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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갈암 이현일이 지은 운암 공 묘표

작성자이장희|작성시간14.10.11|조회수43 목록 댓글 0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 운암(雲巖) 김공(金公) 묘표

 

공의 성은 김씨(金氏)이고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시조 휘 용비(龍庇)는 고려 왕씨 때에 현달하여 벼슬이 태자첨사(太子詹事)였다. 고조 휘 한계(漢啓)는 본조에 벼슬하여 통훈대부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에 이르렀다. 증조 휘 만근(萬謹)은 성균관 진사였는데 통훈대부 통례원 좌통례에 추증되었다. 조부 휘 예범(禮範)은 병절교위(秉節校尉)였는데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다. 고 휘 진(璡)은 성균관 생원으로 누차 추증되어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가 되었다. 비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는데, 좌의정 문도공(文度公) 휘 제(霽)의 6세손인 처사(處士) 휘 세경(世卿)의 따님이다. 다섯 아들을 두었으니, 극일(克一)은 성균관 사성이고, 수일(守一)은 자여 찰방(自如察訪)이고, 성일(誠一)은 바로 학봉(鶴峯) 문충공(文忠公)이고, 복일(復一)은 창원 부사(昌原府使)이다. 공은 셋째인데, 휘는 명일(明一)이고 자는 언순(彦純)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깊고 선량하고 온순하였으며 총명하고 부지런하였다. 가정에서 평소의 생활에 한 번도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었다. 글을 읽고 문장을 배울 때에 남들보다 두 배의 노력을 하여, 글 짓는 실력이 날로달로 늘어나 명성이 자자하였다. 일찍이 판서공의 명으로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글을 읽었는데, 금계(錦溪) 황공 준량(黃公俊良)이 한 번 보고 큰 그릇이 될 인물임을 알았으며 돌아올 때에 고풍시(古風詩) 1편을 지어서 주었다. 당시에 퇴도(退陶) 노선생(老先生)께서 바야흐로 도산(陶山)에서 도(道)를 강학하였는데, 공이 아우 문충공과 함께 경전(經典)을 가지고 문하에 나가 가르침을 청하자, 노선생께서 손수 잠명(箴銘)을 써서 주었으니, 기대하는 바가 얕지 아니했던 것이다. 이에 형제가 서로 강마하며, 의심나는 것을 질문하여 가르침을 청하며 재사(齋舍)에 거처하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

가정 갑자년(1564, 명종19)에 아우 문충공 및 창원공(昌原公)과 함께 진사(進士) 회시(會試)에 합격하니 당시 사람들이 다들 영광으로 여겼다. 공은 평소 질병이 많았으므로 과거 시험을 폐기하고 초야의 선비로 지내려 하였으나 부친의 뜻에 따르느라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장차 성균관에 들어가려 할 때에 시(詩)와 서찰을 지어 노선생께 올리니, 선생께서 화시(和詩)와 답서(答書)를 지어 주셨는데 정성스럽게 책려하고 진취시키려는 뜻이 있었다. 성균관에 있을 때에는 말과 행동이 조용하고 온화하여 한결같이 사문(師門)의 규범을 따랐다.

기사년(1569, 선조2)에 중형(仲兄) 및 계제(季弟)와 함께 향해(鄕解)에 합격하고,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불행히도 병이 들어 돌아왔다. 찰방공(察訪公)도 시장(試場)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함께 돌아왔는데, 돌아오는 길에 용인(龍仁) 금량역(金亮驛)에 이르러 공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찰방공이 상여(喪輿)를 호송하여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해 10월 모일에 아니산(亞尼山) 간향(艮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향년은 37세였다.

공의 배(配)는 영양 남씨(英陽南氏)인데, 성품이 엄격하여 법도가 있었고 시부모를 섬기고 남편을 받드는 일에 효성과 정성이 지극하였으며, 공의 상중에 곡읍(哭泣)과 애훼(哀毁)를 남들보다 심하게 하였다. 아버지를 잃은 어린아이들을 기를 때에, 사랑이 비록 독실하였으나 교육시키고 경계하는 것은 방정하고 엄숙하였다. 제사를 받드는 일에 정성을 다하고 비복들을 부리는 일에 법도가 있어서 향리에서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아들은 하나인데 이름이 약(瀹)이며, 딸도 하나인데 봉사(奉事) 권욱(權旭)에게 시집갔다. 약은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시경(是㯳)이고, 다음은 시평(是枰), 시구(是榘)이며, 장녀는 생원 권상달(權尙達)에게 시집갔고, 막내는 사인 배익겸(裵益謙)에게 시집갔다. 시경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암(黯)이고 막내는 달()이며, 딸은 사인 김유후(金裕後)에게 시집갔다. 시평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묵(默)이고 딸은 사인 김여익(金如翼)에게 시집갔다. 시구는 아들이 없어서 재종제(再從弟) 표은공(瓢隱公) 시온(是榲)의 아들 방찬(邦贊)으로 후사를 삼았다. 암은 3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학규(學逵)이고, 다음은 학요(學堯)인데 재능이 매우 뛰어나고 아름다웠으나 일찍 죽었고, 막내는 학배(學培)인데 의조 원외랑(儀曹員外郞)이다. 달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학원(學遠)은 일찍 죽었고, 다음은 학중(學重)이다. 묵은 1남을 두었는데 학증(學增)이다. 또한 일찍 죽었다. 방찬은 2남을 두었는데 항중(恒重)과 이중(履重)이다. 학규는 2남을 두었는데, 장남 세탁(世鐸)은 지행(志行)이 있었으나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세탁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경렴(景濂)이다. 내외 증손, 현손, 4대손, 5대손 남녀가 모두 약간 명이 있다.

공은 자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고 일찍 내외와 경중의 나뉨을 알았으며, 성품이 또 아름다운 산수(山水)를 매우 좋아하였다. 판서공이 일찍이 낙연(落淵) 남쪽 경치가 좋은 곳에 작은 암자를 하나 짓고 당호(堂號)를 선유정(仙遊亭)이라고 붙여 공에게 주니, 공은 그곳을 평생 지낼 곳으로 삼았다. 또 거처하는 추월리(秋月里) 상류에 층암절벽이 불쑥 솟아 세속에서 운건암(雲褰巖)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었는데, 공이 그 위에 대(臺)를 쌓고 인하여 운암(雲巖)이라 자호하고는 한가한 날이면 매번 그곳에 가서 노닐면서 유유자적하는 정취가 있었고, 분분하고 화려한 세상의 이욕에 대해서는 담담하여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또 후진을 권면하고 타이르며 자상하게 이끌어 주어 더러 학문을 성취한 자가 있었다.

처음에 문충공이 일찍이 공의 묘소에 묘갈(墓碣)을 세우려고 하여 빗돌을 이미 마련하고도 미처 글을 새겨 세우지 못했는데, 마침 임진병란을 만났고 학봉 선생이 얼마 뒤 또 세상을 떠났다. 묘갈을 세우지 못하고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공이 세상을 떠난 지 이제 130여 년이 흘렀다.

하루는 공의 4세손 항중(恒重)과 5세손 세현(世鉉) 등이 원외군(員外君)이 엮은 공의 행실기(行實記) 한 통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표에 새길 글을 청하며 말하기를, “선조의 아름다운 지행(志行)은 참으로 민몰시켜서 전해지지 않게 해서는 안 되고, 비석을 세워 묘표를 새겨서 숨겨진 덕행을 드러내 알리려던 문충공의 뜻도 저버려서는 안 되는데, 집안에 대대로 일이 많아 지금까지 미루어 왔으니, 우리 보잘것없는 후손들은 불효를 지어 조상께 죄를 얻을까 두렵습니다. 집사께서는 이미 대대로 통가(通家)의 교분이 있고 또 당시의 일을 아시는 분이니, 필시 저희 선조의 지업(志業)과 행의(行誼)를 잘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히 절하고 부탁합니다.” 하였다. 현일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그대들의 부탁이 옳다. 현일은 오늘날 이 요청에 대해 참으로 감히 사양할 수 없는 바가 있다. 그러나 노쇠하여 정신이 혼미하고 글솜씨도 하찮아 공의 숨은 덕행을 다 드러내서 미덥게 먼 후세에 보여 줄 수 없을 것이니 그것을 어찌할 것인가.” 하였다. 그러나 제군들이 거듭 대의(大義)를 들어 요구하였으므로 끝내 사양하지 못하였다. 생각해 보면 현일의 왕모부인(王母夫人)은 공에게는 내외 형매(內外兄妹) 사이이므로 현일은 일찍이 여러 부형들과 어른들이 공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도(道)에 가까웠고 또 도(道)를 지닌 분을 일찍 가까이 모셨으므로, 성현(聖賢)들이 서로 전수한 지결(旨訣)을 들어 그것을 깊이 마음에 담아 삼가 잘 지켰다. 만약 하늘이 나이를 더 주어 그 힘을 다하게 했더라면 성취한 바를 어찌 헤아릴 수 있었으랴. 아, 이에서 그 뜻〔志〕을 보고 그 덕(德)을 살필 수 있다. 그래서 응낙을 하고, 드디어 그 집안에 전해 오던 행실기를 바탕으로 하고 예전에 들었던 말들을 참고해서 그 세계(世系)의 내력과 지행(志行)의 대략을 편차하여 묘석(墓石)에 적게 하니, 후세의 군자들은 잘 상고해 보기 바란다.

금상 29년 계미(1703, 숙종29) 8월 임인일에 재령 이현일은 기술한다.

 

[주]현일의 …… 사이이므로 : 갈암의 할머니는 김명일(金明一)의 고모의 딸이다. 고모부는 이희안(李希顔)이다.

 

成均生員雲巖金公墓表 갈암 이현일 찬

公姓金氏。義城人。上祖諱龍庇。顯高麗王氏時。爲太子詹事。高祖諱漢啓。仕本朝。官至通訓大夫副知承文院事。曾祖諱萬謹。成均進士。贈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祖諱禮範。秉節校尉。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考諱璡。成均生員。累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妣驪興閔氏贈貞夫人。左議政文度公諱霽之六世孫。處士諱世卿之女。生五男子。曰克一成均司成。曰守一自如察訪。曰誠一卽鶴峯文忠公。曰復一昌原府使。公於倫次居第三。諱明一。字彥純。自幼孝友祥順。穎悟 勤敏。家庭日用云爲。無一或掛於過差。讀書學文。功力兼人。爲文詞日就月將。聲譽藹鬱。嘗以判書公命。讀書紹修書院。錦溪黃公俊良一見知其爲遠器。及其還也。作古風詩一篇以贈之。時退陶老先生方講道陶山。公與弟文忠公執經請敎于門下。老先生手書箴銘以畀之。所以期許之者不淺。於是兄弟交相講磨。質疑請益齋居攻苦。至忘寢食。嘉靖甲子。與弟文忠公及昌原公俱登璧水之選。一時以爲榮。公素多疾病。欲輟擧從所好。以親故不得自專。將入泮宮。作詩若書。上老先生。先生爲之和詩答書。惓惓有策 勵奬進之意。其在泮宮也。言辭擧止。從容和粹。一遵師門軌則。己巳。與仲兄若季弟俱捷鄕解。赴試京師。不幸遇疾而歸。察訪公亦不入試場。與之同還。至龍仁之金亮驛。奄至不祿。察訪公護柩南下。以是年十月某日。葬于亞尼山艮向之原。享年三十七。公之配曰英陽南氏。性嚴有法度。事舅姑奉君子。孝謹備至。執公之喪。哭泣哀毀。有過人之行。撫育孤幼。慈愛雖篤。而所以敎戒之者。方嚴整肅奉祭祀以誠。御婢僕有法。鄕里莫不稱歎。有丈夫子一人曰瀹。女子子一人適奉事權旭。瀹有三男二女。男長曰是㯳。次是枰, 是榘。女長適生員權尙達。季適士人裴益謙。是㯳生二男一女。男長曰黯。季曰。女適士人金裕後。是枰有一男一女。男曰默。女適士人金如翼。是榘無子。以再從弟瓢隱公是榲之子邦贊爲後。黯有三男。長曰學逵。次學堯。甚秀而文。早卒。季曰學培。儀曹員外郞。有二男二女。男長曰學遠早卒。次學重。默有一男曰學增。亦早卒。邦贊有二子。曰恒重,履重。學逵有二子。長曰世鐸。有志行。不幸早卒。有二子。長曰景濂。內外曾玄來晜孫男女凡若干人。公資稟粹美。早知內外輕重之分。性又酷好佳山水。判書公嘗就落淵之 南水石幽絶處。結一庵堂。號曰仙遊亭以畀公。公得之以爲終老之計。又於所居秋月里上流。有層巖斗起。俗號爲雲褰巖。公築臺其上。仍自號曰雲巖。暇日輒往來遊嘗。悠然有自得之趣。至於世利紛華。泊然無所動其心。又能勸飭後進。諄諄善誘。間有成就之者。始文忠公嘗欲爲公碣墓。石旣具。未及琢建。適會壬辰兵亂。鶴老尋又下世。因循未果。距公下世今百三十有餘年。一日公之四世孫恒重,五世孫世鉉等。以員外君所撰公行實記一通來。請余所以表其墓者曰。先祖志行之懿。固不可泯沒無傳。文忠公建石 刻表闡揚幽潛之意。亦不宜孤負。而家世多故。迄茲遷就。吾儕藐孤孫大懼不孝。獲罪幽明。惟執事旣世通家。且猶及見聞之世。必能道吾祖志業行誼。敢拜以請。玄逸作而言曰。諸君之見責是也。玄逸於今日之請。固有所不敢辭者。其如衰退荒忽。文字短淺。不能究闡幽微。信示久遠何。諸君重以大義要責。於是不得終辭。仍竊惟念玄逸之王母夫人於公爲內外兄妹。固嘗聞諸父兄丈老之言。公天資近道。旣又早親有道。得聞聖賢相傳旨訣。服膺而謹守之。若使天假之年。以竭其力。則其所就其可量歟。嗚呼。茲可以 觀其志而審其德矣。則應曰諾。遂据家傳行實記。參以舊聞。輒論次其世系來歷志行梗槩。使之書于墓石上。後之君子庶有攷焉。

上之二十九年昭陽協洽八月壬寅。載寧李玄逸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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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의성김 원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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