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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 할아버지는 사포서 별제 증 사헌부 집의 이름은 옥견(玉堅)이다. 할아버지는 증 승정원 좌승지 이름은 숙(淑)이다. 아버지는 성균관 진사 증 이조 참판 이름은 유명(惟明)이다. 별호는 역양 선생(嶧陽先生)이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진양 강씨(晉陽姜氏)이다. 장사랑(將仕郞) 강근우(姜謹友)의 딸로서 고려 국자 박사 강계용(姜啓庸)의 후손이다. 공의 이름은 온(蘊), 자는 휘원(輝遠), 성은 정씨(鄭氏), 본관은 팔계(八溪)이며, 시조(始祖)는 광유후(光儒侯) 정배걸(鄭倍傑)이다. 광유후는 자손이 번창하고 벼슬 높은 귀인이 많은데, 오늘날 팔계 정씨가 모두 광유후의 자손이다. 고려 때에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정습인(鄭習仁)은 곧은 도로써 세상에 드러나 사적이 《고려사(高麗史)》 본전에 실려 있다. 7대 만에 역양 선생(嶧陽先生)이 났는데, 선생은 일찍이 갈천 선생(葛川先生) 임훈(林薰)에게 수업하였고, 오늘날 역천서원(嶧川書院) 향현일민사(鄕賢逸民祠)에 봉향되어 있다. 공은 역양 선생의 둘째 아들이다. 명 목종(穆宗) 융경(隆慶) 3년, 우리 소경대왕(昭敬大王 선조(宣祖)의 시호) 2년 기사(1569) 2월 6일에 감음현(感陰縣 안의(安義)) 역동리(嶧洞里)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식감(識鑑)이 있었으며, 부모를 섬김에 있어 반드시 뜻을 받들어 순종하는데 행동이 꼭 어른과 같았다. 배움에 나아가서는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열심히 하였다. 경사(經史)를 두루 읽자, 행검과 학업이 날로 닦이고 쌓여 15, 6세에 벌써 법도가 이루어졌고, 온종일 꿇어앉아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아버지 역양 선생이 은거하면서 글을 가르치니 제자들이 날로 모여들었으나 선생을 앞설 자가 없었다. 갈천 선생을 처음 뵙고는 이름이 더욱 드러났다. 역양 선생의 교훈은 법도가 있어서 남다른 행동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적이 없었다. 때문에 공의 배움 역시 어버이를 섬김에 뜻을 잘 따르고, 벗을 사귐에 성실을 기하며, 남과 함께 착한 일하기를 좋아하고, 일에 임하여서는 아주 준엄하고 올곧았다. 그러므로 향인(鄕人) 부로(父老)들이 모두 경탄하였다. 우리 소경대왕 25년(1592)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큰 난리가 일어났다. 4년 뒤에 아버지 역양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너무 슬피 울어서 생명을 잃을 뻔하였으며, 난리에 쫓겨 떠돌면서도 상제 노릇하는 범절은 잠시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도 난리는 평정되지 않았는데, 어머니를 섬김에 있어 몸소 궂은 일을 하여 가며 봉양하고 여가가 나면 글을 읽었다. 당시의 명사들과 종유하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월천(月川 조목(趙穆))ㆍ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다. 지난날 정인홍(鄭仁弘)이 영남에서 높은 명망을 가지고 강우(江右 경상우도(慶尙右道))의 학도를 끌어들여 ‘내암제자(來庵弟子)’라 부르며 규율이 엄격하였는데, 공도 처음에는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후에는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이 문충공(李文忠公)에게 편지를 올려서 서로 깊이 알게 되었다. 만력(萬曆) 34년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이듬해에 행의(行誼)로써 향천(鄕薦)을 받았다. 그 이듬해에 정인홍이 유영경(柳永慶)을 탄핵하다가 죄를 얻게 되자, 공이 초야에 있으면서 상소로 해명하였다. 이때 임해군(臨海君)을 상변(上變)한 사건이 있었는데, 공은 정인홍에게 편지를 보내어, 임해군이 반역을 모의한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음을 말하며 전은(全恩)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또 자기 이익에만 치우치는 붕당(朋黨)의 폐단을 논술하였다. 마침내 임해군이 죽임을 당하는 옥사가 벌어지니, 이는 정인홍이 작용을 한 것이다. 이때 사대부들은 전은을 말하였으나 도리어 왕실을 넘보고 있다고 지목하여 대신은 문을 닫고 나오지 않고 어진 이는 자취를 감추었다. 폐주(廢主 광해군(光海君)) 원년 기유(1609)에는 광릉 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다음해에는 또 봉자전 참봉(奉慈殿參奉)에 제수되었다. 이해 가을에는 별시(別試)에 급제(及第)하여 신해년(1611) 2월에 세자시강원 겸설서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이해 가을에 다시 겸설서에 제수되었고, 얼마 안 가서 다시 설서로 소명(召命)이 거듭 내리자 사은하였다. 10월에 사서(司書)에 승급되고, 다음달에는 사간원 정언으로 옮겼다. 이해에 창덕궁(昌德宮)이 준공되어 경운궁(慶運宮)에서 이어(移御)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새 궁전이 상에게 좋지 않다는 요사스런 말이 있어 경운궁으로 환어하려 하였다. 신하들이 모두 안 된다고 간하자 이를 변명할 말이 없음을 걱정하다가, 그때 양궁(兩宮 인목대비와 광해군)의 사이가 나빠 경운궁에 머물러 있던 대비에게 문안을 가겠다고 변명하였으니 실은 그 길로 머물러 있으려는 것이었다. 공이 이를 극력 논쟁하다가 말이 기휘에 저촉되어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좌천되었다. 광해군 이래 용사하는 자가 날로 위복(威福)으로 사람을 제압하므로, 사대부들은 모두 잘 보이려고만 하여 아첨과 아양이 조정에서 풍조를 이루고 곧은 말로써 과감히 간하는 자가 없었는데, 공이 곧은 말로써 공박하자, 사람들은 봉명조양(鳳鳴朝陽)에 비교하였다. 경성은 북쪽 아주 동떨어진 변방에 있어서 임금의 교화가 미치기에는 매우 멀고, 변방 장수들이란 모두 무인이어서 대개가 거칠고 경우가 없으므로 백성들의 원망이 많았다. 또 지난해 북로(北路)에 큰 기근(飢饉)이 들었을 때에도 경성이 더욱 심하였다. 공이 근신으로서 하루아침에 좌천되었으나 언제나 겸양하고 거만한 기색이 없었다. 예절 있게 주장(主將)을 섬기고 관리를 이끌며 백성을 다루는 데는 곡진한 인정과 사랑으로써 어려운 생활을 구호하고 낡은 행정을 개혁하였으므로, 백성들의 생활이 크게 향상되었다. 선왕이 일찍이 세자를 바꾸고자 하였기 때문에, 폐주가 즉위하고 나서 대신이 그 일을 모의하였다 하여 마음속에 품고 있다가 유영경을 죽이니, 이에 이이첨(李爾瞻) 등도 자신들의 공력으로 여기고 우쭐댔다. 공상(功賞)을 논할 적에, 공이 일찍이 정인홍의 죄상에 대해 힘써 해명하였다 하여 소명을 내려 장악원 첨정으로 삼았다. 공이 자신은 공로가 없다고 소를 올려 사양하니, 이이첨이 감정을 품고, “그가 훈맹(勳盟)이 오래 가지 못할 것으로 여겨서일 것이다.” 라고 말하므로, 공은 사양해 보아도 아무 도움이 없을 것으로 여겨 그만두었다. 이때 큰 옥사가 속출하여 사람마다 발을 바로 딛지 못하고 눈을 바로 뜨지 못하였으며, 마소 도둑으로서 아무 구실 없이 요행을 바라는 자도 더러는 고변(告變)으로써 은총을 받는 일이 있었다. 이에 어떤 사형수가,“김제남(金悌男)이 영창군(永昌君)을 옹립하려고 밤낮으로 모의한다.” 고 고변하자, 옥사(獄辭)가 만연되어 많은 사대부가 걸려들었는데, 이렇게 되자 용사자들은 영창대군을 두고 한편으로는 ‘기화(奇貨)’로, 또 한편으로는 ‘화본(禍本)’이라고 말을 꾸며 대며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써 공로를 다투었다. 공이 이이첨을 보고,“철모르는 어린아이가 반역을 꾀한 적이 있던가? 또 들리는 말에 의하면 대비께서는 밤낮으로 울먹이며 아들과 함께 죽지 못할까 걱정한다고 하는데, 만일 불행하게 된다면 그래도 제공들은 훗날에 할 말이 있다고 여기는가?” 하니, 이이첨은 소리를 버럭 지르며,“대비를 함께 폐위하기로써니 또 어느 누구가 안 된다고 하겠소?” 하고 성을 내어 일어서려 하였다. 공이 웃으며,“일어설 것 없소. 내가 곧 갈 것이오.” 하고 드디어 절교하였다.공은 세태가 갈수록 위험하고, 처지가 더욱 소원해짐을 느끼고 조그마한 구실을 만들어 돌아가려고 조회에서 일부러 헌령(憲令)을 범하여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간신들이 국권을 잡아 시사(時事)가 날로 어지러워지므로 공은 답답하게 여겨 한마디 말로 상의 뜻을 감동시켜 보려고 하였으나 화만 부를 뿐 도움이 없을 것이고, 또 어머니가 살아 있음을 생각하여 말없이 늘 혼자서만 슬퍼하였다. 하루는 어머니를 모시고 하고 싶은 일을 다 여쭈었더니, 어머니는, “힘쓰거라, 이 늙은 어미 때문에 마음을 변하지는 말아라.” 하니, 공이 매우 흐뭇해 하였다.이때 공이 물러나 있은 지 여러 달이었는데, 당시 의논이 더욱 그를 그르게 여기므로 마지못해 한 번 서울에 왔다가 돌아갔다. 서울에 오던 그 달에 성균관 사예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고, 이해 겨울에는 또 시강원 필선에 제배되었는데, 강원(講院)에 있으면서 세태에 맞추어 굽신거리지 않았으므로, 한 달 남짓되어 바로 부사직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그들의 분노는 날이 갈수록 더하여 온갖 수단으로 꾸며대어 반역의 무리로 지목하고 밤낮으로 행동을 정탐하였다. 지난해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위리안치하였는데, 2월에 부사(府使) 정항(鄭沆)을 시켜 몰래 죽이니, 그의 죽음을 듣고 슬퍼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에 공은 소를 올려, “어린이는 실상 반역을 모의한 사실이 없었는데 정항이 위협하여 죽게 하였으니, 이는 전하께 한악한 무부의 손을 빌려 죽인 것입니다. 정항을 죽이지 않는다면 전하께서 선왕의 묘정(廟庭)에 설 면목이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작위를 추복(追復)시켜 예장(禮葬)을 허락하고 온 나라의 신서(臣庶)에게 포고하여 전하의 우애있는 본심을 밝히소서.” 라고 극언하였고, 또,“의(㼁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이름)가 이미 죽었는데 전하께서는 대비에게 다시 무슨 의심을 품으십니까? 만일 간사한 무리 가운데 양궁(兩宮)을 이간하는 자가 있다면 해당 관리에게 명하여 큰 죄로 다스리게 하고, 전하께서도 또한 자식의 도리를 다하여 대비의 환심을 사도록 힘쓰소서. 얼마 전에 정조(鄭造)ㆍ윤인(尹訒)ㆍ정호관(丁好寬) 등이 선두로 모후를 폐위하자는 의논을 제기하여 자신의 부귀를 도모하였으니, 신하로서 차마 못할 이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청컨대 이 세 사람을 죄주어서 삼강(三綱) 오상(五常)의 도(道)를 바로잡으소서.” 하니, 소가 수백 자에 이르렀다. 이 소가 올려지자 실색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더러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폐주는 대로하여 승정원에 내려 보내고, 흉소(凶疏)를 물리치지 않고 그대로 상달하였다 하여 승지 가운데 상납을 주관한 자를 먼저 파직하고 다른 승지들도 아울러 추고하였다. 이에 삼사가 외딴 섬에 안치하자고 청하였는데, 폐주는, “지난날 상국(相國) 이덕형(李德馨)이 차자(箚子)를 올렸을 때는 그다지 잘못된 말이 없었는데도 삼사가 안법(按法)을 청하였는데, 오늘날 정온이 올린 소는 그 말이 너무 무도한데도 안치로써 죄를 청하였으니, 임금을 무시하고 당을 두둔함이 이처럼 심하단 말인가?” 하였다. 삼사가 다시 안법할 것을 청하였을 때에도 폐주의 분노는 풀리지 않았으나, 간하는 자를 죽였다는 여론이 싫어서 짐짓 여러 대신들로 하여금 의논을 교환케 한 다음, 그 의논을 빙자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이때 우의정 정창연(鄭昌衍)은 이를 반대하여 논쟁하였고, 원임 대신 이원익(李元翼)ㆍ심희수(沈喜壽) 등은 모두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때마침 대례(大禮)가 있어서 대신들마저 반대하므로 바로 국문을 못하였다. 때문에 화가 조금 누그러졌으나 시의(時議)는 더욱 비등하여 대역(大逆)의 죄로 논하였고, 또 관학(館學)의 생도들을 시켜 상소하여 죄줄 것을 청하였으며, 정인홍 또한 차자를 올려,“그의 말이 무도하므로 반드시 처형하여 이의를 제기하려는 신하들을 길들여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폐주는 매우 기뻐하며 정국(庭鞠)을 하려 하니,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이,“정온은 광망(狂妄)함에 불과할 뿐 별다른 죄가 없으므로 국문을 하여서는 아니 되옵니다.” 하였다. 폐주가 노하여,“그렇다면 국문을 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하자, 기자헌은,“아니 되옵니다.” 하였다. 폐주가,“그러면 안문(按問)도 않겠다는 말인가?” 하자, 기자헌은 또,“아니 되옵니다.” 하고, 또,“이것은 반역의 큰 죄가 아니므로 아직 미루어 두었다가 우의정이 출사(出仕)한 뒤에 논의해야 되옵니다.” 하였다. 폐주는 할 수 없이 국문은 못하고 안문만 한 다음 다시 가두었다. 이해 7월에 가서 다시 안문하여, 제주도 대정(大靜)에 안치(安置)시키라고 명하였다.공이 3월에 체계(逮繫)되어 7월에 이르러 비로소 출옥하니, 옥에 갇힌 채 이미 봄, 여름이 흘러갔다. 경성(鏡城) 부로들이 이 소문을 듣고, “이분은 지난날의 어지신 원님이다. 우리 백성들이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의리상 저버릴 수 없다.” 라고 탄식하며 찾아와 어려움을 도왔고, 호남 선비 송흥주(宋興周) 등이 또 소를 올려 무죄함을 말하였다. 이때 공을 올바르다고 하는 자는 모두 견책을 받고, 공을 모함하는 자는 연이어 높은 벼슬을 얻으므로 앞을 다투어 서로 옭아매니, 위화(危禍)가 날로 박두하였으나 공은 걱정하는 기색없이 언제나 태연하였다. 정신(庭訊)을 할 때 폐주가 크게 노하여 기다리므로, 좌우가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공은 사색이 흐트러지지 않고 강개함이 더욱 절실하였다. 이때 정항(鄭沆)은 대옥(對獄 대질 심문)에서 벌벌 떨며 어쩔 줄 몰라 하였는데, 출옥하고 나서는 사람을 보내어 사과하고 그 길로 화병이 나서 죽었다. 정호관(丁好寬)도 그 소를 보고 깊이 뉘우쳐,“나는 죄인이 되었다.” 하고, 날마다 밥을 굶고 술만 마시다가 그 길로 술병이 나서 죽었다.대정(大靜)은 저 멀리 남해의 외딴 섬이다. 서울에서 해남까지만도 1천 리인데, 출옥 후 이틀의 길을 하루에 걷다시피 하여 6일 만에 해남(海南)에 도착하고, 19일간 순풍을 기다리고, 출항 후 또 바람을 기다리다가 38일 만에야 대정현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지대가 대단히 낮고 습해서 뱀과 독충이 많고, 봄이 가고 여름이 오면서부터 더러는 장맛비가 달을 넘기고, 혹은 거센 바람과 독한 안개가 하루 사이에도 이변을 일으키며, 때로는 한겨울에도 춥지 않고 한여름에도 덥지 않은, 내륙과는 아주 다른 기후였다. 공은, “죄지은 자가 살기에 적합하구나.” 라고 탄식하고, 스스로 별호를 ‘고고자(皷皷子)’라 하였다. 공이 득죄하고는 용사하는 자들이 더욱 날뛰어 삼사와 관학을 시켜 날마다 논박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해 9월에 궐하(闕下)에서 소를 불사르고, 훈맹부(勳盟府)에서 이름을 삭제하였다. 이언영(李彦英 이정호(李挺豪))ㆍ강대수(姜大遂)는 똑같은 논열(論列)로 죄를 받고, 오장(吳長)은 같은 무리로 지목되어 유배지에서 죽고, 박명부(朴明榑)는 금폐(禁廢)되었으며, 영남 선비로서 한마디라도 그가 억울하다고 한 자는 모두 죄를 당하니, 이에 강우(江右)의 분분한 공론이 모두 정인홍을 편들었다. 공이 정인홍에게 밉게 보이고부터는 정인홍에게 빌붙기를 앞다투는 자들이 사건을 더한층 들추어 화를 만들므로, 사람마다 눈을 바로 뜨지 못하였다. 그후에 과연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려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기자헌이 혼자서 쟁의하지 못할 것을 감안하고, 널리 신하들의 의논을 모으자고 청하다가 북녘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이어서 종실(宗室) 귀신(貴臣)이 많이 유배되었으나 끝내 폐위는 못하고 ‘서궁(西宮)’이라고 부르기만 하였다. 공이 죄를 얻고부터 수찬 윤지경(尹知敬)은 벼슬이 싫어서 술에 취해 노래나 부르며 미치광이 행세를 하였다.공은 해도(海島)에 갇혀 있으면서 마음을 다지고 행실을 가다듬어 신조가 더욱 굳어졌다. 이때 송상인(宋象仁)ㆍ이익(李瀷)도 똑같이 죄를 얻어 그곳으로 유배지를 옮겨 갔는데, 송상인은 바둑을 두고 이익은 거문고를 배워 괴로움을 달래었으나, 공은 언제나 글을 읽었다. 이에 경사(經史)를 고증하여 지난날의 명언을 뽑았는데, 고대 은 나라 말기에서 남송까지의, 어려운 환경에서 애쓰고 노력하여 올바른 삶을 잃지 않은 성인ㆍ현인 59명을 모아 《덕변록(德辨錄)》을 지었으니, 이것으로 자신을 반성하였다. 또 ‘원조자경잠(元朝自警箴)’을 지었다. 유배인에게 주는 늠속(廩粟)으로 끼니를 이어대지 못함을 걱정하여 종들을 시켜 날마다 품을 팔아 먹을 것을 구하도록 하였다. 천계(天啓) 3년(1623) 3월에 인조(仁祖)가 즉위하자, 공을 석방하여 사간원 헌납으로 삼았다. 지난날 영창대군 옥사 때 인목대비의 집안은 거의 멸족되었고, 어머니 노 부인(盧夫人)은 제주도에 유배되어 관비(官婢)로 들어갔는데, 이때에 와서 맞아들이게 되었다. 노 부인을 부르러 간 사자(使者)가 공을 찾아가서 그 사실을 갖추 말하고 또 고난을 위로하며, “왜 당장 이 가시울타리를 철거하고 하루라도 편히 지내지 않소?” 하자, 공은,“아직 명을 받지 못했소.” 하며 거절하였다가, 전지(傳旨)를 받은 뒤에 밖을 나왔다. 공이 10년 동안 울타리 안에 살면서 ‘위리망북두시(圍籬望北斗詩)’와 ‘백운가(白雲歌)’를 지었는데, 듣는 자마다 슬퍼하였다. 공이 풀려나올 때는 벌써 수염과 머리칼이 다 세었고, 바다를 건너자 우선 늙으신 어머니를 찾아갔는데, 이때 어머니의 나이는 벌써 80을 넘어섰다. 이 광경을 보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손을 잡고 웃으면서,“오늘에서야 우리 아들을 만나 보는구나.” 하고, 멀리 떨어져서 서로 그리워하던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훌륭하게 여겨,“이러한 어머니가 있은 다음에야 이러한 아들이 있을 수 있다.” 라고 칭찬하였다. 이해 5월에는 사간으로 입사(入謝)하고, 이어서 진언(進言)하기를,“《예기(禮記)》에 ‘어린애와 늙은이는 비록 자신이 중죄를 범하여도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인홍이 80이 넘은 늙은 나이로 극형을 받고 죽는다면 성상의 덕에 손상이 될까 염려되옵고, 실은 또 그의 친척들이 전가시킨 화인만큼 그 늙은이는 애처롭다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또 자신이 지난날에 죄인(정인홍을 가리킴)을 스승으로 섬긴 것을 들어 사간을 사양하였다.인목대비를 폐위할 때, 정인홍이 비록 주도는 하였으나 의논을 맡은 대신 대다수가 따르지 않으므로, 인심이 쏠리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양단설(兩端說)을 하여, “군신 모자 사이의 명의(名義)란,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이므로 바꿀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전하를 위하여 다투는 것도 이 명의를 아껴서입니다. 신은 다만 부(府)ㆍ조(曹)ㆍ원(院)이 갈리어 마치 두 조정, 두 임금처럼 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충실한 무사로 하여금 군사를 주둔시켜 지키도록 한다면 저 과부살이하는 지어미는 전하의 포용 가운데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 의논이 상달되기에 앞서 그의 측근이 모의하여 화복으로써 친척과 무리들을 동요시킨 다음 저희들 마음대로 말을 바꾸었는데, 이것이 마침내 결정되었다. 이 사실은 당시에 엿들은 자가 있었고, 또 정인홍도 베임을 당할 적에 스스로 말하려 하였다 한다. 이 때문에 공은 소를 올려 말하였던 것이다. 다음달에는 폐세자(廢世子 광해군의 아들 이지(李祬))가 땅을 파고 나온 사건이 있어서 양사(兩司)가 합계(合啓)하여 죄줄 것을 청하였다. 이때 공은 지난날 골육(骨肉)의 변을 들어 은근히 상의 마음을 감동시키려다 여러 사람의 의논을 거슬러서 곧 사직하였다. 대사헌 오윤겸(吳允謙)은,“신의 지난날의 아룀은 전하를 그르칠 뻔하였습니다. 신이 만일 아무 것도 모르고 고집만 부렸더라면 신은 정온의 죄인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라고 인피(引避)하고 물러났다. 이해 6월에는 남원 도호부사(南原都護府使)가 되었고, 겨울에는 통정(通政)에 특가되어 이조 참의가 되었다.이듬해 1월에는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에 침입하니, 상은 공주(公州)로 행행하였다. 이괄은 2월에 패전하여 죽었다. 상이 다시 서울로 환가하면서 호종하던 여러 신하에게 상을 내리는데, 공에게는 가선(嘉善)으로 올려 형조 참판을 제수하였다. 이때 조상 3대(代)의 작위(爵位)를 추증받았다. 늙으신 어머니 때문에 사양하고 돌아갔다가 이해 겨울에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이때 상변사(上變事)가 있었는데 죄수들 가운데 또 어떤 자가 인성군을 끌어 대어, 그가 계획을 알고 있었다 하므로 삼사(三司)가 안법(按法)을 청하였다. 공이 전은(全恩)의 논을 주장하였으나 의견이 합치되지 않자, 이어 아뢰기를, “의리의 적부와 형적의 허실도 규명하지 않고 외곬으로 옥사(獄辭)로만 다룬다면 고변(告變)은 없는 해가 없을 것입니다. 인성군을 제거한다 하더라도 어찌 인성군과 같은 자가 또 없겠습니까. 아, 선왕의 자손은 다 없어지겠습니다. 폐조(廢朝)가 혼란하였어도 골육(骨肉)을 죽이고 모후(母后)를 폐위하지만 않았더라면 전하와 같은 성덕으로도 하루아침에 이 자리에 오르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삼사의 청은 뒷날 간사한 무리들이 구실 삼을 자료가 되기에 알맞을 뿐이요 국가를 위한 장구한 계획은 못 됩니다. 후인이 오늘날을 보는 것도 오늘날 우리가 지난날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고, 바로 대사간에서 체직되어 돌아갔다.이듬해 3월에 다시 대사간으로 부르니, 7월에 입사(入謝)하였고 얼마 후 승정원 도승지로 옮겼다. 승정원 전례에 따르면, 승지는 동부승지에서부터 차례로 올라가게 되어 있으므로 이때 사간원에서 바로 도승지를 제배한 것은 특은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은 전례를 들어 굳이 사양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고 얼마 후 휴가를 주어 돌아가게 하였다. 9월에 또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와서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돌아가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고 어머니를 모셔다 봉양하라 하였다. 공은 소를 올려 사양하고, 이어서 오랫동안 시론의 배척 대상이었으므로 의리상 구차히 나올 수 없다고 하였다. 이때 어떤 재상이 유능한 인재가 많이 억눌려 있으니 서얼의 출셋길을 터 주자고 건의하였고, 또 변방의 군사는 부족한데 속(粟)을 바침으로 해서 유정(遊丁)이 많으니 속바친 유정을 모두 징발하여 변방을 지키도록 하자고 건의하였으나, 공은 이는 명분을 무너뜨리고 신의를 잃어 백성들에게 원망을 사게 된다고 역설하였다. 이때 서얼이 방자하여 사대부가 모두 분노하므로, 억제의 수단으로 계세법(計世法)을 만들었다. 이듬해 봄에는 말미를 주어 돌아가게 하였는데, 서울을 떠나면서 소를 올려 자신의 사정을 진술하고, 이어 사친(私親)을 위하여 복 입는 예를 논하여 여러 신하의 말을 받아들이라고 청하였다. 이때 계운궁(啓運宮 인헌왕후(仁獻王后)의 궁호)의 초상이 났는데 상이 삼년복(三年服)을 단행하자 신하들이 여러 차례 반대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소에서 언급한 것이다. 이해 4월에는 계운궁의 장례(葬禮) 때문에 왔다가 형조 참판에 제배되었고, 얼마 후 대사헌으로 옮겼는데, 차자를 올려 백성들의 고난을 말하였다. 이때 호조에서 경비의 고갈로 토지 4결(結) 마다 베(布) 1필(匹) 씩을 더 바치도록 하여 베 1필 값이 벼 4석(石) 값이나 되므로, 공은 농업을 해치고 백성에게 피해가 된다고 역설하며 나라의 근본이 흔들릴까 걱정하였다. 다음달에는 공이 노모를 받들어 있다 하여 상이 특별히 영남 관찰사에 임명하였다. 이때 억울한 옥사(獄事)를 처리하게 되어 그곳까지 가서 사건을 안핵(按覈)하였는데, 계문(啓聞)하자 이를 못마땅히 여기는 자가 있어서 다른 일로 탄핵하였다. 그해 겨울에는 다시 대사헌에 제배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1627) 1월에는 오랑캐(후금(後金)을 가리킴)가 함경ㆍ평안도의 국경을 침범해 왔다. 이는 우리나라가 중흥(中興)한 이래로 오랑캐와 화친을 끊고 병력을 중강하므로, 그들은 우리가 싸움으로써 버틸 계획에서라고 여겼고, 또 한편 어떤 이간자가 명 나라에 원병(援兵) 가 있는 강홍립(姜弘立)에게, “홍립의 늙은 어머니와 처자식들이 벌써 죽임을 당하였다.” 고 말하니, 홍립은 매우 원망하며,“조정에서 벌써 나를 저버렸다.” 하고, 오랑캐를 선도하여 침입한 것이라 한다. 관서 절도사 남이흥(南以興)은 패전하여 죽고, 평양(平壤)이 함락되었다는 파발이 들어오자, 상(上)은 강화도로 출행하고 세자는 분조(分朝)하여 남으로 내려갔다. 이때 사대부가 대부분 삼남(三南) 사람이어서 분조로 따라가려는 자가 많았고, 젊은이로서 남다른 공을 세워볼까 하여 따르려는 자들이 앞을 다투었다. 분조를 하고나서 행재소(行在所)는 바다를 사이한 매우 먼 곳이므로 그 사이에서 간사한 무리들이 이간질을 하고 인심은 몹시 어수선하였다.공이 난리 소식을 듣고 호남으로 들어서니 인심은 술렁이고 오가는 말에, 오랑캐가 벌써 길을 막아 강도까지는 도저히 갈 수 없으니, 분조로 가는 것이 가깝고 편리하다고 하였다. 공은, “임금이 난리를 당하였는데 보고만 있는 것은 신하의 의(義)가 아니다.” 하고, 곧장 행재소로 달려가니 듣는 자마다 의롭게 여겼으며, 당시의 인심은 그에게 기대어 안정의 지표로 삼았다. 오랑캐가 화친을 요구하면서 왕자와 중신을 볼모로 삼기를 주장하며 강홍립을 보내오자, 공은 소를 올려,“홍립은 의리와 나라를 저버린 자이므로 마땅히 목을 베어야 되며, 또 오랑캐와 화친을 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하고, 이어서 우리나라의 병력과 형세를 논술하면서,“다만 전하께서 확고부동한 마음이 없고 신하들 가운데 스스로 책임질 만한 자가 없을까 염려되옵니다.” 하였다. 이해 3월에 오랑캐는 화친의 맹세를 체결하여 갔고, 공은 동지중추부사에서 한성부 우윤으로 옮겨 서울에 들어왔다. 얼마 후 병조 참판이 되어 행재소로 돌아갔다. 이해 4월에는 거가를 따라 서울에 돌아와서 소를 올려 귀양(歸養)을 빌었으나, 상이 머물러 있으라고 만류하였다. 5월에는 어머니의 병 때문에 돌아갔고, 그후 수년 동안 도승지ㆍ대사간ㆍ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기사년(1629, 인조7) 4월에는 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한 번 입사(入謝)하고 돌아갔다. 이듬해 3월에는 태묘(太廟)의 나무가 벼락을 맞아 상이 자신의 허물로 돌려 바른말을 구하니, 공은 소를 올려, “신은 듣건대, 옥형(獄刑)이란 천하의 대명(大命)입니다. 옥형이 정당성을 잃으면 원기(寃氣)가 생기고, 이 원기가 천지의 화기를 해쳐 수한(水旱)의 재앙을 부르게 됩니다. 반정하신 뒤 사방으로 유배시킨 자가 모두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죄인이 많은 것은 국가의 복이 못 됩니다. 한 지아비가 가슴을 두들겨도 5월에 서리가 내리고, 한 지어미가 원한을 품어도 3년의 가뭄을 이룬다고 하였는데, 더군다나 온 나라를 둘러 볼 때 가슴을 두들기고 원한을 품은 자가 한 지아비 한 지어미뿐이 아님에리이까.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죄인 가운데 놓아주어야 할 자는 모든 혐의를 깨끗이 씻어 주어 한스러운 바가 없게 한다면 이것이 곧 재앙을 더는데 도움이 됩니다. 아아, 보통 사람이라도 죄 없는 자는 이렇게 해야 되는데, 더군다나 선왕의 아들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공(珙)의 무죄함은 신이 지난번에 벌써 진술하였습니다. 설사 공의 반역 사실이 드러났다 하더라도 다만 외진 섬에 안치시키고 죽지 않도록 보살펴 주었다면, 전하께서 죄인을 벌주고 친척을 사랑하는 그 도리를 아무 손색 없이 함께 이루었을 것입니다. 신은 전하를 위하여 적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는 어쩔 수 없지만 그의 늙은 아내와 어린아이를 아직도 외진 섬에 두어, 좋은 의복 좋은 음식으로 자라난 몸으로 하루아침에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울부짖어도 돌보지 않으니, 어찌 온 생민이 다 없어지는 데까지 이르지 않겠습니까. 하늘과 사람이 서로 관계하는 즈음이란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입니다. 사람의 일이 아래에서 잘못되면 하늘의 이변이 위에서 대응합니다. 전하께서 골육을 이처럼 대우하였으니 이번 재앙의 발생은 괴이쩍다 할 만한 것이 못 됩니다. 만일 고쳐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재앙이 없을 때가 없어서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할 것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지금이라도 원한을 풀어 주고, 봉작(封爵)을 되돌려 주고, 자녀들을 불러다 혼기(婚期)를 놓치지 않도록 하기 바라옵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전하께서 너그러이 받아들여 그 어머니를 풀어 주었으나, 어머니는 늙고 아들은 병들어, 서로가 울며불며 헤어지지 않으려고, 실정을 진술하며 머물러 있기를 빕니다. 신은 이 말을 듣고 전하의 어짊을 되새기며 그들의 차마 헤어지지 못하는 심정을 슬퍼합니다.” 하였다. 이에 양사(兩司)가 번갈아 논하기를,“터무니없이 재앙을 끌어 대어 시비(是非)를 현란시켰다.” 고 탄핵하였다.이때 어머니의 나이는 93세이고 공의 나이는 62세였다. 자신이 귀하게 되었으나 몸소 어머니를 봉양하는데는 몸이 늙었다 하여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지를 않았다. 형과 아우 두 사람이 똑같이 늙었는데 서로 우애가 두터웠다. 이해 7월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 예(禮)를 벗어나 몸이 여위도록 슬퍼하였고, 장사를 지내고는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하며 드나나나 울먹이니, 이 광경을 보고 어진 이는 모두 예절에 훌륭한 군자라 하고, 어질지 못한 자는 물러가 스스로의 과거를 반성하며 행여 효도를 못다 할까 염려하였다. 어머니의 묘가 가조(加祚)의 용산(龍山)에 있는데, 역동(嶧洞)에서 70리이며, 지금은 그 산 밑에 용천정사(龍泉精舍)가 있다. 공이 일찍이, “옛사람이 ‘봉양함에 있어서는 뜻을 잘 따르는가를, 초상에 있어서는 슬퍼하는가를, 제사에 있어서는 공경은 물론, 철 따라 제사하는가를 보라.’라고 한 이 세 마디 말의 실천을 내가 일찍이 선군자(先君子)에게서 보았고, 또한 선군자에게 배웠다.” 하였다.숭정(崇禎) 5년(1632, 인조10) 6월에 인목왕후가 승하(昇遐)하여 10월에 혜릉(惠陵)에 장사 지내, 공이 어머니의 삼년복을 벗고 입림(入臨)하니 벌써 발인(發引)하였으므로 그냥 돌아갔다. 이해 11월에는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고, 이듬해 봄에 또 대사헌으로 부르니 3월에 입사(入謝)하였다. 이때 사사로운 감정으로 상변(上變)한 자가 있었는데, 공은 그를 논하여 무고 입은 사람을 모두 놓아주고 상변한 자도 무죄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끝까지 다투었다. 4월에는 왕세자(소현세자)의 가례(嘉禮) 때문에 상이 창경궁(昌慶宮)을 중수하라고 명하는데, 공이 안 된다고 하니 상도 이 말을 받아들였다. 5월에는 대호군(大護軍)에 제배되매 진정하여 물러가기를 빌었으나 상은 윤허하지 않고 말미를 주었다. 이해 가을에 인정전(仁政殿)에 벼락이 떨어졌는데, 공이 집에서 봉사(封事)를 올려 임금의 덕(德)을 논하면서 재앙에까지 언급하였다. 숭정 7년(1634, 인조12) 봄에는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고, 여름에는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가을에는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상이 왕위를 이어받은 이후 다수의 공신이, 상이 국가를 중흥시킨 공덕은 지난날의 제왕들보다 뛰어났으니, 아버지와 어머니를 추존하여 종묘에 배향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명 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이미 봉호와 시호를 추존하고 바야흐로 종묘에 배향할 전례(典禮)를 논하는데, 반론을 제기하는 자는 모두 죄를 얻게 되어 대신들이 벼슬을 버리고 떠나갔고 공은 마침 간관(諫官)이 되었으므로, 모두 공의 말 한마디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9월에 공이 용인(龍仁)에 이르렀을 때 다시 도승지로 옮겼는데, 입사하자 곧 소를 올려 돌아가기를 구하였고, 또 종묘에 배향하는 것이 잘못된 예(禮)임을 논하며,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본디 미천하다가 드러나게 귀히 된 자는 아버지를 위하여 시호를 올리지 못한다.’라고 하였는데, 선유(先儒) 여중(呂仲)의 해설에 ‘아버지의 벼슬은 낮아서 시호를 올릴 수 없는데 자신의 벼슬이 시호를 올릴 수 있다 하여 아버지의 시호를 올린다면 이는 자기의 벼슬로써 아버지에게 올리는 것이 되므로, 높인다는 것이 도리어 낮추는 결과가 되니, 어버이에게 공경을 다하는 도리가 못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시호를 추존한 일도 지당한 도리가 아닌데, 또 예 아닌 예로써 여러 제왕의 반열에 올리려 하십니다. 지난날 한(漢) 나라 선제(宣帝)가 낳아 주신 부모(父母)의 시호를 추존함에 있어 ‘도고(悼考)’ㆍ‘도비(悼妃)’라고 원읍(園邑)에 그대로 두었을 뿐, 종묘에 배향시켰다는 말은 못 들었고, 애제가 생부모 정도 공황(定陶恭皇)의 호를 높임에 있어서도 본래의 왕호인 ‘정도’ 두 글자만 떼어 버리고 ‘공황’이라 하여 경사(京師)에 공황묘(恭皇廟)를 세웠을 뿐, 종묘에 배향시켰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는 4친(親)의 사당을 장릉(章陵 광무의 할아버지 능)에 옮겼으나 시호는 올리지 않았으니 어찌 종묘 배향을 논한 적이 있었겠습니까. 호인(胡寅)은 ‘왕망(王莽)이 찬탈할 때 한 나라 복이 이미 끊어졌는데, 광무제가 화란을 소탕하고 분연히 나라를 일으켜 세웠으니, 한 고조(漢高祖)를 시조(始祖)로 삼고 4친을 제왕으로 추존하더라도 의리상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었지만, 장순(張純) 등의 반대 건의를 한 번 듣고 단호히 받아들였으므로, 후일 장릉의 사당은 차등이 없게 되었다. 따라서 부모에 대한 보답이 적다는 당시의 나무람도 없었고, 예에 어긋났다는 후세의 비난도 나오지 않았으며, 반면에 선제ㆍ애제의 잘못은 더욱 밝아졌다.’라고 논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본받아야 할 광무제의 법은 본받지 않고 선제ㆍ애제도 하지 않던 것을 하려고 하시니, 천지와 같이 관대한 전하이시지만 신은 서운함이 없을 수 없습니다. 송(宋) 나라 구양수(歐陽脩)가 맨 먼저 칭친(稱親)의 논을 제의하였을 때, 여회(呂誨)가 사특한 의논으로 지목하여 처벌하기를 청하였으니, 옛사람들은 대(代) 잇는 체통과 조종(祖宗) 높이는 의리를 이처럼 엄중히 하였습니다. 신의 소견에는 사당을 따로 세워 봉향하되 종묘와 구별되지 않게 한다면 이것만으로도 전하께서 어버이를 높이고 선양하는 도리를 다한 것인데, 하필 지나치게 높은 예로 더 올려서는 안 되는 위치에 올려 높이려는 것이 도리어 낮추는 결과가 된다는 비난을 입으려 하십니까?” 하였다. 또,“선제(宣帝)와 광무제(光武帝)는 다같이 손자로서 왕통을 이었으나 《통감강목(通鑑綱目)》에 그 어버이를 종묘에 안 모신 것을 들어 평하지는 않았고, 선유(先儒)들도 광무제가 네 사당에 차등이 없게 한 일을 좋은 일로 여겼습니다.” 하였다. 소는 들어갔으나 비답이 내려오지 않자 이에 연이어 사직을 청하였는데, 도승지에서 체직되자 바로 동지경연사에 제수되니, 또 굳이 사양하여 소를 세 번 올리고 바로 돌아갔다.숭정 8년 봄에는 상변(上變)이 있어 옥사(獄事)의 연루가 공에까지 미치니, 상이 국문을 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나 공은 자진하여 대명(待命)하였다. 그후 한 달 남짓해서 대사간에 제수되었는데, 입사(入謝)하자마자 끊임없이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이해 6월에는, 이에 앞서 3월에 목릉(穆陵)ㆍ유릉(裕陵)이 똑같이 벼락으로 붕괴되었는데, 대신들이 봉심(奉審)하고 이 사실을 주달하니, 공신들이 다시 대신들과 모의하여 벼락에 무너진 것이 아니고 비에 무너진 것이라고 하여, 반대로 능 참봉(參奉) 홍유일(洪有一)이 무망(誣罔) 죄를 얻게 된 일이 있었다. 이때까지 이 두 능을 보수하는 일이 완료되지 않았는데, 예조에서는 좋은 날을 받아 경례(慶禮)인 장효왕(章孝王 원종(元宗)의 시호)의 종묘 배향을 먼저 시행하려고 하므로 공은 봉사(封事)를 올려 대신의 허물을 나무라고, 또 지척하기를, “선공 제조(繕工提調) 신경진(申景禛), 예조 판서 구서봉(具瑞鳳)이 선왕의 은혜를 저버리고 재앙을 숨겨 전하를 허물에 빠뜨렸다.” 고 하였다. 이어 죄인을 다스리는 과정에서 잘못된 점이 많음을 논하고, 길(佶)ㆍ억(億)ㆍ건(健)의 무죄함까지 언급하여 골육지친의 목숨을 어여삐 보살피라고 하니, 이 말이 시의(時議)에 거슬려 양사가 한 달 여를 번갈아 논핵하였으나 상(上)이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길로 얼마 동안 녹(祿)을 받지 않자, 상이 호조를 시켜 쌀과 반찬을 보내어 생계를 돌봐 주라고 하였는데, 공은 또 사양하기를,“이는 전하께서 신하를 염치로써 대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얼마 후 예조 참판으로 옮겼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이때 또 큰 바람이 불어 종묘(宗廟)와 사직단(社稷壇)의 많은 나무가 뽑혔으므로 공이 소를 올려 재앙의 까닭을 논하였는데, 민생의 고난과 후원(後園)의 오락까지 결부시켜 말하니, 상은 좋게 비답하고, 기내(畿內)ㆍ관동(關東)의 양전(量田)을 파하며 풍년이 들 때까지 기다리라 하였다. 상이 경연에 나아갈 때 공이 입시하였는데, 상이, “정경세(鄭經世)는 이미 죽었고 장현광(張顯光)도 늙었으니 경은 돌아가서는 안 되오.” 하였다. 공이 또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이어서 재앙의 까닭에 대하여 응대하는데, 삼남(三南) 지방의 양전 가운데 기만(欺瞞)이 많은 것까지 결부시켜 말하였다. 그달에 부제학으로 옮겼는데, 연이어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셋째 소에서는 붕당(朋黨)의 폐단을 극단으로 말하여,“전고(前古) 이래, 이처럼 붕당이 심하고도 나라를 망치지 않은 적은 없었습니다.” 하였고, 또,“지난날 송 신종(宋神宗) 때 범진(范鎭)의 나이는 63세, 여회(呂誨)의 나이는 58세, 구양수(歐陽脩)의 나이는 62세, 부필(富弼)은 68세, 사마광(司馬光)과 왕도(王導)는 똑같이 50세였으나, 혹은 치사(致仕)하고, 혹은 병을 핑계하고, 혹은 한산한 벼슬자리를 찾아갔으니, 이들은 모두 시의에 용납되지 않아서 치사할 나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돌아갔습니다. 신은, 나이는 벌써 그들보다 더 많고 시의에 용납되지 못함은 더욱 심하여, 신이 서울에 온 지 여섯 달 동안 탄핵의 대상이 된 것이 석 달이었고, 예조에 있은 지 한 달 남짓에 또 공격을 받고 있으니, 구차스러이 어물어물하다가는 끝내 낭패하여 비록 포만죄(逋慢罪)를 씌우더라도 신은 사양하고 물러가지 못할까 염려되옵니다.” 하고, 이로부터 돌아가기를 더욱 힘써 구하였다.이해 9월에는 사간 조경(趙絅)이 대신의 토색 행위를 말하다가 죄를 얻게 되었으므로 공이 차자를 올려 용서를 빌었는데, 상이 이 말을 받아들였다. 언젠가 소대(召對)에서, “전하께서 경연(經筵)을 게을리 하셔서 날이 갈수록 처음만 못합니다.” 하니, 상은,“힘써 보리라.” 하였다. 그후 경연(經筵)에서는 《시경(詩經)》 제풍(齊風)의 동방미명장(東方未明章)을 강론하고 사퇴하면서 말하기를,“예(禮)에 임금이 허물이 있으면 신하는 기탄없이 비난과 풍자를 가하여야 되므로, 옛적에 비방목(誹謗木)을 세운 것이 역시 이 뜻입니다.” 하고, 연이어,“삼남(三南) 지방은 양전(量田) 때문에 원망이 많은데, 또 조세를 먼저 매기면 삼남 백성의 원망은 더욱 많을 것입니다.” 라고 논쟁하였다. 이 일로 호조 판서 최명길(崔鳴吉)과는 상 앞에서 논쟁하기까지 하였으나, 호조에서는 벌써 새로 정한 결(結) 수를 반포하였다. 공이,“이 법은 의정부가 이미 한때만 시행하기로 온 나라 백성들과 약속한 것이오.” 라고 항의하자, 최명길은,“당초에 그런 약속은 없었소.” 라고 변명하였다. 공이 다시 캐물어도 명길은 또 숨겨, 끝내 결판을 짓지 못하고 밖에 나와서 사실을 물어본바 공문이 벌써 두 차례나 내려졌다. 공은 또 소를 올려 말하였으나 대신들이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다시 소를 올려,“한 국가의 정사를 어느 곳은 먼저하고 어느 곳은 뒤에 하며, 한 국가의 조세를 누구에게는 가볍게 매기고 누구에게는 무겁게 매길 수 없는데, 명길이 기어코 삼남 지방에 조세를 먼저 매겨 삼남의 민심을 잃으려고 합니다. 오늘날 남쪽 오랑캐가 틈을 열어 공갈(恐喝)이 날로 이르고 있으니, 우리가 미리 생각해서 세워야 할 좋은 계획은 오직 민심을 뭉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모사하는 신하들은 도리어 독기 서린 압력으로 백성들을 죄니, 백성들이 흩어져 가고 나면 병기(兵器)가 있다 한들 누구와 방어하며 성지(城池)가 있다 한들 누구와 지키겠습니까?” 라고 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자, 드디어 돌아갔다. 떠나면서 또 소를 올려,“풍환(馮驩)은 맹상군(孟甞君)의 일개 식객이었으나 채권을 불살라 설(薛) 땅 백성으로 하여금 맹상군을 따르게 하였는데, 더군다나 신은, 사람됨은 풍환만 못하면서 받은 은혜는 식객을 훨씬 넘어섰음에리이까. 맹자의 말에 ‘대우하는 예는 줄어들지 않았어도 말이 합치되지 않으면 떠나간다.’라고 하였습니다. 옛사람들이 임금을 섬김에 있어 뜻이 합치되지 않아서 떠나간 이가 한두 명이 아닙니다. 은혜 저버린 벌을 씌운다 해도 신이 후회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하의 은혜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국가에 어떤 위급한 일이 있다면 신은 어려움에 뛰어들어 죽겠습니다.” 하였다. 고향에 돌아가서는 다시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베옷을 입고 나물 반찬을 먹으며 스스로 시골 선비와 같이 하여 현달한 사람 같지 않았다.9년 1월에는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초상에 입림(入臨)하니, 지난해에 조정을 떠난 뒤 아직도 작록(爵祿)이 그대로 있어서 소를 올려 거절하였다. 2월에는 예조 참판에 제수되고, 얼마 안 되어 대사간에 옮겨져 앞뒤로 누차 사양하였으나 승정원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시 소를 올려 충정을 진술하니, 이때 노장(虜將 청 태조(淸太祖)를 가리킴)이 참람되이 위호(位號)를 고치고 사신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 소에서 또, “답서(答書)는 반드시 준엄하게 거절하여 우리를 구실로 삼음이 없도록 하옵소서. 서달(西㺚 청(淸) 나라)이 중국을 갓 배반하였으니 부모의 적입니다. 자식된 입장에서 관문을 닫고 거절은 못하였으나, 오랑캐를 대하던 그대로 맞고 그 소종래는 묻지 않는다면 그들이 겉으로는 성난 기색을 보여도 속으로는 반드시 ‘그 나라에도 사람이 있구나.’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해 3월에는 부제학으로 옮겨졌는데, 차자를 올려 맨 먼저 임금의 덕(德)을 말하고, 이어서 당시의 극심한 폐단까지 언급하였고, 또,“공신이 병권(兵權)을 잡아 국가 방어는 생각하지 않고 기찰만 날로 더 엄밀히 하므로, 장사(將士)들이 사기가 떨어져 숨만 헐떡이고 쳐다만 보며, ‘공이 있어도 죽고 공이 없어도 죽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때문에 남이흥(南以興)이 죽을 적에 한탄하며 ‘내가 장수로 변방에 있으면서 군사의 훈련도, 적과 싸움도 한번 못하고 끝내 실패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이는 비통한 말입니다. 오늘날의 도(道)를 말미암으면서 오늘날의 폐단을 고치지 않는다면 비록 손무(孫武)ㆍ오기(吳起)와 같은 장수가 있다 해도 하루아침에 불러다 쓰지는 못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들로써 반정(反正)을 하시고 이들로써 나라를 망칠 것입니다.” 하였다. 여름에는 대사헌에 옮겨졌는데, 장릉(長陵 인조의 비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장례 때문에 출사(出仕)하였다가 스스로 혐의를 말하고 체직되어, 반곡(反哭)하고 나서 곧장 돌아갔다. 6월에는 이조 참판에 제수되어 7월에 부제학으로 옮기고, 9월에는 대사헌에 개임되었다가 11월에 다시 이조 참판이 되었는데 마지못해 입사하였다. 이어서 끊임없이 돌아가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고, 원객(遠客)의 대우로 미염(米鹽)을 내려 주어 가의(加意)를 보였는데, 푸줏간지기와 창고지기가 중간에서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이해 12월에 오랑캐가 대거 침입하여 몰아친 지 3일에 선봉이 벌써 봉산(鳳山)을 통과하였다. 이에 앞서 도원수(都元帥) 김자점(金自點)이 대군을 거느려 정방산성(正方山城)에 진영을 두고 험한 산세를 이용하여 자신이 직접 지켰는데, 부원수(副元帥) 신경원(申景瑗)은 나가 싸우다가 파수병을 만나 군사가 흩어지매 사로잡혔다. 상이 강도(江都)로 거둥하려고 종묘(宗廟)ㆍ사직(社稷)과 모든 비빈(妃嬪)ㆍ후궁(後宮)을 앞서 떠나보냈으나, 적이 벌써 도성(都城)에 육박하여 상이 바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나서니, 상황이 다급하여 대부분의 관원들이 도보로 뒤를 따랐고 더러는 도중에서 도망쳤다. 이때 신경진(申景禛)이 정병 수천 기(騎)를 거느리고 지나가다가 공을 바라보고 외치기를, “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누구의 허물이오? 공은 대신인데 어찌 한마디 말로써 국가를 안정시키지 못하오?” 하니, 공은 웃으며 사과하기를,“공은 그런 용사를 거느렸는데 적은 쳐부수지 않고 무엇에 쓰려고 하오?” 하였다. 경진이 가 버리자, 공은,“저렇게 오활할 수가.” 하였다.임금을 호위하던 군사가 연거푸 패전하여 산성이 포위된 지 40여 일이 되자, 공은 차자를 올려, “원수(元帥)의 목을 베어 장수들의 마음을 격려해 주옵소서.” 하였다. 이때 성안에서는 벌써부터 화친을 청하였으나 오랑캐가 허락하지 않았다. 최명길(崔鳴吉)이 상에게 밀계(密啓)하고 오랑캐를 찾아가기까지 하자, 공은 또 차자를 올려,“항간에서 수군거리기를 어젯밤 사신이 갖고 간 국서(國書)에 ‘신(臣)’이라고 일컬었다 하니 이는 통곡할 일입니다. 전후의 국서가 모두 최명길의 손에서 나와 그 비열하고 위축된 말은 실로 항서(降書)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신이라고 일컫지는 않았는데, 이제 신이라고 일컫는다면 이는 임금과 신하입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가 되고 나서 그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나라는 망할 것입니다. 명길의 생각으로는 한번 신이라고 일컬으면 성의 포위도 풀리고 군부(君父)의 신변도 온전할 것이라고 여긴 것이니, 이는 아녀자나 내시(內侍)의 충성과 다름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절대로 그렇게 될 리가 없음에리이까. 예로부터 영원히 멸망하지 않은 국가는 없었습니다. 오랑캐란 만족이 없어서 항복하여도 망하고 항복하지 않아도 망할 것이니, 어찌 예의를 지켜 사직과 운명을 같이하는 것만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군신 부자가 힘을 합쳐 성을 의지하고 싸운다면 완전히 보전할 수도 있음에리이까. 우리와 천조(天朝)는 부자지간의 은의가 있으므로 의리상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오랑캐가 우리 국서를 받고 나서 화친에 반대한 자를 문책해야 된다고 주장하는데, 공은 이 소식을 듣고 찾아가기를 자청하였다. 이에 대신들이 일을 의논하러 드나드는데, 밤이 되어 군사들이 화친에 반대한 자를 찾아 분풀이를 한다고 소란을 피우니, 이들은 모두 3대장의 휘하 군사였다. 유독 수어병(守禦兵)만 움직이지 않았는데, 수어장(守禦將) 이시백(李時白)은,“내가 군중에 금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 군중에서 소란 피우는 자를 따르는 군사가 없어서였다.” 하였다. 앞의 3대장은 삼수(三手) 신경진(申景禛), 총융사(摠戎使) 구굉(具宏), 어영장(御營將) 원두표(元斗杓)였다.이튿날 최명길이 화친을 반대한 신하 십여 인의 이름을 차례로 적어 다시 오랑캐를 찾아가려 하였는데, 어떤 이가 상에게 아뢰기를, “이상 여러 신하는 다같이 한때 인망 높았던 사람이므로 인심이 따르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여, 상은 즉각 취소하라고 명하였다. 강도가 함락되어 유도대장(留都大將) 김상용(金尙容)은 불을 질러 자살하고, 여러 왕자, 비빈과 종실, 대신의 처첩 자녀는 모두 사로잡혀가고, 그 나머지는 거의 다 죽임을 당하였다는 말을 듣고, 성안은 더욱 투지가 없어졌으며 오랑캐가 더욱 육박하자, 최명길이 다시 오랑캐를 찾아가 내일로 행차가 성을 내려올 것이라고 약속하니, 공은 노하여,“나라가 망한다 하여도 임금이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것을 내 수치로 여기노라.” 하고, 칼을 뽑아 스스로 찌르니 칼날이 뱃속까지 들어갔다. 성안 사람이 모두 크게 놀라며, 그 의리를 슬피 여기지 않은 자가 없었고, 상은 어의(御醫)를 시켜 치료하도록 하고 관할 관원에게 잘 보살펴 죽지 않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성을 나올 무렵에 공은 까무라친 채 목숨이 끊어지지 않아 오히려 고개를 쳐들고 부르짖으며,“명길이 전하로 하여금 항복하게 하였으니, 오랑캐는 앞으로 지난날의 약속을 고쳐 우리 옥새(玉璽)를 요구할 것입니다. 이 옥새는 명 나라에서 받아 3백 년을 지녀왔는 바, 천조(天朝)에 바쳐야 마땅할 것이요 오랑캐에게 허락할 수는 없습니다. 또 왕사(王師 명(明) 나라 군사를 가리킴)를 치는 데 도움을 구할 것입니다. 명 나라가 우리에게 부자의 의가 있는 것은 오랑캐도 알고 있는 바, 아들이 아버지를 쳐서는 안 되고 또 치라고 가르쳐도 안 됩니다. 오랑캐가 아무리 흉악하다 해도 강요할 말은 없을 것입니다. 이 두 가지로써 겨룬다면 후세에 죄는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2월에 고향으로 실려 가서 탄식하기를,“주상이 욕을 당하였으니 신하가 죽는다 하여도 이미 늦었다. 다시 무슨 마음으로 남들과 함께 나라에 조세를 바치며 처자식의 봉양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금원산(金猿山) 골짜기에 들어가서 초가집을 지어 ‘구소(鳩巢)’라 부르고 산을 일구어 차조를 심어 생계를 자급하였다. 이때 국가에서 황명(皇明)의 정삭(正朔)을 쓰지 않았으므로, 해가 바뀔 때마다 새 책력[曆]을 보지 않고, 세속과 발길을 끊은 채 꽃 피고 풀 자라는 것으로 계절을 짐작하였다. 산속에서 산 지 37갑자(甲子 1갑자는 60일)에 생을 마치니 숭정(崇禎) 14년 신사(1641, 인조19) 6월 21일이었다. 지난해 5월 4일에 정부인(貞夫人) 윤씨(尹氏)가 죽어 거창(居昌) 주곡(主谷)에 매장하였는데, 이듬해 1월에 합장(合葬)하였다가 10년 후 신묘년(1651, 효종2)에 용산(龍山)으로 개장(改葬)하였다. 학사(學士) 조경(趙絅)이 말하기를,“옛말에 ‘군부는 지극히 높고 지극히 친한 사이다.’라고 하였으나 죽고 나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잊게 된다. 국가가 혼란에서 벗어난 지 벌써 오랜 세월이 흘러 관료들은 조정에, 서민은 농토에, 장사꾼은 저자에 제각기 안정되어 저마다 좋은 옷, 맛있는 음식으로 즐거움을 누렸으나, 선생은 형제를 떠나 처자를 버리고 홀로 외진 산속에서 헐벗은 옷, 궂은 음식으로 세월을 보내며, 칼을 뽑아 의리에 맹세하고도 그 자리에서 죽지 못하였던 남한산성의 과거를 늘 죄로 여겨 잠시도 잊지 않았으니, 천백 년을 훑어보아도 선생 한 분뿐이리라.” 하였다. 아아, 옛날의 성인과 현인은 그 마음은 마찬가지이나 타고난 시대가 좋은 시대냐 어지러운 시대냐에 따라 사업이 일치하지 않다. 좋은 시대를 만나면 온 세상 사람과 선(善)을 같이하므로, 덕이 만물에 미쳐 그 당시에 공업이 나타나게 되고, 어지러운 시대를 만나면 더러는 세상을 도피하여 외로운 길을 걷고, 더러는 의리를 따라 몸을 죽여 이름이 후세에 전하게 되니, 당시에 행해지나 후세에 전해지나 그 도(道)는 마찬가지이다.성인과 현인을 논해 볼 때, 덕이 성행하던 하우(夏禹) 시대에는 우(禹)는 홍수를 막고, 익(益)은 숲과 늪을 불사르고, 직(稷)은 곡식을 심었으나, 다같이 공으로 여기지 않았고, 은(殷) 나라가 망할 때 기자(箕子)는 머리를 풀어 미친 척하였고, 비간(比干)은 심장이 갈라졌고, 백이(伯夷)는 굶어 죽었지만 다같이 원망하지 않았으니, 그 사업은 같지 않으나 그 마음은 마찬가지이다. 군자가 애써 행동을 가다듬어도 더러는 도(道)에 미치지 못하고, 학자가 부지런히 학문을 강마하여도 도를 얻은 자는 드물다. 선생의 도를 가만히 살펴보면, 의리가 아니면 어울리지 않고 도가 아니면 나아가지 않으며, 의리를 보고는 망설이지 않고 큰 환란을 당하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절개를 지켜 의리를 취하고 죽음을 보람으로 여겼으며, 몸을 조촐히 하여 산속에 은거함에는, 온 세상이 다 그르다 해도 원한도 분노도 없었다. 아아, 옛날의 성인ㆍ현인과 비교해 보아도 행동ㆍ사업이 환히 드러나 자못 일월과 빛을 겨룬다. 학자들이 동계 선생이라 일컬었고, 용문서원(龍門書院) 문헌(文獻 정여창(鄭汝昌)의 시호)의 사당에 배향하였다. 아들은 정창시(鄭昌詩)ㆍ정창훈(鄭昌訓)ㆍ정창모(鄭昌謨)이고, 또 측실(側室)의 아들 정창근(鄭昌謹)이 있다. 정창시는 전 공조 정랑으로 아들 정기수(鄭岐壽)를, 정창훈은 아들 정기헌(鄭岐憲)을, 정창모는 정기윤(鄭岐胤)을 각각 두었다. 나머지 자녀들은 모두 어리다. 양천(陽川) 허목(許穆)은 행장을 쓴다. [주D-001]왜구의 침입 :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말한다. [주D-002]임해군(臨海君)을 상변(上變)한 사건 : 임해군은 선조의 첫 왕자(王子) 이진(李珒)인데, 광해군이 즉위한 해인 1608년에 윤양(尹讓)ㆍ민덕남(閔德男)ㆍ윤효전(尹孝全) 등이 그가 사사로이 군기를 저장하고 남몰래 결사대를 양성하고 있다고 고변(告變)한 사건을 말한다. 《燃藜室記述 卷19 廢主光海君故事本末 臨海君之獄》 [주D-003]봉명조양(鳳鳴朝陽) : 듣기 어려운 소리라는 뜻이다. 《당서(唐書)》 이선감열전(李善感列傳)에 “오랫동안 간쟁하는 사람이 없다가 선감이 한 번 간하자, 사람들은 ‘봉명조양’이라고 하였다.”란 말에서 기인하였다. [주D-004]정인홍의 …… 해명 : 선조 40년(1607)에 정인홍이 왕세자 문제로 유영경(柳永慶)을 탄핵하다가, 영변(寧邊)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정온(鄭藴)은 복시(覆試) 차 서울에 왔다가 함께 온 영남 선비들과 소를 올려 “왕세자는 나라의 근본이요, 인홍의 말은 나라의 근본을 위하는 도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며 해명한 일을 말한다. 《桐溪先生年譜》 [주D-005]훈맹(勳盟) : 국가에서 특별한 공훈이 있는 훈신의 명부를 작성하여 내려 주는 것으로 서맹(誓盟)에 서명함인데, 여기서는 광해군을 옹립한 훈신(勳臣)을 말한다. [주D-006]기화(奇貨) : 기화는 값진 상품이라는 뜻이다. 진 효문왕(秦孝文王)의 서자 자초(子楚)가 조(趙) 나라에 볼모로 가 있을 때, 당시 장사꾼인 여불위(呂不韋)가 “이는 기화이다. 사둘 만하다.[此奇貨可居]” 하고 천금을 뇌물로 뿌려 자초를 입국시킨 다음, 세자(世子)로 삼게 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史記 卷85 呂不韋列傳》 [주D-007]대례(大禮) : 선조(宣祖)의 소상(小祥)에 명 나라 책사(册使) 및 일본 사신 현소(玄蘇) 등이 온 것을 말하는 듯하다. [주D-008]정국(庭鞠) : 의금부나 사헌부에서 왕명에 의하여 죄인을 전정(殿廷)에서 국문(鞫問)하는 것을 말한다. 《大典會通 刑典》 [주D-009]영창대군 옥사 : 영창대군은 선조의 정비(正妃)인 인목대비의 아들 이의(李㼁)로, 광해군 5년(1613) 새재[鳥嶺]에서 은(銀) 장수를 약탈하다가 잡힌 박응서(朴應犀) 등이 이이첨(李爾瞻)의 꾐에 빠져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하여 군자금 마련용으로 도둑질을 하였다고 한 허위 진술로써 발단된 옥사를 말한다. 《燃藜室記述 卷20 朴應犀之獄》 [주D-010]상변사(上變事) : 이 상변은 선조의 서자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에 대한 상변 사건으로, 인조 2년(1624)에 그가 과거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 폐위를 주장했다고 한, 이귀(李貴)의 탄핵을 말한다. 《仁祖實錄 卷4》 [주D-011]계세법(計世法) : 대수(代數)를 세는 법으로, 인조 5년(1627)에 제정한 서얼(庶孽)의 허통(許通)에 관한 사목(事目) 가운데, 양첩의 소생은 손자에서, 천첩의 소생은 증손자에서 등용(登用)을 허용한 제도를 말한다. 《燃藜室記述 別集 卷12 政敎典故 庶孼被錮》 [주D-012]사친(私親) : 방계에서 왕위를 이어받았을 때, 그 왕의 생가 부모를 지칭하는 말이다. 《大典會通 禮典》 여기서는 인조의 어머니 인헌왕후(仁獻王后)를 말한다. [주D-013]결(結) : 수확고를 기준으로 한 농지의 면적 단위로, 1결은 1백 부(負), 1부는 10속(束), 1속은 10파(把)가 된다. 《大典會通 戶典》 [주D-014]억울한 옥사(獄事) : 경상도 관찰사 원탁(元鐸)이 예안(禮安)의 한 선비를 죄 아닌 죄로 장살(杖殺)하자, 그 아들이 각 지방에 통문(通文)을 돌려 관찰사의 잘못을 규탄하였는데, 조정에서 그가 관찰사를 범하였다 하여, 나국(拿鞠)을 집행한 일을 말한다. 《桐溪先生年譜》 [주D-015]한 지아비가 …… 내리고 : 전국 시대 연(燕) 나라 추연(鄒衍)이 충성을 다하여 혜왕(惠王)을 섬기다가 소인들의 참소로 억울하게 옥에 갇혔는데, 하늘을 쳐다보고 통곡을 하였더니 5월에 찬서리가 내렸다 한다. 《論衡 感虛篇》 [주D-016]한 지어미가 …… 이룬다 : 한(漢) 나라 때 어떤 홀어미가 효도를 다하며 시어머니를 봉양하는데,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어여삐 여겨서 재가(再嫁)를 시킬 심산으로 자살을 하였다. 그런데 시누이가 “올케가 어머니를 목졸라 죽였다.”고 고발하여 관가에서 효부를 죽이고 나니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 한다. 《漢書 卷71 于定國傳》 [주D-017]예(禮)를 벗어나 :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상주 노릇하는 예는 …… 50세가 되면 너무 야위지 않도록 하고, 60세가 되면 야위지 않도록 하며, 70세가 되면 상복만 입고 술과 고기를 먹으며 안에서 거처한다.” 하였는데, 이때 공이 62세로서 몸이 야위도록 슬퍼한 것은 예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주D-018]상변(上變) : 이 상변은 교하(交河) 사람 임석간(林碩幹)이, 이시열(李時悅) 형제가 사형을 받게 되어 국가에 배반할 뜻을 품고 있는 사실을 알고 그들과 반역을 모의하다가, 성사가 불가능하자 이시열 등이 반역을 모의한다고 앞질러 상변한 일을 말한다. 《仁祖實錄 卷28》 [주D-019]봉사(封事) : 임금에게 올리는 글로, 승정원(承政院)에서 뜯어보지 않고 봉해진 그대로 상달하는 것을 말한다. [주D-020]송(宋) 나라 …… 때 : 송 영종(宋英宗)이 그의 생가 부모에게 황백(皇伯)이란 칭호를 쓰고자 하니, 구양수가 황백은 예의상 부당하고, 또 아버지ㆍ어머니란 칭호는 없앨 수 없으니, 아버지ㆍ어머니를 그대로 부르고 황왕(皇王)으로 추촌하자고 한 제의를 말한다. 《宋史 卷319 歐陽脩列傳》 [주D-021]상변(上變) : 이 상변은 삼례(參禮)에 사는 생원(生員) 이기안(李基安)이 사근 찰방(沙斤察訪) 김경(金坰)과 만난 자리에서, “인조는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된다.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느냐.”고 한 말을 삼례 찰방 민희안(閔希顔)이 본도 관찰사 원두표(元斗杓)에게 알려, 의금부에 보고되었는데, 추국청(推鞠廳)에서 이기안을 추국하자, 사실을 자백하면서 백이문(白以文)ㆍ정온(鄭蘊) 등 많은 사람을 끌어대었던 일을 말한다. 《仁祖實錄 卷31》 [주D-022]소대(召對) : 임금의 소명(召命)을 받고 대궐 안에 들어가서 강론(講論)하거나 자문(諮問)에 응하는 것을 말한다. [주D-023]비방목(誹謗木) : 백성의 여론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세워 놓은 나무이다. 제요씨(帝堯氏)가 사람이 많이 다니는 다리[橋]에 판자 기둥을 세워 놓고 오가는 백성들로 하여금 좋은 계책이나 또는 정치의 잘못된 점을 쓰게 하였다. 《漢書 卷4 文帝本紀 集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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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추구하는 만대산
기언(記言) 제39권 원집(原集)

동서 기언(東序記言)