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 1741~1793)
미술학과 2002561027 정은혜
1. 이덕무의 생애 2. 거침없는 행동가의 급진적 개혁론 3. 소심한 모범생의 섬세한 아포리즘 4.
실험의 시대, 만개한 두 개성 5. 기타
1. 이덕무의 생애
영조 17년~정조
17년(1741~1793). 향년 53세.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 전주(全州). 자 무관(懋官). 호 형암(炯庵), 아정(雅亭),
청장관(靑莊館), 영처, 동방일사(東方一士). 정종(定宗) 별자(別子) 무림군(茂林君)의 후손. 통덕랑(通德郞) 성호(聖浩)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얼(庶孼) 출신으로 빈한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박람강기(博覽强記)하고 시문에 능하여 젊어서부터 이름을 떨쳤다.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성대중(成大中) 등과 사귀고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시집을
냈으며 이것이 청나라에까지 전해져서 이른바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정조 2년(1778) 중국 여행 기회를 얻어
청나라의 문사들과 교류하고 돌아왔으며, 1779년에 정조(正祖)가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여기에 서얼 출신의 우수한 학자들을
검서관(檢書官)으로 등용할 때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徐理修) 등과 함께 수위(首位)로 뽑혔다.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규장각에서
《국조보감(國朝寶鑑)》 《대전통편(大典通編)》 《무예도보(武藝圖譜)》 《규장전운(奎章全韻)》 《송사전(宋史筌)》 등 여러 서적의 편찬 교감에
참여하였으며, 많은 시편(詩篇)도 남겼다. 서울 지도인 <성시전도(城市全圖)>를 보고 읊은 백운시(百韻詩)가 정조로부터
`아(雅)`라는 평가를 받아 호를 아정(雅亭)이라 새로이 칭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1781년 내각검서관이 되고 이어 사도시주부,
사근도찰방, 광흥창주부, 적성현감 등을 거쳐 1791년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가 되었다가 《홍문관지(弘文館志)》를 교감한 공로로
적성현감(積城縣監)에 제수되었다. 1793년 병들어 돌아가자, 3년 뒤 그의 재주를 아끼던 정조가 내탕전(內帑錢) 오백 냥을 하사하여 문집
《아정유고(雅亭遺稿)》 8권 4책을 간행하게 하였다. 문자학(文字學)인 소학(小學), 박물학(博物學)인 명물(名物)에 정통하고, 전장(典章),
풍토(風土), 금석(金石), 서화(書畵)에 두루 통달하여, 박학(博學)적 학풍으로 유명하였다. 따라서 북학을 고창하지는 않았으나 명(明)과
청(淸)나라의 학문을 깊이 이해하고 고염무(顧炎武) 이래 청조 고증학의 성과를 수용하여 실질적으로는 북학을 함으로써 후배들의 청조 고증학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서로는 이만운(李萬運)의 책을 보완한 역사서 《기년아람(紀年兒覽)》, 사(士)의 윤리와 행실을 밝힌
《사소절(士小節)》, 고금의 시화(詩話)를 수록한 《청비록(淸脾錄)》, 명나라 유민(遺民)의 인물지인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 등 십여 종이
있고, 이들은 《아정유고》 등 문집과 함께 아들 광규(光葵)에 의해 망라되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71권 33책으로 편찬되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자는 무관(懋官), 호는 형암(炯庵), 아정(雅亭), 청장관(靑莊館), 영처, 동방일사(東方一士). 본관은
전주(全州). 경사(經史)에서 기문이서(奇文異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여 박학다재하고 문장이 뛰어났으나 서자였기 때문에 관직에 높이 오르지
못하였다. 일찍이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와 함께 사가시집(四家詩集)인 《건연집》을 내어 문명을 떨쳤다.
1778년(정조 2)에는 사은 겸 진주사 심염조(沈念祖)의 서장관으로 베이징[北京]에 들어가 청(淸)나라 학자들과 교유하고 고증학에 관한 책과
그곳의 산천, 도리(道里), 궁실, 초목, 누대, 충어(蟲魚), 조수(鳥獸) 등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가져오는 한편, 서학(西學)을 연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북학(北學)을 제창하였다. 79년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徐理修)와 함께 초대 규장각 외각검서관이 되었다. 《도서집성》
《국조보감》 《대전회통》 《규장전운》 등 많은 서적의 정리와 교감에 종사하였다. 81년 내각검서관이 되고 이어 사도시주부, 사근도찰방,
광흥창주부, 적성현감 등을 거쳐 91년에는 사옹원주부가 되었다. 그는 북학파 실학자 중 이용후생파의 주장과 같이 사회적, 경제적 개혁을
주장하기보다는, 근대사회를 향한 사회의 과도기적 관념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고증학적인 방법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그의 사상은
정약용(丁若鏞), 김정희(金正喜), 김정호(金正浩)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림을 잘 그렸고 글씨에도 능하였다. 저서에 《앙엽기》 《관독일기》
《이목구심서》 《편찬잡고》 《청비록》 《기년아람》 《한죽당수필》 《천애지기서》《열상방언》 《예기고》 《영처시고》 《영처문고》 《뇌뢰낙락서》 등이
있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조선 정조 때에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백동수(白東修) 등이 왕명에 따라 편찬한 종합무예서. 1790년(정조 14)에
완간되었다. <무예통지> <무예도보><무예보>라고도 한다. 전 4권 4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목판본이다.
임진왜란 뒤 군사의 무예훈련을 위한 필요성에 따라 1598년(선조 31)에 한교(韓嶠)의 <무예제보(武藝諸譜)>,
1759년(영조 35)에 <무예신보(武藝新譜)>가 간행되었는데, 이 책은 <무예제보>와 <무예신보>를 집대성하고
보완한 것이다. 체재는 첫머리에 정조의 서를 비롯하여 범례, 병기총서(兵技總敍), 척모사실(戚茅事實), 기예질의(技藝質疑),
인용서목(引用書目) 등이 있으며, 본문에는 24종의 병기를 수록하였고 책 끝에는 관복도설(冠服圖說)과 고이표(考異表)가 부록으로 포함되어 있다.
정조는 서문에 이 책을 간행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 간략하게 밝혀놓았는데, 우리나라에는 창이나 검의 병기는 없이 궁술만 있었는데 임진왜란
뒤 선조대에 곤봉, 장창 등 여섯가지 기예를 다룬 <무예제보>가 편찬되었으며, 영조 대에는 여기에 죽장창(竹長槍), 예도(銳刀) 등
12기를 더하여 <무예신보>를 간행하였고, 다시 마상(馬上), 격구(擊球) 등 6기를 더하여 도합 24기로 도보를 만든 것이라
하였다. 이 책은 당시 무예서들이 전략과 전술 등 이론을 위주로 한 것들인 데 비하여 24기의 전투기술을 중심으로 한 실전훈련서로서,
당시의 무예와 병기에 관하여 종합적인 조감을 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본문 외에 당시의 역사적?사회적 문제를 종합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각종 자료가 모아져 있어 그 진가를 더하고 있다. 前代의 글 거부… "급진적으로" "조용히" [한국 고전문학사
라이벌] <14> 박제가 vs 이덕무 급진적 개혁론과 섬세한 아포리즘 사이
사귄 지 30년인데 행장(行藏)의
본말이 서로 비슷하며 담예(談藝)하는 일에 있어서는 서로 마음이 합하여 금슬처럼 어울렸다. 아홉 살 아래인 박제가(朴齊家)의 술회처럼
이덕무(李德懋)와 박제가는 평생 뜻을 같이한 지기다. 박제가가 열 일곱 살이던 해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서얼로 불우하게 살았고, 이후
서얼 문사들과 연대해 복고적인 문학에 반기를 드는 등 참으로 비슷한 길을 걸었다. 박지원 같은 혁신적 문사들과 교유하며 북학(北學)의 학풍을
흡수했고, 규장각의 초대 검서관(檢書官)에 기용되어 정조의 지우를 입으며 문재(文才)를 발현했던 것도 똑같다. 두 사람은 사우(師友)이자
친우(親友)로 서로를 존중했다. 그러나 박제가는 폐단을 혁파하기 위해 선봉에 섰던 급진적인 개혁주의자였고, 이덕무는 섬세한 아포리즘을
통해 속습을 깨우치고자 한 모범적인 선비였다. 18세기 사상계와 문단에서 명예를 떨쳤던 두 사람은 성격과 행동도 달랐고 변혁을 꾀하는 방식도
달랐다.
2. 거침없는 행동가의 급진적 개혁론
박제가 - 이덕무와 서얼출신 '평생친우', "고정관념은 죽은
우상" 변혁 1750년 박평(朴坪)의 서자로 서울서 태어났다. 30세에 규장각의 초대 검서관에 발탁됐으나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돼
유배갔다가 1805년 풀려나 죽음을 맞았다. 북학파의 한 사람으로 청나라 문물의 선진적 경향을 받아들여 이용후생(利用厚生)의 급진적 개혁안을
주창했다. 폐습을 깨고 청과 같은 문명사회로의 변혁을 꿈꾸며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했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했고 문집으로
'정유집(貞?集)'이 있다.
박제가는 우부승지 박평의 서자다. 키가 작고 이마는 튀어나왔으며 눈에는 푸른빛이 감돌았다. 천년 뒤에도 천만
명의 사람과 다른 그로 남고 싶다는 그의 말에서는 방달(放達)한 기운까지 느껴진다. 서얼을 무시하는 사회에서 일찌감치 과거를 포기했으나 현실에
굴종하지 않았다. 그는 경세의 의지를 세상에 거침없이 드러낸 행동가였다. 처음 연경에 다녀온 후 박제가는 북학의(北學議)를 지어 청나라와
통상하는 것만이 가난한 조선을 살리는 길이라고 외쳤다. 중국문화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중국어(漢語)로 말하자는 극단적인 주장을 서슴지 않았고,
당괴(唐魁), 당벽(唐癖)으로 배척당해도 청나라에 대한 외경을 숨기지 않았다. 북학파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모습이었다.
실생활에서도 그는
과격하고 거침이 없었다. 품계에 따라 앉는 관습을 무시한 채 노론 벽파의 거두 심환지에게 대드는가 하면, 문체를 비판해 반성문을 올리라고 했더니
오히려 문체의 고유한 맛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비판하는 글을 낼 정도였다. 그의 과격한 행동과 급진적 주장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다행히 정조의
보호로 무사했으나, 정조가 죽자 신유사옥(1801년)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를 떠나고 말았다.
행동처럼 글도 직설적이고
극단적이었다. 모호하게 절충하는 법이 없으며 좋고 나쁜 구분도 선명했다. 제도 개선을 이야기할 때든, 문학론을 이야기할 때든, 사람을 묘사할
때든 자기 주장이 분명하고 의지가 확고했다. 그리고 복잡하게 말하지 않았다. 박제가는 모든 규범, 관습, 선입견을 타파하기 위해 직언을 날렸고,
고루한 습속과 편견에 갇힌 의식을 가장 미워했다. 그에게 천지자연을 비롯한 모든 세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세계는 늘 살아 움직이고
변한다. 고정관념은 흙으로 빚어진 죽은 우상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그에게는 사회와 문화도 변해야 하는 것이었다. 박제가에게 있어
변화는 진보와 발전을 향한 변화이며 이상적 세계로의 도약이다. 그는 물질적으로도 풍요롭고 정신적, 문화적으로도 윤택한 삶을 누리기를 원했다.
그래서 예술과 기예와 문학의 가치를 유독 강조했다. 문명의 나라는 물질의 풍요와 문화적 가치가 서로 뒷받치며 존재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틀에 박히거나 진부한 글쓰기를 거부하고, 참신하고 기교 있는 글쓰기를 주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세계가 변하고 성음(聲音)도
변하기 때문에 시대에 맞는 글을 써야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시를 답습하거나 의고(擬古)를 훌륭하다고 보는 인습을 통렬히 비판했다.
그는 개성이 살아있는 글을 쓰려고 노력했고 그것을 문사의 의무로 여겼다. 그의 개혁사상 안에서 사회, 문학, 예술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 참신하게 변할 대상이었다. 경세가, 문장가, 예술가 박제가의 일생을 관통하는 것은 변혁에의 열망이었다.
3.
소심한 모범생의 섬세한 아포리즘
이덕무 - 자잘한 것 소재로 짧은 글쓰기, 말없이 典節 꺼려 모범적 선비 1741년
서울에서 태어나 1793년에 별세했다. 종실의 후손이지만 서얼 출신으로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39세에 규장각 초대 검서관에 기용돼 책 읽는
일에 몰두해 스스로 간서치(看書痴)라 했다. 소품체의 다채로운 아포리즘이 문집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국조보감(國朝寶鑑)'
'갱장록(羹墻錄)' '대전통편(大典通編)'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규장전운(奎章全韻)' 등의 관찬서를 편찬했고, 문집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가 전한다. 이덕무는 정종의 별자(別子) 무림군의 후손이다. 호리호리한 큰 키에 단아한 모습, 청수(淸秀)한
외모처럼 행동거지에 일정한 법도가 있고 문장과 도학에 잠심(潛心)하여 이욕이나 잡기로 정신을 흩뜨리지 않았다. 사람 축에 끼지 못하는 서얼로
오직 책 읽는 일만 천명으로 여겼다. 하지만 굶주림 속에서도 그는 수만 권의 책을 읽고, 수백 권의 책을 베꼈다. 글자나 사실(史實)에
대한 고증부터 역사와 지리, 초목과 충어(蟲魚)의 생태에 이르기까지 지적 편력은 실로 방대하고 다양하다. 책으로 천리를 통했고, 고증과 박학의
대가로 인정 받았다. 그는 박제가와 달리 현실개혁을 주장하지 않았다. 경세제민 같은 대의도 말하지 않았다. 남에게 드러내기 꺼려하며
자신을 단속할 뿐이었다. 그래서 도의에 어긋나는 자잘한 세태를 경계하며, 사소한 예절과 품행을 중시했다. 그래서 이덕무는 소설을 읽는 박제가를
나무라며 함께 논어를 읽자고 권유했다. 반성문을 순정하게 쓰라는 당부도 아끼지 않았다.
이덕무는 고지식하고 소심한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선비의 초상 그 자체였다. 단아한 성품과 뛰어난 학식 덕택에 그는 죽어서도 행복한 사람으로 남았다. 정조는 그의 식견과 재주를 아껴
내탕금(內帑金임금의 개인 돈)을 내려 문집을 간행해주었고, 기라성 같은 선배 문인들이 그를 기리는 글을 써주었다. 그는 박제가처럼
현실개혁을 외치는 글을 써본 적도, 극단적인 발언을 해본 적도 없다. 다만 새로운 글쓰기를 통해 당대의 글쓰기와 가치 체계에 조용한 의문을
던졌다. 그의 문집에는 시, 기(記), 서(序), 서간과 같은 전통 한문학을 제외하면 아포리즘 형식의 짧은 글쓰기가 절반 이상이다. 명, 청대의
소품체를 전폭 활용했다.
그의 글에는 독서일기, 고증, 잠언, 생활 묘사, 자연의 풍광, 동식물의 생태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있다.
관행에 비추어볼 때 이런 글은 문사의 글쓰기로 취급 받기 어려운 것들이다. 이런 자잘한 글은 경술(經術경서를 연구하는 학문)이나 이념을 담는
문장, 전범이나 고전의 격식을 갖춘 문장과는 완전히 다른 자리에 놓인다. 자잘한 메모와도 같고, 힘들이지 않은 에세이와도 같은 글들은
한담거리로나 취급될 것들이다. 그럼에도 이덕무는 이런 글에 주력했다. 이유가 있다. 박제가처럼 이덕무 또한 전대의 글을 답습하거나
진부하게 표현하는 경향을 거부한 것이다.
또 이미 알려진 세계를 반복해서 재현하는 것도 피했다. 좋은 글이란 세계와 직접 대면해서 개성이
살아있는 자기만의 표현을 찾을 때 이루어진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형이상학의 관념세계보다 천지자연의 미묘한 움직임, 은미한 자연세계, 자잘한
생활세계가 더 중요했다. 그리고 그런 세계를 관찰할 수 있는 현미경적인 시야가 더 필요했다. 이런 의미에서 이덕무가 명청(明淸)대의
소품체를 만나 재창조한 글쓰기는 의의가 자못 크다. 바로 고문의 격식과 문체, 성명(性命)과 치도(治道)를 문장의 도로 삼아야 한다는 글쓰기의
절대원칙에 의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4. 실험의 시대, 만개한 두 개성
이덕무와 박제가는 신사조를 받아들여
변화를 꾀하되 다른 방식으로 변용하면서, 문학사와 사상사에서 각자의 자리를 마련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대의 외부를 탐색했다는 점에서 둘 다
독보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둘이 똑같은 방식으로 고정관념에 도전했다면 진정한 라이벌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조용히 전범을 깬 이덕무,
전위임을 외치며 습벽에 응전한 박제가. 그 둘의 조우가 서로의 개성을 마모시키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튀어오르게 한 점이 그들을 문제적 인물로
빚어낸 동인인 것이다.
글쓰기 방식이 다채롭게 실험되던 정조 시대, 다양한 사고들이 들끓으며 공존하고 파열했던 18세기. 여러
혁신의 사고가 부딪쳐 만들어 내는 변혁에의 열망들. 이덕무와 박제가의 글이 지금 읽어도 생동감 있는 것은 그들이 그런 시대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유별난 개척의 정신과 뛰어난 문재(文才)로 참신한 문장 속에 녹여낸 결과이다.
조선 정조 때에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백동수(白東修) 등이 왕명에 따라 편찬한 종합무예서. 1790년(정조 14)에 완간되었다.
<무예통지><무예도보><무예보>라고도 한다. 전 4권 4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목판본이다. 임진왜란 뒤
군사의 무예훈련을 위한 필요성에 따라 1598년(선조 31)에 한교(韓嶠)의 <무예제보(武藝諸譜)>, 1759년(영조 35)에
<무예신보(武藝新譜)>가 간행되었는데, 이 책은 <무예제보>와 <무예신보>를 집대성하고 보완한 것이다.
체재는 첫머리에 정조의 서를 비롯하여 범례, 병기총서(兵技總敍), 척모사실(戚茅事實), 기예질의(技藝質疑), 인용서목(引用書目) 등이
있으며, 본문에는 24종의 병기를 수록하였고 책 끝에는 관복도설(冠服圖說)과 고이표(考異表)가 부록으로 포함되어 있다. 정조는 서문에 이
책을 간행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 간략하게 밝혀놓았는데, 우리나라에는 창이나 검의 병기는 없이 궁술만 있었는데 임진왜란 뒤 선조대에 곤봉,장창 등
여섯가지 기예를 다룬 <무예제보>가 편찬되었으며, 영조 대에는 여기에 죽장창(竹長槍)?예도(銳刀) 등 12기를 더하여
<무예신보>를 간행하였고, 다시 마상(馬上) 격구(擊球) 등 6기를 더하여 도합 24기로 도보를 만든 것이라 하였다. 이 책은
당시 무예서들이 전략과 전술 등 이론을 위주로 한 것들인 데 비하여 24기의 전투기술을 중심으로 한 실전훈련서로서, 당시의 무예와 병기에 관하여
종합적인 조감을 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본문 외에 당시의 역사적?사회적 문제를 종합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각종 자료가
모아져 있어 그 진가를 더하고 있다.
5. 기타 [오늘의 역사 1월 25일] 실학자 이덕무 세상 떠남 ☆
실학자 이덕무 세상 떠남 : 조선 시대의 실학자인 형암 이덕무 선생이 1793년 오늘 세상을 떠났다. 경전과 각종 서적에 통달하고 문장에 뛰어나
크게 이름을 떨쳤으나, 서자의 몸이어서 크게 출세할 수 없었다. 정조 2년인 1778년 중국 북경에 가서 그 곳 학자들과 사귀며 학문을 닦았다.
저서로는 '청장관 전서' 등이 있다.
갓에 대하여 갓은 농부가 비를 피하는 도구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대소
귀천을 막론하고 관혼상제(冠婚喪祭) 때면 다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비 오지 않을 때도 쓰니, 이는 매우 무의미한 일이다. 어떤 사람은,
'우리 나라 사람이 싸우기를 좋아하므로, 기자(箕子)가 우리 나라에 와서 큰 갓과 긴 소매의 옷을 지어 입혀 백성으로 하여금 몸을 마음대로
활동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싸움을 금지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한다. 이는 믿을 수 없는 허황한 말이다.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옛 고깔의 남겨진 모양이라고 하였으나, 이 역시 그렇지 않다. 고깔은 꽈리와 같이 생겼으므로 꽈리를 일명
피변초(皮弁草)라고 한다. 지금의 갓은 위는 평평하고 아래 갓양태는 넓은데 어찌 고깔이라 보겠는가? 옛날에 풀로 갓을 만들어 비를 피했던 것일
따름이다. 요즈음 갓의 제도는 점점 높고 넓어져, 쓰기에도 아치(雅致)가 없고 균형이 안 맞아 볼품이 없다. 속담에 '갓이 너무 크면
항우(項羽)라도 쭈그러들고, 갓이 파손되면 학자도 당황한다.'고 한다. 조정에서 명령을 내려 일체 금하고 별도로 관건(冠巾)을 만들어
반포하되 등급의 차별을 정해야 한다. 다만 소립(小笠)을 제작하여 말 타는 자와 보행자가 들길을 걸을 때에 머리에 쓰고 비를 피하거나 햇볕을
가리는 도구로 하는 것은 괜찮다. 그 제도는, 모자는 이마를 덮을 수 있으면 되고 꼭대기는 지금의 갓같이 평평하지 않아도 좋으며, 만약 꺾을 수
있으면 꺾어서 전립(氈笠)처럼 뾰족하지 않은 것이 좋다. 다만 갓모의 높이는 조금 낮추고 갓양태는 날카롭지 않게 해야 한다. 베 2자 5푼이면
되고, 갓끈은 넓되 길게 할 필요는 없다. 평양 무열사(武烈祠)의 이여백(李如栢)의 화상을 보면 알 것이니, 이는 그 본보기이다. 갓의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나룻배가 바람을 만나면 배가 기우뚱거리는데, 이 때 조그마한 배안에서 급히 일어나면 갓양태의 끝이 남의 이마를
찌른다. 좁은 상에서 함께 밥을 먹을 때에는 양태 끝이 남의 눈을 다치며,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는 난장이가 갓 쓴 것처럼 민망하다. 이는
사소한 일이지만 들에 가다가 풍우를 만나면 갓모자는 좁고 갓양태는 넓고 지투(紙套)는 경직하여, 바람이 그 사이로 들어오면 펄럭이는 소리가 벽력
같은데, 위로 갓이 말려 멋대로 펄럭인다. 양쪽 갓끈을 단단히 동여매면, 갓끈이 끊어질 듯 팽팽하게 턱과 귀가 모두 당겨 올라가고 상투와 수염이
빠지려 한다. 유의(油衣)는 치마같이 하여 머리에 써서 손으로 잡는 것인데, 바야흐로 비바람이 불어칠 때는 갓이 펄럭여 일정하지 않으므로
불가불 끈을 풀어 손으로 갓의 좌우를 부축해야 한다. 그러나 빗물이 넓은 소매로 들어오므로 무거워서 들 수가 없다. 또, 말이 자빠지려 할 경우
어떻게 손으로 고삐를 잡겠는가? 이렇게 되면 위의를 잃은 것을 부끄러워할 겨를은커녕 죽고 사는 것이 시각에 달리게 된다. 일찍이
여진(女眞) 사람이 말 타는 것을 보았는데, 급한 비를 만나면 얼른 소매와 옷깃이 있는 유의를 입고 또 폭건(幅巾)같이 부드러운 모자를 쓰고
채찍질하여 달렸다. 그러니 어찌 쾌활하지 않겠는가? 또, 지금의 갓은 제작이 허술하여 갓모자와 갓양태의 사이에 아교가 풀어지면 서로 빠져
버린다. 역관들이 연경(燕京)에 들어갈 때 요동 들판을 지나다가 비를 만나 갓양태는 파손되어 달아나고 다만 모자만 쓰고 간다. 중국 사람이야
우리 나라 풍속에 그런 관이 있을 것이라 여기고 보통으로 보나, 같이 간 사람은 다 조소한다. 그렇다고 어디서 갓을 사겠는가? 매양 들판
가운데의 행인들을 보니, 비를 만나도 갓 위에 씌울 것이 없는 사람들은 갓양태가 빠져 나가고 부서질까 염려하여 풀을 뜯어 갓양태 아래에 태를
만들어 가리며, 또는 갓을 벗어 겨드랑이에 끼고 한 손으로는 상투를 쥐고 허겁지겁 달린다. 대개 갓 하나의 값이 3, 4백 냥이 되므로 갓을
생명처럼 보호하여, 그 궁색하고 구차함이 한결같이 극에 달했다. 그리고 초립의 생긴 모양도 지극히 괴이하다. 소년은 물론이고, 아전들이
부모의 상중에 벼슬에 나아가서도 갓을 착용한다. 길흉에 구별이 없으니 이 무슨 예절인가? 또, 빽빽하여 통풍이 안 되므로 바람이 불면 초립끈이
턱을 파고들어 할 수 없이 시원히 초립끈을 풀면 바람에 날려가 마치 종이연 모양으로 멀리 날아올라 간 곳을 모르게 된다. 나이가 좀 든 사람이
초립을 어깨 뒤로 드리우고 다니는 것은 더욱 가증스럽다. 또, 만들기도 어렵고 값도 비싸니 금하게 하는 것이 좋다. 대저 나태한 풍습과
오만한 태도가 모두 갓에서 생기니, 어찌 옛 습속이라 하여 따르고 금하지 않을 수 없겠는가?
요점 정리 연대 : 이조
작자 : 이덕무 성격 : 설명적, 비판적, 예시적 주제 : 갓의 폐단에 대한 비판
내용 연구 아치 :
아담한 풍치 유의 : 비를 막기 위하여 종이나 포목으로 옷을 지어 기름에 절음 역관 : 통역을 맡아보는 관리
이해와
감상 필자는 갓의 폐단을 조목조목 지적하여 논하고 있는 글로 갓이 지니고 있는 폐단이 여러 가지인데 이러한 폐단이 나타나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갓의 형태로 보았다. 즉 갓은 모두 갓모자가 좁아서 머리를 덮지 못하고 갓양태가 넓어 바람을 많이 타기 때문에 매우 위태로운 모자로 보고
있으며, 원래는 실용적으로 농부가 비를 피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후대에 오면서 권위적인 형태가 되어 갓모자는 좁고 갓양태는 넓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바람을 많이 타게 되어 비실용적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