래서 왕촉의 정신은 옛날 한국 사회에서도 핵심적인 가치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충신불사이군 정신을 위반한 사람들은 옛날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사회적 지탄을 받는다. 오늘날에도 국적이나 정당 혹은 회사를 잘못 바꿨다가는 변절자란 비난을 받기 쉽다. 이 세상에 변절자란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세상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세상을 살다 보면 자기의 의지와 관계없이 부득이하게 두 임금을 섬기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가급적이면 이런 상황을 피해야겠지만 혹시라도 이런 일로 곤경에 빠진다면 고려 말과 조선 초에 활동한 맹사성(1360~1438)의 삶과 고뇌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경우에 그는 훌륭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고려 멸망 32년 전 충청도 온양에서 출생한 맹사성은 다섯 살 때 천자문을 줄줄 외웠을 정도의 천재였다. 그는 고려 멸망 6년 전인 1386년에 스물일곱 살의 나이로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관료의 길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의 천재적인 머리가 고려왕조를 위해 사용될 기회는 사실상 없었다고 봐야 한다. 무엇보다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의 본격적인 경력은 조선 건국과 더불어 시작됐다. 건국 뒤에 태조 이성계 정권하에서 수원판관(수원시청 국장급)에 임명된 그는 한성부윤(서울시장)·대사헌(검찰총장)·예조판서·호조판서·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 등을 거쳤다.

 

그가 특히 두각을 보인 시기는 40대 초반 이후인 태종과 세종 시대였다.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에, 황희와 더불어 맹사성에게 세종을 보필해줄 것을 당부했다. 세종은 태종이 신임한 것보다도 훨씬 더 맹사성을 신임했다. 세종은 그가 퇴임한 후에도 중요 사안에 관해서는 반드시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 정도로 맹사성은 성군인 세종의 시대를 움직인 특급 참모였다.

 

이처럼 조선왕조에서 화려한 이력을 남겼지만, 맹사성의 가문을 살펴보면 그가 그런 경력을 남겼다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는 이성계의 정적인 최영의 손녀사위였다. 그의 아버지인 맹희도 역시 이성계의 정적인 정몽주와 절친한 사이였다. 그래서 그는 정몽주와도 각별한 사이였다.

 

이런 인연 때문에 그의 집안은 조선왕조를 거부하고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을 선택했다. 그의 할아버지 맹유는 조선 건국 뒤에 오늘날 황해북도 개풍군 광덕산 기슭의 두문동에서 칩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역시 두문동에 들어갔다가 나중에 충청도 서천으로 피신했다. 두문동에 들어간다는 것은 조선과 이성계에 대한 거부의 상징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두문동에 들어갔으니, 맹사성의 집안은 누가 봐도 신왕조를 부정하는 가문이었다. 이 시대에는 가문이 개인의 정체성과 운명을 결정했다. 당시의 가문은 지금으로 치면 정치단체인 동시에 기업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가문을 저버리는 것은 정당을 저버리고 회사를 저버리는 일이었다. 따라서 맹사성 역시 가문의 분위기를 좇아 조선왕조에 저항하는 것이 순리였다.

 

하지만 맹사성은 이른바 ‘자의반 타의반’으로 고려를 저버렸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단순히 왕조를 배신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가문을 배신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의 변절은 ‘이중의 변절’이었다. 그가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버지는 물론이고 아버지의 후배인 권근까지 나서서 ‘변절’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만큼은 출세해서 가문을 일으켜야 한다’고 부추겼다. 권근 역시 처음에는 조선을 반대했다가 나중에 적극 가담한 인물이다. 이렇게 해서 맹사성은 30대 나이에 ‘변절자의 삶’을 시작했다. 두 임금을 섬기지 말라고 배웠지만 결국 두 임금을 섬기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이런 내력을 보면 맹사성이 얼마나 눈치를 보며 살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또 그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인생을 살았을지 추측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자칫하면 눈치만 보다가 어설프게 인생을 마칠 수도 있다. 혹은 지나친 줄서기나 아부로 세상의 욕을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아주 성공적으로 인생을 살았다. 변절자 낙인이 찍히기 십상인데도, 도리어 역사가 칭송하는 삶을 산 것이다. 변절을 요구하는 ‘연나라 장군’의 요청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았지만, 맹사성 역시 왕촉 못지않게 훌륭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 비결은 맹사성의 확고한 인생철학에 있다. 법과 원칙에서 이탈하지 않고 비정치적 노선을 견지한 것이다.

 

맹사성이 이런 인생철학을 훌륭하게 실천했음을 증명하는 사례는 많다. 하나는, 그가 대사헌이었을 때 발생한 목인해 사건(1408)이다. 이것은 태종의 측근인 목인해가 공을 세우고자 태종의 사위인 조대림에게 군대를 이동시키도록 부추긴 뒤 그를 역모 혐의로 고발한 사건이다. 태종은 조대림이 스물한 살밖에 안 되는 데다가 순전히 목인해의 꼬임에 빠져 행동했으므로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검찰 수장’인 맹사성은 원칙을 고수했다. 그는 자신의 직권을 소신껏 행사했다. 부마 신분에 개의치 않고 조대림을 고문하고 수사한 것이다. 태종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사위를 살릴 목적으로 사법수사에 개입했다. 사건을 빨리 덮기 위해 목인해에 대한 참형을 독촉한 것이다. 그러자 맹사성은 조대림에 대한 수사가 끝날 때까지 참형을 집행할 수 없다고 맞섰다. 요즘 말로 하면, 맹사성은 대통령에 맞서 검찰의 독립성을 주장한 검찰총장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대사헌은 주상을 이기지 못했다. 결국 사건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목인해는 참형을 받고 조대림은 무혐의로 풀려났다. 맹사성은 왕실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곤장 100대를 맞고 충청도로 유배됐다. 40대 후반에 곤장 100대를 맞고도 죽지 않은 것을 보면 관원들이 형벌을 ‘살살’ 집행했음을 알 수 있다.

 

법과 원칙에 대한 맹사성의 자세를 보여주는 이 사건은 도리어 그가 태종의 신임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태종은 얼마 안 있어 그를 복귀시키고 위로의 파티까지 열어주었다. 훗날 태종이 황희와 맹사성에게 세종을 맡긴 것을 보면, 이 사건을 계기로 맹사성에게 호감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맹사성을 두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는데, 저 혼자만 조선을 택한 변절자’라고 비난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철저히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을 두고 ‘원칙 없는 변절자’라는 비판을 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맹사성의 인생철학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세종 때의 실록 열람 문제다. 설령 임금일지라도 선왕 시대의 역사기록인 실록을 마음대로 열람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세종(당시 34세)은 왕이 된 지 13년 뒤인 1431년 아버지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태종실록》을 열람하고자 했다. 이때 일흔두 살이던 맹사성은 세종의 열람을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그는 “만일 전하께서 이것을 보신다면 후세의 임금들도 이를 본받아서 실록을 고치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관도 군왕이 볼 것을 염려하여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이런 식으로 하면) 어찌 후세에 진실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직언했다. 결국 세종은 열람을 포기했다. 이처럼 맹사성은 70대에 들어서도 꼬장꼬장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이라면 “변절자 주제에 별소리 다 하네!”라며 비꼴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맹사성은 그런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언제나 소신을 지켰다.  

 

이런 사례들에서 나타나듯이 맹사성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법과 원칙을 지켰다. 이런 자세 덕분에 그는 변절자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성군 세종의 특급 참모가 될 수 있었다. 이 외에 비정치적 행보와 청렴결백도 그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만약 그렇게 살지 않았다면, 그는 “변절자라서 할 수 없구나”란 조롱을 들었을 것이다.

 

맹사성은 스스로가 보기에도 자기의 삶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법과 원칙에서 이탈하지 않은 삶이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변절자 콤플렉스로 오므라들지 않았다. 그런 콤플렉스를 거뜬하게 극복했기 때문이다. 그의 그런 내면을 반영하는 것이, 늙어서 은퇴한 뒤에 지은 ‘강호사시가’라는 유명한 시조다. “강호에 가을이 찾아오니고기마다 살이 붙어가는구나 / 작은 배에 그물을 실어 띄워놓고 / 이 몸이 이렇게 날을 보내는 것도 역시 임금의 은혜로구나.”

 

어떻게든 충신불사이군 정신을 위반하지 않는 게 현명한 삶이다. 그러나 살다 보면 그런 삶을 살기가 힘든 경우도 있다. 자기의 의지와 관계없이 두 임금을 섬기게 될 수도 있다. 만약 그런 처지에 놓인 사람이 있다면 맹사성의 삶과 고뇌로부터 희망과 격려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글=김종성<동아시아역사연구가>

 


●고불 맹사성1360(공민왕 9년)∼1438(세종 20년)을 찾아서

- 맹현과 맹산의 유래, 행단과 묘소를 찾아서

 

 고불 맹사성이 생전에 살았던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2리에 위치한 맹씨행단孟氏杏亶을 찾았다.   이곳은 사적 제 109호로서 지정된 문화재이다. 집 앞쪽에는 입구 왼쪽으로 맹사성이 생전에 불던 옥적, 표주박, 우의정 및 좌의정 임명장 등을 전시한 유물관이 있고 행단으로 들어가는 길에 후손집이 있는데 후손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맹씨행단을 돌보고 있다.이곳 행단에서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 맹사성이 생전에 살던 고택, 세덕사世德祠가 있고 집 왼쪽뒤 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구괴정九槐亭을 볼 수 있다. 맹사성이 살던 이 고택은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민가로는 가장 오래된 집으로 본채와 사랑채로 구성된다.


  이곳 마당은 낮은 돌담으로 되어 있으며 행단은 낮은 산들로 둘러 싸여서 아늑한 지세를 만들고 있다. 행단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맹 정승께서 심은 600여년이 넘은 은행나무 고목 두 그루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이로 인하여 행단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본래 ‘행단杏亶이란 공자가 은행나무 위에서 가르쳤다는 얘기에서 유래하여 나온 말로 학문을 닦는 곳임을 상징한다. 이러한 연유로 맹사성은 이 은행나무 두 그루를 손수 심고 학문에 정진하며 후학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이 나무에서 매년 은행을 다섯 가마니를 딴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고택의 본채 뒤편에는 맹정승과 그 부친인 맹희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자리를 잡고 있다. 맹 정승과 그의 부친 희도, 조부 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 세덕사이다.그리고 왼편으로 올라가서 문을 나서면 100m 정도가 떨어진 지점에 정자가 한 채 서있는 데 바로 구괴정이다. 맹사성은 한가한 틈이 생기면 구괴정九槐亭에 영의정인 황희를 비롯한 사람들을 초청하여 국사를 의논하고 학문과 한담을 즐겼다고 한다.언젠가 영의정인 황희와 권찬을 이곳에 초청하고 이를 기념하여 삼정승이 각기 홰나무槐 3그루씩 심었는데 그 홰나무는 세월이 흐르며 없어지고 현재 2그루만이 구괴정九槐亭을 지키고 있다. 세 정승이 즐기던 그 정자를 《삼상당三相堂》이라고 한다.

 

  맹씨행단의 지세를 간단히 살펴보면 금북정맥의 광덕산廣德山(699.3m)의 줄기가 뻗어 나와서 솟은 설화산을 진산으로 하여 앞으로 배방산이 자리잡고 주위로 나지막한 산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어서 아늑한 형국을 연출하여 그야말로 풍수적으로 볼 때에 매우 길한 형세이다.이곳은 원래 고려말기 충절의 전형을 보여주던 최영(1316년∼1388년)장군이 살던 가옥이었다. 맹사성이 이 마을에 살게 된 것은 그가 다섯 살 때 정도로서 아버지인 맹희도가 온양에 정착하게 되면서 부터인데 최영장군과 이웃하여 살았다.   최영장군이 지금의 영의정인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어 중앙정치에 참여하여 개성으로 이사를 가면서 평소 친분이 두터운 맹정승의 조부에게 주었던 집으로 맹정승은 최영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뒤편으로 문필봉文筆峰이 자리하는데 어질고 인자한 형태로 좋은 운명으로 본다, 설화산은 수려한 문필봉이 있어 문장에 뛰어나거나 벼슬과 명예가 뛰아난 자리로서 알려져 있다.이러한 설화산의 흐름이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오다 자리를 잡은 것이 맹사성 고택이다. 좌측의 청룡은 높은 아미사蛾眉砂로 서풍을 막아주며 명당을 감싸고 있으나 많이 훼손되어 있다. 우백호 뒤편 역시 아미사 형태를 연출하고 있다. 안산案山으로는 배방산이 자리하여 북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전형적으로 북향을 하고 있는 명당이다.

 

  그리고 중리 마을 입구에 들어서기 조금 전 오른쪽 길옆에 영조가 맹씨후손을 방문하였다가 하사한 비와 맹씨가문이 조정에서 받은 정려문 및 비림碑林이 있어 이곳이 신창맹씨의 세거지임을 알려준다. 정려문에는 맹사성과 그 부친의 효행이 세종때 편찬된 《삼강행실도》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효행이 함께 기록되어 있는데 그 기록의 ‘맹사성조’를 살펴보자  “좌의정 맹사성은 온양군 사람이라 정성과 효도가 하늘에 나서 십세에 이미 자식의 직임을 다하더라.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아니하고 7일간이나 울며 통곡하였고, 이어서 초분을 짓고 3년간이나 시묘하니 철이 되어도 풀이 나지 아니했다. 잣나무를 무덤 앞에 심었더니 멧돼지가 건들어 시들게 되었다. 그것을 보고 사성이 통곡하니 다음날 멧돼지가 범에게 물려 죽었더라. 이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효도에 감동함이라 하더라. 공정恭靖조에 효자정문孝子旌門하다.”

 

  맹사성의 효행은 주위에 널리 퍼져서 온주현감이 예조판서에 진정하여 효자비를 내려서 현재 아산시 배방면 중리 맹씨행단으로 들어가기 전에 비림에 맹희도, 맹사성, 맹흠의 효자정각과 며느리 양주조씨 효부 정려각이 남아있다.   그리고 등산을 겸하고 싶거나 외암리 마을을 찾고자 하시는 분들은 마을 길을 따라서 올라가다가 오른쪽으려 가면 1시간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외암리마을 뒷산으로 이어지는 설화산과 외암리를 답사할 수 있다.

 

  고불 맹사성孟思誠은 세종 때 명신으로서 황희, 김종서 등 명신과 함께 오랫동안 정승으로 있었다. 그는 워낙 소탈하여 고향 아산에 있는 부모님을 찾아 뵐 때나 평소 주변을 찾을 때는 항상 검은 소등에 타고 피리를 불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태어날 당시는 물론이고 살아가면서 전설의 고향과도 같은 재미난 많은 일화가 전하고 있는데 그의 탄생설화를 살펴보자.

   
 ▶ 맹사성의 탄생과 혼인 설화

  

  맹씨는 신창맹씨 단본으로 맹자의 51대손 되는 맹의孟儀가 문무를 겸비해 나라에 큰 공을 세워 고려 제26대 충선왕이 그의 출생지 지명을 따 신창백新昌伯이란 작위를 수여하면서 시작된다.맹의의 아들 맹유孟裕는 고려 충숙왕 2년 태어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최영 장군과 가까워서 최영의 손녀딸을 손자며느리로 삼아 사돈관계가 되니 맹사성의 부인이다. 그는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을 고집하고 은신한 두문동 72현 중의 하나로서 순절한다. 또한 맹유의 아들 즉 맹사성 아버지인 맹희도孟希道는 정몽주와 동갑으로 동문수학하여 2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다 정몽주가 살해된 후 두문동으로 피신했다 후에 온양 행단에 옮겨와 살면서 후진들에게 강학講學을 하면서 살았다.

 

  맹사성은 고려말 1360년 신창맹씨 아버지 맹희도에게서 태어났고 그의 호는 고불古佛이다. 그의 아버지인 맹희도는 맹사성의 어머니인 풍양조씨와 결혼을 하였는데 결혼식이 끝나고는 얼마 안 있어서 과거공부를 하기 위하여 개성으로 상경을 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부인 풍양조씨는 꿈을 꾸었는데 ‘태양이 자기 앞으로 떨어지는 것을 치마폭에다 받는 꿈’ 이었다.

 

  풍양조씨는 꿈이 너무 괴이하여 시아버지 맹유에게 꿈이야기를 하자 맹유는 이를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지 말라고 이르고는 사람을 급하게 한양에 보내서 아들 맹희도에게 편지를 전한다.맹희도가 아버지 편지를 받아서 읽어보니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채비를 차려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를 찾아 문안인사 하는데 아버지는 전혀 아픈 기색도 없어 병의 차도를 물으니,

 

  “내 병은 그 동안 다 나았으니 온 김에 염려 말고 며칠 쉬었다 가거라.”

 

  그는 온 김에 아버지의 뜻대로 집안에 머물면서 부인과 관계를 하고 며칠 후 다시 개성으로 떠났는데 당시 수태하여 고려 공민왕시절인 1360년 낳은 아이가 바로 고불 맹사성이다. 그의 조부 맹유는 좋은 태몽에 좋은 산천정기를 받아 아이를 수태하라고 아들을 부른 것이다. 아버지 맹희도는 정몽주와 동갑이었는데 정몽주보다 1년 늦게 과거에 합격을 한다. 고불古佛 맹사성은 아버지 친구 양촌 권근에게서 글을 배우는데, 이는 권근이 그의 재주가 비범한 것을 알고 청하여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10세 때 어머니 풍양조씨가 돌아가시자 7일동안이나 단식을 하면서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부인은 최영장군의 손녀인데 그가 부인과 혼인하게 된 유래와 관련한 설화가 전하고 있다.  최영장군과 맹사성의 할아버지 맹유는 최영장군과 한 마을에 사는 친구였는데 하루는 최영장군이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게 된다. 최영장군의 집 마당에는 배나무 몇 그루가 있었는데 용이 배나무 위에서 용틀임을 하며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꿈이 하도 기이하여 밖으로 나와서 꿈에서 용이 있었던 배나무 위를 자세히 살펴보니 옆집에 사는 소년 친구 맹유의 손자인 맹사성이 자신의 집에 있는 배나무에 올라가서 배를 따고 있었다. 맹사성이 최영을 보자 내려와서 사과를 하고 돌아간 후 최영은 맹사성의 할아버지 맹유를 찾아가서 꿈 이야기를 하며 정식으로 청혼을 하여 혼인을 한다.

 


 ▶ 고불의 관직생활과 업적


  맹사성 그는 우왕 12년인 1386년 27세 되던 해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춘추관 검열을 거쳐서 전의승, 우헌납右獻納 등을 역임한다. 그리고 자신보다 3살이 아래인 황희(1363년생)도 1389년에 관직에 오른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여고려가 망하자 맹사성의 할아버지 맹유도 두문동에 은거하다 그곳에서 순절하고 그의 아버지 맹희도 역시 두문동에 들어갔다가 후에 온양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살았으며 맹사성은 태조 이성계 때 예조의랑직을 제수 받아서 조선관직을 받아 머무른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수원판관水原判官·내사사인內史舍人·예조정랑·시어사侍御史·간의諫議를 거쳐 정종 2년인 1,400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었다.  1406년에 이조참의·예문관제학을 거쳐 이듬해 진전사進箋使 시종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와서 한성부윤이 된다. 맹사성은 태종 때 황희는 이조판서, 맹사성은 사헌부의 우두머리 대사헌이 된다.  그는 매우 인자하고 온화하였다고 하나 태종의 사위인 조대림의 역모사건을 다루면서 그를 국문하였던 것을 보면 그가 원칙을 중시하여 공정한 일처리를 하던 그의 성격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408년에 대사헌이 되자 지평持平 박안신朴安信과 함께 태종의 허락도 없이 태종의 부마(경정공주慶貞公主의 남편)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을 국문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사형에 처할 위기를 맞기도 한다.  그러나 영상 성석린成石璘 변호로 한주韓州로 유배되어 3년동안 벼슬길에서 물러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영의정 성석린은 그의 집 가까이에 살았는데, 매양 그의 집을 오고 갈 때는 그 집 앞에서 말에서 내려서 지나갔다고 한다.

 

  고불은 태종때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직을 맡는다. 당시 태종의 부마인 조대림은 큰 공을 만들기 위해 군병들이 대궐을 범하는 듯한 모사를 꾸며 자신이 토벌한 것처럼 가장한 사건이 있었다. 사헌부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조대림을 불러 문초하고 처벌하자 태종은 이 사건을 왕실을 모독한 행동이라고 분개해서 사헌부의 모든 직원들을 벌주려 한다.

 

  고불은 사헌부 수장으로서 조대림의 치죄를 가혹하게 하지 않고, 사헌부의 모든 직원에 대한 처벌은 가당치 않다 주장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산다. 태종은 맹사성을 사사하려 하고 그의 외아들 또한 문초를 당하다가 죽음을 당한다. 이는 고불의 공평한 일처리에 기인한 것으로 종실이라고 법보다 우선일 수 없음을 밝힌 것으로 그의 강직한 그의 성격의 한 단면을 보여준 것이다.  그는 1411년에 재 등용되어 판충주부사가 된다. 그러자 예조에서 관습도감제조慣習都監提調인 그가 음률音律에 정통하므로 선왕先王의 음악을 복구하도록 서울에 머물도록 하여 음악을 가르칠 것을 건의한다.

 

  다음해에도 그가 풍해도도관찰사(?海道都觀察使에 임명되자, 영의정 하륜河崙이 음악에 밝은 그를 서울에 머물게 하여 악공樂工을 가르치게 건의하였고, 후에는 박연朴堧이 아악을 정리할 때에도 그의 역할이 매우 큰 것을 볼 때 그가 음악에 매우 조예가 깊었음을 보여준다.1416년에서 1418년에 걸쳐 이조참판에 이어 예조판서가 된다. 이듬해 생원시에 시관試官이 되어 권채權採 등 100인을 뽑고, 왕이 참석한 문과 복시에서 독권관讀卷官이 된다. 그 해 늙은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서를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대신 역마와 약을 하사한다.


  세종대왕이 즉위하는 1418년에 호조판서가 되어 고향의 이어 호조판서가 되어서도 고향의 노부를 위해 다시 사직을 원했다. 그러나 왕은 그를 충청도관찰사로 삼아 노부를 봉양하게 하였다.그러나 공조판서를 거쳐 1419년(세종 1년) 이조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한다. 1422년 이조판서,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가 되고 1425년 좌군도총제부판사左軍都摠制府判事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문신 최초로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가 된다. 1427년에는 우의정으로 정승이 되었고 1429년에 원로가 되어 궤장?杖을 하사받고 1430년에《태종실록太宗實錄》을 감수하였고, 1431년 좌의정이 되고 다시 춘추관영사春秋館領事를 겸임하였으며,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찬진撰進하였으며 1432년에 황희가 영의정, 맹사성은 좌의정이 된다.

 
  이후 세종이 병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가 없자 육조직계제로부터 재상이 정치를 주도하는 의정부서사제로 권력 구조를 전환하면서 영의정인 황희와 좌의정인 맹사성은 원로정치를 펼쳐 나간다. 황희는 맹사성보다 나이가 적었으나 영의정을 맡고 맹사성은 좌의정을 맡아 맹사성은 죽기 전까지 영의정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좌의정에 머무른다. 그리고 1435년 나이가 많다며 사직을 청해 세종이 비로소 허락해 벼슬로부터 물러났다.

 
  그러나 나라에 중요한 정사政事가 있으면 수시로 그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엄하지 않았다.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에 나가서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황희黃喜와 함께 세종조때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했고, 성품이 청백하고 검소하여 평상복차림으로 다녀 그가 정승인 것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 그의 청백한 성격과 검소한 일면을 보여주는 일화로서 그가 고향인 온양에 갈 때 그의 옷차림이 남루하여 양성과 진위현감이 고불 정승인지 몰라보았으며 병조판서가 그와 국사를 논의하러 왔다가 그의 집이 워낙 검소하여 놀랐다는 일화 등이 전한다.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다소간에 이견은 있을지 몰라도 상당수의 사람이 세종을 조선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성군으로 꼽을 것이다. 그런데 세종이 그토록 태평성대를 누리고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황희와 맹사성이라는 명재상이 보필하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세종은 맹사성이 부드럽고 섬세함이 필요한 예조, 공조 등을 맡고 아악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서 음률을 정비하고 악공을 가르치며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등 업무를 맡았으며 황희는 과단성과 정확성이 요구되는 병조, 이조 등을 맡아 변방의 안정을 위해 육진을 개척하고 사군을 설치하는데 관여하도록 하였다. 사실 세종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종합병원이라고 할 정도로 온몸이 다 아픈 상태이었다. 세종은 고질병인 소갈증(당뇨)에서 비롯된 합병증에 시달리고 안질 등 눈병을 앓기도 하였다.세종은 크고 작은 일상적인 일은 황희와 맹사성이 처리하도록 전적으로 맡기고 자신은 국가의 전체적인 국정구상을 하고 집현전 학자들과 장기 프로젝트에 전념하여 그토록 커다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 맹사성은 과거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장원급제를 하다 보니 그야말로 기고만장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파주군수를 제수 받아 부임하여 근무할 때에 나옹선사를 찾아보면서 가르침을 청하는데,

  

  “좋은 말씀 좀 부탁합니다.”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나쁜 일은 하지 마시오.”

  

  자못 기대가 커서 얼마나 훌륭한 말을 들으려나 생각했는데, 너무 평범한 말에,

 

  “누구나 다하는 것 아닌지요?”

  

   “80먹은 노파도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요?”

  

  이 말을 들은 맹사성은 고개를 숙였다. 이어서 나옹선사가 찻잔을 따르는데 차가 흘러서 넘치게 따르자,


 

  “찻잔이 넘칩니다.”

  

  “찻잔에서 차가 넘쳐 바닥에 넘쳐흐르는 것은 보이고 그대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모르십니까?”

  

  맹군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맹사성은 두 번이나 창피를 당하자 무안해 어떻게하든 빨리 나가려고 하다가 문지방에 머리를 부딪치자 나옹선사는,

  

  “숙이시요. 숙이면 부딪히지 않습니다.”

  

  이는 그때의 일을 교훈삼아서 자신을 숙이는 일을 실천하며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맹사성은 항상 모든 사람들에게 겸손하고 너그러웠다. 그는 출입을 할 때 소타기를 즐겨 하여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줄을 잘 알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고불맹사성이 고향 온양에 부모가 있어서 자주 찾아뵈었는데 매양 출입을 할 때에는 소타기를 좋아하여 사람들은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언젠가 임금 허락을 얻어서 온양을 방문한다.

  

  

 ▶ 검은 소 등에 올라 타고 피리 불며 고향 온양가는 노옹老翁

 

  

  고불은 고향을 방문하면서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면서 갔는데, 맹사성이 고향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인근 고을수령 양성과 진위현감이 장호원에서 맹사성을 맞으려고 길을 잘 정비하고 청소를 해 두었는데 오는 기색은 없고 초라한 행색의 노인이 검은 소를 타고 지나가자 아전이,

  “여기는 고불 좌상 맹사성 대감께서 지나가실 자리인데 너같이 초라한 사람이 먼저 지나 갈수 없다.”


  “내가 온양에 사는 고불이라고 일러라!”

  이를 본 수령들이 늙은이가 지나가게 한 것을 야단치려로 불렀더니 방금 지나간 사람이 바로 고불 맹사성 대감이라고 하자 놀라 달아나다 못에 관인을 빠뜨렸다고 전하며 이후 사람들이 이 못을 ‘도장을 빠뜨린 못’이라는 의미로 ‘인침연印沈淵’이라 불렀다.

 

▶  맹사성의 후손으로서 맹현에서 살았던 맹만택은 현종의 딸인 명선공주와 약혼했으나 며칠만에 죽었는데 신안위로 봉해졌다.

  이를 사헌부에서 상소하여 부마직책이 환수되어 혼인을 하였으며 나중에 충청도감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맹사성이 살았던 집위로는 맹현孟峴이라는 고개가 있는데 바로 이곳이 맹사성과 후손 맹만택이 살았으며 맹사성이 워낙 유명하다보니 그를 기려서 붙여진 이름이다.고불이 생전에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 수차례 관직을 내놓기를 요청하였지만 세종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고불이 후에 76세 때 관직에서 물러나자 온양의 자택에 낙향하여 머물다가 79세가 되어 생을 마감하였다.

 

▶  그가 물러나자 세종은 당시 광주이던 지금의 성남시 영장산 일대에 사패지를 내려서 그의 공로에 대하여 치하하였다. 그는 은퇴하여 온양 자택에 칩거하여 살다가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여 사패지인 경기도 광주시 영장산자락인 직동 산27에 자리를 잡고서 조용히 누워 있다.그리고 그가 생전에 타고 다니던 검은 소가 그의 오른편 언덕에 같이 누워 고불을 지키고 있는데 검은 소와 만난 이야기가 흥미롭다.

  

▶  맹사성이 설화산을 오르는데 동네 아이들이 검은 소에게 돌팔매질을 당하여 괴로워 하고 있었다. 맹사성은 아이들을 내쫓고 집으로 돌아오니 검은 소는 꼬리를 흔들면서 맹사성을 따라서 집까지 따라 온다. 고불은 소에게 먹을 것을 실컷 주어 기르게 하였는데 맹사성은 언제나 하인 하나만을 대동하고 이 소를 타고 다니면서 피리를 불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맹사성이 죽자 3일간 아무것도 먹지 않다가 3일후 맹사성을 따라 갔다고 한다.

 

  고불을 광주군 맹산에 장사지내는데 이 묘를 흑기총黑騎塚이라고 하는데 고불의 후손들은 맹사성 제사를 지낼 때마다 잔을 붓는다고 하는데 비록 동물이지만 각박하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훈훈한 정을 실감하게 한다.

  

▶  맹사성의 강직하고 청렴하고 소탈한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

 

  맹사성은 조선시대 고관들이 타고 다녔던 12명이 메는 가마나 말을 타지 않고, 소를 타고 다니던 정승으로 잘 알려져 있듯이 매우 청빈하여 셋집살이를 할 정도였다. 우의정이 되어서 겨우 작은 집을 장만했는데 비가 새는 낡은 집이었다 한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에 의하면,

  
  언젠가 병조판서 황상黃象이 김종서가 개척한 함경도지방의 육진설치를 논하기 위하여 맹정승의 집을 찾는다. 두 사람이 한참 국사를 논의하는 있는데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그런데 고불의 집은 워낙 허술하여서 비가 새어 순식간에 가재도구가 물에 젖어서 두 사람은 삿갓을 쓰고서 대화를 해야 했다. 병조판서 황상의 관복이 젖으니 고불은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여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황상은 마음에 켕기는 것이 있어 더욱 미안해 하였는데, 집으로 돌아온 황상은,

  
  “4조의 판서를 역임한 정승 집이 그러한데 거루고각인 내 집이 부끄럽다” 말하고 행랑채를 헐어 버리게 하고 다시는 집을 더 늘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맹사성이 세종대에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처럼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공정한 일처리로 임하고 어떠한 정치세력과 결탁하지 않고 자기가 맡은 일에만 묵묵하게 소임을 다 하던 자기절제와, 청빈한 자세, 아무리 낮은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을 낮추고 남을 존경하는 겸손한 자세 등 결벽하다고 할 정도의 도덕성을 갖추고 있었기에 가능하였다고 할 것이다.


▶  그가 우의정을 지내고 있을 때 《태종실록 太宗實錄》에 대한 편찬을 맡은 감관사監館事로서 감수를 하였다. 고불이 《태종실록》에 대한 편찬을 완료하자 아들 세종은 아버지인 선왕 태종에 대한 사관의 평가가 매우 궁금하였다. 세종이 고불에게 실록을 보여줄 것을 청하자 그는,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칠 경우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史官이 두려워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고불이 이를 반대하고 나서니 세종도 어쩔 수 없이 이를 따랐다. 맹 정승의 일화는 이외에도 수도 없이 많으나 그 중에서도 청렴결백의 유명한 일화는 맹 정승이 병이 나서 자리보전을 하고 있었다.

 

 ▶ 맹사성의 부인이 녹으로 받은 정부미가 너무 오래되 냄새가 나자 이웃에게 햅쌀을 꾸어다가 밥을 지어다가 봉양을 하였더니 맹정승이,

  “관리는 나라의 녹봉인 정부미를 먹는 것이 마땅한 일이거늘 어찌하여 햅쌀을 꾸어 오셨소” 하면서 부인에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는 성품이 곧고 청렴하여 늘 남루하게 입고 다니었기 때문에 그가 정승인지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공당문답’은 그 중 대표적이다. 공당문답은 물을 때 말끝에 공을 붙이고 대답을 할 때 끝에 당을 붙이는 것이다.

 

▶  맹사성이 한식이 되어 고향 아산에 성묘를 하고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그날역시 소를 타고 용인 땅을 지나는데 갑자기 봄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처음에는 빗발이 약하게 내렸으나 점점 굵어져서 소나기로 되었다.

  어찌할 수 없어 주막으로 들어가서 비가 긋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소를 매어 놓고 안으로 들어가니 젊은 선비 하나가 이미 아랫목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원래 소탈하여 일상복으로 다니고는 하였는데 이날 비에 흠뻑 젖어 문가에 앉아 날이 개기를 기다린다.

 

  젊은이는 하인들과 아랫목을 차지하고 있다가 무료하였던지 고불에게. 아랫목으로 내려오라고 하고는 거만한 투로 말을 걸어 왔는데 젊은 선비는 맹사성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깔보고 고불에게 말을 걸어 온다.

  “보아하니 글은 좀 읽은 것 같은데, 우리 심심한 차에 글짓기 놀이나 하시죠”

  
  “그럽시다 그려.”


  “어디를 가는공?”


  “과거 보러 한양에 간당.”


  “벼슬할 자신은 있는공?”


  “문제없당.”

  
  “그럼 내가 벼슬을 시켜줄공?”

  
  그러자 선비는 노인이 허름한 옷차림이니 속으로 비웃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헤어져서 한양으로 올라간다. 얼마 후 맹사성이 한양에 돌아와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선비가 녹사에 합격하여 인사하기 위하여 안으로 들어 온다. 맹정승은 젊은이를 보자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을 하여,


  “과거는 잘 치렀는공?”


  선비가 고개를 들어 보니 지난번에 주막에서 만났던 노인이 아닌가!


  “내가 누군지 알겠는공?”
 

  젊은이는 얼떨결에 한다는 말이,
 

  “죽을 죄를 지었당 죽고만 싶당~”

 

▶  이처럼 맹정승은 소탈하고 격식을 차리지 않고 서민들과 잘 어울렸다고 하며 이외에도 재미난 일화가 많은데 그가 고향을 찾아서 낚시를 즐기고는 하였는데 언젠가는 온양에 머리를 식힐 겸 내려가서 집근처에 있는 세교리의 저수지에서 낚시를 하다가 그 마을에 사는 전 첨지라는 노인을 만난다.

  두 사람은 서로 인사를 하는데 고불은 자신을 소개를 하게 된다.


  “나는 근처에 사는 전첨지요.”
 

  “나는 중리에 사는 맹 첨지요”


  두 사람은 한참 앉아 낚시를 하다가 식사를 할 때가 되어서 고불이 싸가지고 온 보리개떡을 사이좋게 나누어 먹는다. 그리고 날이 저물어 헤어지면서 고불은 어느 달 어느 날이 내 생일이니 별로 차릴 것은 없으나 시간이 나면 놀러 오라고 청한다.


  얼마 후 전 첨지는 맹첨지가 말한 생일이니 맹첨지를 찾으면서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가 아무리 생각을 하여도 적당한 선물이 생각나지 않았다. 더구나 농사나 짓는 농부이다보니 가진 것은 없고 할 수 없이 맹첨지가 싸가지고 왔던 보리개떡이 생각이 나서 이를 쪄서 중리에 와서 맹첨지를 찾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맹첨지라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아닌가! 대신 맹정승의 집은 있는데 초라한 초가가 아니라 번듯하고 큼직한 기와집이 있는데 많은 수레와 가마, 여러 마리의 말이 늘어서 있는게 아닌가!.

 
  그냥 돌아갈 수는 없어 맹첨지를 부르니 고불이 버선발로 달려나와 반갑게 맞아서 안내한다. 그리고 관복을 입은 사람들에게 낚시친구 전 첨지를 소개하였다. 그제서야 사태를 짐작한 전첨지는 낚시터에서 만난 맹 첨지가 바로 유명한 맹 정승이라는 사실을 알고 무례하였다고 백배사죄를 한다. 그러자 고불이 말했다.

 

  “이보시오, 전 첨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법이 아니오. 비록 내가 벼슬이 정승이라 하나 만백성이 내 벗이 아니고 무엇이요? 그러니 앞으로도 자주 만나서 낚시나 즐기십시다.”

 

  그리고 후에 관직에서 벗어나서 낚시를 하고 있던 중인데 역졸이 지나다가 고불에 개울을 건너 줄 것을 요구한다. 역졸은 당연히 옷차림을 보고 당연히 마을 촌로로 생각한 것인데 고불은 두말 없이 역졸을 업어 건네준다.

 

  그러자 근처에서 일하던 농부가 이를 보고 놀래 다가와 역졸에게 사실을 알려준다. 이에 역졸은 죽을 죄를 지었다며 벌해 달라고 청한다. 그러자 고불은 앙천대소하면서 하는 말이,

 

  “예끼 이 사람아. 내가 예전에 정승을 지낸 것은 사실이나 지금은 벼슬에서 물러났으니 한갓 백성일 뿐일세. 자네는 공무를 수행하던 중이니 물목을 잘 아는 내가 길을 가르쳐 주었다하여 허물이 될게 뭐 있겠나? 어서 가던 길이나 가게!

  

  

▶  맹사성의 묘소를 찾아서

 

  - 맹사성, 생전에 타던 검은 소와 함께 묻히다.

  

  성남시 분당에 있는 영장산靈長山 자락에  고불이 잠들어 있다 이산은 영묘한 힘을 가진 산이라는 의미로 성남시 율동, 야탑동과 광주시 직동에 걸쳐 뻗어 있는 산 이다. 이 산은 지금도 지역에 사는 주민들 사이에서는 영장산이라는 이름보다는 맹산이 익숙한 이름이다.

 

  맹산孟山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는 세종이 좌의정을 지냈던 고불 맹사성선생이 은퇴할 때 사패지로 하사하였고 이후 사람들이 그의 성을 따라서 맹산이라고 하였다. 그가 죽자 후손들이 그를 이곳 영장산 자락에 안장하여 조용히 잠들고 있다.

 

  참고로 고불 산소를 찾으시는 분들을 위하여 그의 묘를 찾는 길을 간단히 소개를 하면 그의 묘는 광주시 직동 27에 있는 데 자가용을 이용하시는 분들은 성남시에서 직동가는 버스를 타거나 성남시에서 가시는 분들은 32번이나 32-1번을 이용하여 갈 수 있다.

 

  영장산을 등산하시는 분들이 이곳을 찾기 위해서는 영장산에서 이배재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다가 직동으로 가는 길로 조금 내려 가면 나무를 실어나르는 임도를 만난다.

 

  임도를 계속 따라 가다보면 마을길이 나오고 오른 쪽으로 맹사성 산소를 표시하는 이정표가 나와서 100m정도 다시 이정표가 나오고 여기서 200m정도 오르면 오른쪽으로 고불의 산소가 나온다. 그리고 고불산소의 왼쪽에는 고불이 평소에 타고 다니던 검은 소가 잠들고 있는 흑기총이 나온다.

  
 ▶ 그는 음률에 능해서 세종 때 박연과 함께 고려 시대의 음악을 도맡아 정리하고 71세에 아악보를 완성시키고 악기도 스스로 만들어 즐겼다고 하며 검은소를 타고서 옥피리 불기를 즐겨 하였다.세종 17년인 1435년 벼슬길에서 물러난 맹사성은 조용히 만년의 풍류를 즐기다가 3년 뒤인 세종 20년 향년 79세를 일기로 눈을 감는다. 그가 은퇴하여 춘·하·추·동 사철의 변화에 따라서 4수로 읊은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는《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려 전하는데 이를 감상하는 것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강호江湖에 봄이 드니 미친 흥興이 절로 난다.

  

  탁료 계변에 금린어錦鱗魚 안쥐로다.

  

  이 몸이 한가閒暇해옴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봄》 강호에 봄이 찾아드니 참을 수 없는 흥겨움이 솟구친다.

  

  탁주를 마시며 노는 시냇가에 싱싱한 물고기가 안주로 제격이구나.

  

  다 늙은 이 몸이 이렇듯 한가롭게 지냄도 역시 임금의 은혜이시도다.

  

  강호江湖에 녀름이 드니 초당草堂에 일이 업다.

  

  유신有信한 강파江波난 보내나니 바람이로다.

  

  이 몸이 서날해옴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여름》 강호에 여름이 닥치니 초당에 있는 늙은 몸은 할 일이 별로 없다.

  

  신의 있는 강 물결은 보내는 것이 시원한 강바람이다.

  

  이 몸이 이렇듯 서늘하게 보내는 것도 역시 임금의 은혜이시다.

  

  강호江湖에 가알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 잇다.

  

  소정小艇에 그믈 시러 흘니 띄여 더져 두고.

  

  이 몸이 소일消日해옴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가을》 강호에 가을이 찾아드니 물고기마다 살이 올랐다.

  

  작은 배에 그물을 싣고서. 물결 따라 흘러가게 배를 띄워 버려 두니.

  

 다늙은 이 몸이 이렇듯 고기잡이로 세월을 보내는 것도 역시 임금의 은혜이셨다.

  

  강호江湖에 겨월이 드니 눈 기픗 자히 남다.

  

  삿갓 빗기 쓰고 누역으로 오슬 삼아.

  

  이 몸이 칩지 아니해옴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겨울》강호에 겨울이 닥치니 쌓인 눈의 깊이가 한 자가 넘는다.

  

  삿갓을 비스듬히 쓰고 도롱이를 둘러 입어 덧옷을 삼으니.

 

  늙은 이 몸이 이렇듯 추위를 모르고 지내는 것도 역시 임금의 은혜이시도다

 


 ▶ 맹사성행적은 《세종실록》 1438년 10월 4일자에 잘 기록되어 있다.

  

  좌의정 그대로 치사(致仕)한 맹사성(孟思誠)이 죽었다. 사성의 자(字)는 자명(自明)이며 신창(新昌) 사람이었다. 병인년에 을과(乙科) 첫째로 발탁되어 춘추관 검열(春秋館檢閱)에 보직되고, 여러 번 승진하여 전의 승(典儀丞)·기거 사인(起居舍人)·우헌납(右獻納)이 된다. 나아가서는 수원 판관(水原判官)이 되고 옮겨서는 면천 군수(沔川郡守)가 되었다가 부름을 받아 내사 사인(內史舍人)이 되었고, 예조 의랑(禮曹議郞)·사헌 시사 중승(司憲侍史中丞)·간의 우산기 상시(諫議右散騎常侍)가 되었다.

 
  나가서 공주 목사(公州牧使)가 되고, 불려서 사간(司諫)을 제수하였다가 대언(代言)에 발탁되고, 여러 번 승진하여 이조 참의(吏曹參議), 예문 제학(藝文提學), 한성부 윤(漢城府尹),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인녕부 윤(仁寧府尹), 예·호·공·이(禮戶工吏) 4조 판서,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가 되었다 정미년에 의정(議政)에 임명하였는데, 을묘년에 면직되기를 청하므로 이에 그대로 치사하게 하였다.

 

  그러나 나라에 큰 정사가 있을 때는 반드시 나아가서 문의(問議)하였다. 이에 죽으니 나이는 79세이었다. 부음(訃音)이 상문(上聞)되니 임금이 슬퍼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거애(擧哀)하고, 조회를 정지시키고 관(官)에서 장사를 보아주게 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니, 충신(忠信)하고 예로써 〈사람을〉 대접(待接)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청백(淸白)하게 절조를 지킴을 정(貞)이라 한다. 사성의 사람됨이 종용하고 간편하며, 선비를 예절로 예우하는 것은 천성에서 우러나왔다. 벼슬하는 선비로서 비록 계제가 얕은 자라도 뵈이고저 하면,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고 대문 밖에 나와 맞아들여 상좌에 앉히고, 물러갈 때에도 역시 몸을 꾸부리고 손을 모으고서 가는 것을 보되, 손님이 말에 올라앉은 후에라야 돌아서 문으로 들어갔다.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成石璘)이 맹사성에게 선배가 되는데, 그 집이 맹사성의 집 아래에 있으므로 매양 가고 올 때마다 반드시 말에서 내려 지나가기를 석린(石璘)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하였다. 또 음률(音律)에 능하여 혹은 손수 악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부드러워서 무릇 조정의 큰 일이나 거관 처사(居官處事)에 과감하게 결단하는 데 단점이 있었다. 외아들 귀미(歸美)는 먼저 죽고, 손자가 둘이 있으니 효증(孝曾)과 계증(季曾)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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