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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학자 儒賢

[不遷位 기행 .21] 무송헌 김담(1416~64)

작성자이장희|작성시간15.11.21|조회수44 목록 댓글 0

[不遷位 기행 .21] 무송헌  김담(1416~64) [不遷位 기행 .21] 무송헌  김담(1416~64)

무송헌(撫松軒) 김담(金淡·1416∼64)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천문학자다. 특히 최고의 천문학자로 이순지와 함께 세종에게 발탁돼 당대 최고의 역서(曆書)로 평가받는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편찬, 조선 천문역법을 세계적 수준으로 올리는데 주역을 담당한 인물이다. 또한 세종대왕 당시 집현전에서 17년간 재직하며 한글 창제에 참여하고 각종 예법 개정 및 문물제도 정비에도 참여했던 그는 이조판서에까지 오른 벼슬아치로서도 남다른 모범 공직자의 삶을 보여준 인물이다.


◆이순지와 함께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로 많은 업적

무송헌은 자신이 태어난 영주 삼판서고택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다 1434년 한양으로 올라가 이듬해인 1435년 형과 함께 문과에 급제, 형제가 나란히 집현전 정자(正字: 정9품)에 임명된다. 집현전 학사 중 형제가 나란히 선발된 유일한 예다. 이조정랑으로 재직하던 1447년에는 문과 중시(重試: 과거 급제자를 대상으로 치르는 시험)에서 을과 1등 3인 중 제2인으로 합격했다. 첫째가 성삼문이고, 셋째는 이개였다. 을과 2등 7인은 신숙주, 최항, 박팽년, 유성원 등이었다.

이처럼 출중한 능력을 갖추었던 그는 세종 치세에 여러 분야에서 크게 활약하게 된다. 특히 천문과 산학에 정통했던 그는 이순지와 함께 문과급제자로서는 특별하게 과학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세종은 1434년(세종 16) 간의대(簡儀臺: 지금의 천문대)를 설치하고, 이순지(1406∼65)를 책임자로 임명해 업무를 수행하게 했다. 이순지가 모친상을 당해 자리를 비우게 되자 세종은 대신할 사람을 천거하도록 명했고, 승정원에서는 "집현전 정자 김담이 나이가 젊고 총민(聰敏)하고 영오(潁悟)하므로 맡길 만한 사람"이라며 천거했다. 4개월 뒤 이순지가 왕명으로 복귀한 후에도 무송헌은 이순지와 함께 일했다.

세종은 즉위하면서부터 원나라를 기준으로 한 수시력(授時曆)과 명나라를 기준으로 한 대통력(大統曆)이 우리나라와는 차이가 있음을 알고 우리 실정에 맞는 역법을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천문·역법은 학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데다 생색이 나지 않는 분야라 본격적으로 연구하려는 사람이 드물었다.

무송헌은 1439년 왕명을 받들어 이순지와 함께 역법 교정에 착수, 1442년에 칠정산 내외편을 완성했다. 칠정산은 '7개의 움직이는 별(해,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을 계산한다'는 의미로, 내편은 수시력과 대통력을 바탕으로 한양을 기준으로 만든 역법이며, 외편은 아랍 역법인 회회력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독자적 역법서인 칠정산은 아랍의 천문학보다 앞선, 동시대 세계에서 가장 앞선 천문 계산술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 왕조가 칠정산 내외편에 대해 얼마나 자부심을 가졌는지는 칠정산 내편 서문에서 '이리하여 역법이 아쉬움이 없다 할 만큼 되었다'고 적은 것으로 알 수 있다.

1445년에 간행된 제가역상집(諸家易象集)도 무송헌이 이순지와 함께 저술하는 등 당시 천문학에 관한 대부분의 저서는 무송헌과 이순지가 연구·저술한 것이다.


◆세종과 문종·세조로부터 각별한 총애 받아

1449년(세종 31) 정월 부친상을 당해 시묘(侍墓)살이를 하던 중, 그 해 5월에 왕이 출사(出仕)하라는 특명과 함께 쌀 10석·옷·신발·버선 등을 하사하며, 대궐에서 인견(引見)한 후 역법(曆法)을 맡아보도록 명했다. 이에 무송헌은 같은달 23일에 상소를 올려 사직할 것을 청했다.

'신은 시골의 천한 선비로서 …임금님의 은혜를 입고 관직이 4품에 이르렀습니다. 헤아려 보건대 지금의 신하들 중에 비록 귀척(貴戚)이나 훈구(勳舊)의 후예라도 신과 같이 성은을 온전히 입은 자는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몸이 상하고 머리가 부서질지언정 만분의 일이라도 성은을 갚아야 할 터인데, 어찌 감히 정을 숨기고 말을 꾸며 성총(聖聰)을 어지럽게 하겠습니까. …신이 생시에 봉양하지 못하고, 병중에 의약도 지어 드리지 못했으며, 돌아가신 후 장례 치를 때도 당도하지 못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고 땅을 치며 통곡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생각하건대 마땅히 묘소 곁에 엎드려 3년상을 마치고자함은 전일의 잘못을 보상하고자 함이 아니고 금일에 힘쓸 바 오직 이것뿐이라고 여겨집니다. …역법을 헤아리는 일은 박수미와 김석제가 참으로 저보다 우월합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다음날도 "신의 가정이 액운을 만나 신의 백부가 지난해 9월에 돌아가시고 11월에 신의 누이도 죽고, 올해 정월에는 신의 어미가 병환이 위독해 미처 쾌차하기도 전에 신의 아비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신의 여식이 조부모 슬하에 크다가 2월에 이르러 또 죽었습니다. …향리로 돌아가 상제(喪制)를 마치고 노모를 봉양하도록 윤허해 주시기 바랍니다"며 상소를 올린다. 임금이 계속 허락하지 않는 가운데 그 해 7월까지 여섯 차례나 상소를 올린다. 임금은 오히려 승진 벼슬을 내리면서 복귀하도록 명한다.

사간원에서 상을 당한 지 오래되지 않아 벼슬을 제수해 맡기는 것은 옳지 않다고 건의하자, 세자(문종)는 "김담이 집에 있을 때는 상복을 입고 관청에 있을 때는 평상복을 입으면 되지 않겠는가. 역법에 정밀함이 김담 같은 이가 없기 때문에 임용하려는 것이다"고 했다. 당시는 세자가 세종을 대신해 정무를 보던 때였다.

무송헌에 대한 왕과 세자의 신뢰와 총애가 이처럼 두터웠던 것이다.

결국 기복(起復: 상중에 있는 관리를 탈상 전에 관직에 불러 쓰는 것)의 명을 따라 복귀한 그는 천문역법 연구에 매진했다.

세조로부터도 각별한 대우를 받은 무송헌은 1463년(세조 9)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7월에 무송헌이 별세하자 왕은 2일 동안 조회(朝會)와 저자를 정지할 것을 명하는 한편, 예관(禮官)을 보내 조제(弔祭)를 치르게 하고 부의(賻儀)를 후하게 내렸다. 그리고 별세 이튿날 시호 '문절'(文節: 학문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이라 하고, 청렴함을 좋아하고 사욕을 이기는 것을 절이라 한다)을 내렸다. 별세 후 이틀만에 시호를 내린 것은 드문 일이다.


◆안견 몽유도원도에 찬시 남겨

안평대군이 무릉도원을 방문하는 꿈을 꾸고 그 내용을 안견에게 그리게 한 그림이 '몽유도원도'이다. 이 몽유도원도에는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정인지 등 당대 최고 문사의 제찬(題讚)을 포함해 23편의 자필 찬시가 곁들여져 있는데, 무송헌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무송헌이 몽유도원도에 남긴 시의 일부다.

'파란 숲 사이로 백옥같이 맑은 물 흐르는데(碧玉叢間白玉流) /꽃빛은 물 위에 길게 비치어 떠 있네(花光長帶水光浮) /맑고 그윽한 자연은 인간의 세계가 아니니(淸冥風露非人間) /뼛속 시원하고 정신 향기로운 꿈 속에서 노닐었네(骨冷魂香夢裏遊) //한 조각 도원을 한 폭에 그려놓으니(一片桃源一幅圖) /산중의 선경이 비단 위에 사뿐히 실렸네(山中上較銖) /무릉에서 길 잃은 자에게 묻노니(試問武陵迷路者) /눈 앞에 보았던 게 꿈만 같지 않았던가(眼中還似夢中無)'


■김담 약력

△1416년 영주 출생 △1435년 형 김증과 함께 문과 급제 △1439년 집현전 박사 △1442년 칠정산(七政算) 완성△1451년 사헌부 장령 △1456년 안동 부사 △1458년 경주 부윤 △1463년 이조판서 △1464년 7월 별세, 시호 문절 △1615년 사림(士林)이 향현사(鄕賢祠)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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